한약의 효용은 사람마다 다르고 체질에 따라 맞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지만 나는 정기적으로 한의원에 간다. 소설 쓰기가 불편한 자세로 앉아 있어야 하는 일이니까 침이나 물리치료를 위해서도 가고 기운이 없으면 체력 보충을 위해서도 간다. 갈 때마다 한의사는 꿋꿋하게 운동을 강조했다. 직접 시범을 보이는 것은 물론이고 숙련된 조교의 도움이 필요할 때면 간호사분이 등장해 허벅지근육을 키우는 방법과 플랭크 동작을 가르쳐주기도 했다. 어느 날은 안 되겠다 싶은지 내게 유튜브에서 자기가 인상 깊게 본 춤 채널도 권했다. 젊고 유연한 유럽의 청년들이 하는 느리고 우아한 댄스였다. 춤이라니. 평소에도 냉소를 모자처럼 쓰고 다니고 마감 때면 더 기분이 가라앉는 내가 춤을 춘다니. 하지만 나는 한의사가 좋고 그녀를 신뢰하기 때문에 적어도 그 순간에는 춤동작을 유심히 봤다.
마음이 힘든 오늘, 내가 신년에 겪은 부당한 일 때문에 잠을 자지 못하고 먹을 수가 없으며 화가 난다고 하자 그는 조용히 듣고 있다가 사실은 자기도 누군가가 억울해지는 장면을 유독 견디지 못한다고 했다. 텔레비전을 보다가도 주인공이 그런 부당함에 빠져 있으면 나 못 보겠어! 하고 어려서부터 달아나곤 했다고.
나는 머리가 귀밑까지 짧고 귀엽고 선한 인상을 한 그녀의 어린 시절을 상상했다. 가족들과 함께 텔레비전드라마를 보고 있던 아이가 다른 사람들은 이제야 일이 벌어지는구나 싶어 기대 중인 그 타이밍에 “아앗!” 하고 얼굴을 가리며 다른 방으로 달아나는 장면이었다. 어쩌면 누군가를 치료한다는 것은 그가 겪고 있을 어려움과 증세에 동화되고 공감한다는 것이니까, 어려서부터 그런 재능을 가졌던 사람이 여기 있구나 싶었다. 반면 나는 갈등하는 장면을 잘 보지 못하는 사람이다. 눈앞에서 누가 싸우고 있거나 논쟁을 벌이고 있으면 슬그머니 피하며 채널을 돌리게 된다. 그만큼 상대와 상대가 맞서는 긴장을 제대로 처리하지 못한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런 상황에서 내게 부당한 일을 강요한 누군가들에게 맞서는 건 나로서는 용기를 낸 것이었다.
내 얘기를 들은 한의사는 자기 역시 누군가에게 들은 것이라며 “유이책보예용”의 원칙을 알려주었다. 가수 중에 유이가 있으니까 그 이름으로 기억하면 더 쉬울 거라는 도움말도 주었다. (하지만 나는 진찰을 하는 그 30분 정도의 시간에도 까먹어 나갈 때쯤 다시 물었다) 그것은 잘못을 저지른 사람이 해야 할 여섯 가지 행동에 관한 원칙이었다. 그러니까, ‘유’감을 표시하고 왜 그랬는지, ‘이’유를 말하고 그것에 대한, ‘책’임을 지고 ‘보’상을 하고 ‘예’방을 약속하고 ‘용’서를 구한다. 그리고 우리는 그가 그렇게 행동했을 때 비로소 용서를 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 여섯 가지 중 어느 하나라도 빠져 있다면 용서를 행할 수가 없다.
“식사는 잘하고 있어요?” 하고 진찰이 끝날 때쯤, 그가 물었다. 스트레스를 풀어야 한다며 간장게장에서 초밥까지 맛집들을 전전해온 나는 그러나 어쩐지 쓸쓸해져 “맛있는 건 많이 먹는데 영 입맛이 없어요” 하고 대답했다. 그는 내게 무엇보다 좋은 쌀을 사고 다양한 종류의 쌀을 사는 데 돈을 아끼지 말라고 했다. 수수나 현미 같은 잡곡 이외에도 5분도미, 7분도미 같은 종류들까지. 그렇게 해서 좋은 쌀로 밥을 지으면 묵은김치를 들기름에 들들 볶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식사가 되니까.
들기름에 볶은 김치와 아주 잘 지어진 밥, 상상만으로도 입맛이 도는 듯했다. 그건 억울한 사람들을 차마 보지 못하는 여자아이와, 갈등을 도무지 만들고 싶지 않은 또 다른 아이가 만나서 한 끼 먹기에 좋은 메뉴이기도 했고, 그렇게 같이 외워보는 유이책보예용 역시 모두를 어떻게든 지켜줄 것 같은 마법의 주문이었다.
김금희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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