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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에서] 페스트가 보내는 또 다른 쥐

입력
2020.02.03 04:3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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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일 오후 서울의 한 교회에서 신도들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예방 등을 위해 마스크를 쓴 채 예배를 보고 있다 연합뉴스
2일 오후 서울의 한 교회에서 신도들이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 예방 등을 위해 마스크를 쓴 채 예배를 보고 있다 연합뉴스

‘페스트나 전쟁이 발생하면 사람들은 언제나 속수무책이었다.’

1940년대 감염증이 창궐하는 알제리 오랑을 배경으로 한 프랑스 작가 알베르 카뮈의 ‘페스트’ 속 구절이다. 죽은 쥐들의 출현, 그 뒤로 이어지는 돌발적인 열병에 대한 뉴스. 급기야 병명(페스트)이 떠오르는 지점에서 작품 속 화자는 감염증이라는 대형 재난 앞에 선 인간의 무력함을 이렇게 전쟁과 빗대어 표현했다. 농경사회가 본격화돼 집단을 이뤄 살아가기 시작한 이래 인류는 어느 한 시대라도 페스트와 같은 감염증, 그리고 전쟁으로부터 안전하지 못했다. 거리의 ‘죽은 쥐’처럼 전조를 드러내는 경우가 있지만 이 두 가지 비극의 공통점은 언제 시작될지 귀띔해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더구나 둘 다 언제 어떻게 끝날지도 예단할 수 없다. 더욱 무시무시한 닮은 점은 따로 있다. 얼마나 많은 인명피해가 날지, 최소한 휴전협정이 맺어지거나 감염증 위기종료 선언이 내려지지 않는 한 섣불리 가늠할 수 없다는 것이다.

2015년 5월 말 바레인에서 돌아온 60대 남성이 확진자로 확인되며 시작된 중동호흡기증후군(MERSㆍ메르스) 사태를 겪으면서 우리 사회는 70여년 전 카뮈가 표현했던 속수무책의 절망감을 느껴야 했다. 그해 여름이 가기 전 38명의 부고를 받아 들어야 했던 위정자들과 방역당국 책임자들은 아마도 감염증 앞에 절대 오만해선 안 된다는, 값비싼 가르침을 뼈에 새겼으리라. 2002년 중증급성호흡기증후군(SARSㆍ사스) 위기는 ‘사망 0명’으로 막는 훌륭한 전과를 거뒀지만 당시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방역수준이 올라간 2015년 오히려 우리는 처참한 성적표를 받아들여야 했다. 세상에 가볍게 볼 전쟁이 없듯이, 그런 감염증도 없다.

첫 국내 유입 소식이 전해진 지난달 20일 이후 2주가 지나지 않아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은 15명의 확진자를 쏟아냈다. 메르스 위기 이후 철저한 정보공개와 방역 시스템 개선을 약속한 당국의 노고와 시민의식 덕분에 아직 감염자의 꼬리를 놓치는, 지역사회 감염 수준까지는 다다르지 않고 있다. 중국의 사망자가 300명을 넘어서는 등 신종 코로나의 기세가 꺾이지 않고 지난 금요일 하루동안 확진자 5명, 그리고 3차 감염자까지 나타날 정도로 국내 확산세도 속도를 내고 있지만 세계 방역수준 9위 국가(세계보건보안지수 기준)답게 우리 사회는 최악의 국면으로 치닫고 있지는 않고 있다.

하지만 서서히 드러나는 방역망의 약한 고리들이 5년 전, 나아가 전 지구가 수없이 겪었을 감염증 대유행의 마지막 장면들을 떠올리게 한다. 섣부른 격리대상자 지정운영으로 3차 감염자를 유발시킨 점, 뒤늦게 방역수준을 끌어올린 당국의 실기, 정부 기관 간 원활하지 못한 소통으로 불안을 키워낸 미숙함은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라도 질타해 막았어야 할 구멍들이다.

방역수준이 격상되기 전 감염된 환자들의 잠복기가 끝나고 중국인들의 춘제 연휴가 종지부를 찍는 2월 초순은 신종 코로나 사태 결말의 향방을 정할 중요한 터닝포인트다. 그래서 지금은 비난보다 격려가 필요하고, 혐오보다 포용이 절실한 시점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지막 위기종료 선언 때까지 메르스 등 여러 감염증 사태가 우리에게 전해준 ‘가벼운 감염증은 없다’는 소중한 교훈들을 잊지 말아야 할 것이다.

카뮈는 ‘페스트’의 마지막 문장을 이렇게 적었다. ‘인간들에게 불행과 교훈을 주기 위해 페스트가 쥐들을 다시 깨우고, 그 쥐들을 어느 행복한 도시로 보내 죽게 할 날이 오리라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분명한 것은 신종 코로나는 우리를 위협할 마지막 감염증이 아니라는 점이다. 앞선 감염증들의 교훈을 잊는다면, 언제라도 우리는 페스트가 보내는 또 다른 쥐들을 맞게 될 것이다.

양홍주 정책사회부 부장 yangho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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