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턴이 가봤다]
경력 50년 이상 시계공 모인 ‘시계 종합병원’, 종로구 세운스퀘어
시계는 0.01초의 작은 오차라도 생기면 곧 본래의 기능을 잃는다. 제아무리 수천 만원을 호가하는 명품 시계라도 그렇다. 특히 수백 수천 개의 부품들로 이루어진, 태엽을 감아 쓰는 기계식 시계의 경우 좁쌀만한 부품 하나하나의 작동이 늘 정확히 맞아 떨어져야 한다.
그래서 시계를 수리하는 기술은 시계를 만드는 것만큼이나 중요하다. 작은 시계를 분해해서 고장이 난 부분을 찾고, 다시 순서대로 하나하나 조립하는 일은 매우 정교한 기술을 필요로 한다. 고장이 난 시계를 고치는 시계공이 사람을 치료하는 의사에 비유되는 까닭이다.
부품 세척부터 유리 제작, 로고 각인까지…죽은 시계도 뚝딱 살려낸다
서울 종로구 세운스퀘어는 이렇게 시계를 살리는 ‘의사’들이 모여 있는 곳이다. 간단한 수리는 동네 금은방이나 수리센터에서 해결할 수 있지만, 그곳에서도 고치지 못한 시계는 어김없이 이곳 세운스퀘어로 모인다. 금은방과 백화점 시계수리센터가 동네 의원이라면, 이곳 세운스퀘어는 대학병원 혹은 종합병원인 셈이다. 시계 무브먼트(부품들이 모여 있는 시계의 동력장치) 세척부터 부품 교환 및 제작, 로고 각인 등 각자의 전문 분야로 분업화된 시스템 역시 다양한 전문의가 모인 대학병원에 비유할 만하다.
1층에는 각종 보석과 시계를 판매하는 점포 수십 개가 들어서 있고 2층에서 5층까지 다양한 시계 수리 장인들이 한 건물에서 각자의 작업을 이어가고 있다. 2층 시계공 대부분은 시계 부품을 분해해 세척하고 교환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다이얼(문자판) 재생이나 로고 각인 전문점도 있고, 납작한 유리를 구부리고 깎아 시계알에 딱 맞는 유리만을 전문적으로 만드는 장인도 있다. 3층에는 고급 시계 속 보석을 세공하는 장인들이, 4층 식당가를 올라 5층에는 주로 시계줄이나 유리의 흠집과 얼룩을 가리는 폴리싱 전문점이 위치해 있다.
지난달 22일 찾은 세운스퀘어에서는 복도를 따라 나란히 붙어 있는 각 점포 유리창 너머로 작업대에 앉아 수리에 열중인 시계공을 들여다 볼 수 있었다. 약 9.9제곱미터(㎡·3평) 남짓한 작은 공간에서 수리공 혼자 일하는 곳도 있는가 하면, 기역자로 혹은 등을 마주 대고 앉아 두 명이 한 공간에서 작업중인 곳도 있다. 두 눈도 모자라 확대경까지 끼고는 등을 구부리고 앉아 시계를 분해하거나 부품을 닦는 등 모두 바삐 일하는 중이었다.
세운스퀘어 시계공 대부분은 2006년 종로구 일대 재개발 계획 발표와 함께 길 건너편 예지동 시계골목에서 이곳으로 넘어왔다. 1960년대를 전후해 청계천변 상인들이 이주해와 형성된 예지동 시계골목은 70~80년대 국내 시계산업이 전성기를 맞으면서 전국의 시계장이들이 모여든 곳이다.
미국, 일본의 낡은 시계까지 수리공들 손 거치면 값어치 껑충
수리점 내부에서 저마다 바삐 손을 움직이는 시계공들을 제외하면 세운스퀘어 내부는 언뜻 한산해 보이기도 한다. 전성기 때에 비하면 일감이 다소 줄기도 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시계 수리 산업의 유통망이 변한 까닭도 있다. 예지동 시계 골목이 한창 붐비던 70~80년대에는 직접 찾아와 수리를 맡기는 일이 많았지만 요즘은 개인 고객이 가까운 금은방이나 백화점 시계수리 센터에 수리를 맡기면 이들이 시계공에게 전달하는 일종의 하도급 시스템으로 굴러간다. 동묘에서 시계방을 운영하는 안규호(70)씨 역시 이날 고객들로부터 수리를 의뢰 받은 시계 여러 개를 가지고 와 전문 수리공 여럿에게 시계를 수리 받고 돌아갔다.
시간이 갈수록 고객 대부분은 직접 찾아오기보다는 택배로 시계 수리를 맡긴다. 60년 넘게 예지동과 세운스퀘어에서 시계 수리를 해온 유용기(78) 씨는 “개인 고객은 대부분 이렇게(택배로) 시계를 맡긴다. 제주에서도 소문을 듣고 나한테 시계(수리)를 보낸다”면서 고객 명단이 빼곡히 담긴 종이를 보여줬다. 실제 택배로 수리를 맡기고 찾는 이들이 많다 보니 요즘에는 우체국에서 오전 오후 하루 두 번씩 각 수리점을 돌며 수리가 끝난 택배 상자를 가져간다.
세운스퀘어 시계공의 뛰어난 시계 기술을 활용해 새로운 사업 기회를 여는 이들도 있다. 비교적 낮은 가격에 구한 중고 시계가 이곳 세운스퀘어 시계공의 손을 거쳐 재탄생하면, 이를 높은 가격에 되파는 것이다. 2008년 영어를 가르치러 한국을 찾았다가 지금은 엔틱 시계 판매를 하고 있는 캐나다 출신 세바스찬(48)이 대표적이다. 애초 오래된 기계식 시계를 분해하고 재조립하는 게 취미였던 그는 우연히 예지동 시계골목 장인들을 알게 되면서 사업을 구상했다. 가치를 제대로 평가 받지 못하던 오래된 시계를 미국, 일본 등에서 수입한 뒤 이곳 시계공의 뛰어난 기술로 수리해 미국과 캐나다에 재수출하는 것이다. 10여년째 사업을 이어오고 있는 그는 “세운스퀘어에는 세계적으로도 훌륭한 시계공이 모여 있다. 유럽이나 일본의 시계공보다 훨씬 기술이 좋다”며 “유럽에서 이런 기술자를 찾아 수리를 맡기려면 훨씬 더 많은 비용을 지불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살아 있는 것 같은’ 매력, 기계식 시계 다시 찾는 이들
한오남(72) 씨는 세운스퀘어에 2층에서 기계식 시계 부품을 직접 제작하고 판매하고 있다. 그는 20대 후반에 국내 시계회사 ‘오리엔트’에 입사했다. 오리엔트는 시티즌과 함께 당시 국내 시계산업의 양대산맥을 이뤘다. 그가 오리엔트에서 일하던 70년대 당시 국내 시계 생산 기술은 일본을 따라잡지 못했다. 부품을 직접 만들어 생산하는 대신, 일본에서 부품 낱개를 전부 수입해 생산라인에서 조립했다.
그럼에도 뛰어난 조립 기술로 우리나라는 시계 산업에서 명성을 쌓기 시작했다. 100% 국내에서 제작된 시계에 대한 기대감이 커져가고 있었다. 그러나 1980년대 말 배터리로 작동하는 저렴한 전자식(쿼츠ㆍquartz) 시계가 중국에서 대량으로 수입되기 시작했다. 기계식 시계의 인기는 빠르게 식었다. 그 무렵 한씨도 오리엔트에서 나와 예지동 시계골목에 들어왔다. 1990년대에 이곳에서도 전자식 시계인 아날로그나 디지털 시계를 팔고 수리했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그가 젊은 시절을 바쳤던 기계식 시계가 다시 유행을 하기 시작했다. 국내에 명품 기계식 시계가 들어오면서다. 그는 기계식 시계의 부활을 ‘당연하다’고 했다. 그는 “전자식 시계는 시계 같다는 느낌이 안 든다. 그냥 쇳덩어리 장난감, 멍텅구리 같다”고 말했다. 그는 기계식 시계를 열어 무브먼트를 보여주면서 “반면에 얘네(기계식 시계)는 살아 있는 것같이 생동감이 느껴진다”고 말했다.
명품 기계식 시계의 경우는 시곗값 만큼이나 수리비도 비싸다. 한씨는 “수천만원대나 억대 시계는 수리비로 100~200만원까지 받아봤다”고 말했다. 그러나 지금껏 손본시계 중 어떤 시계가 가장 기억에 남느냐는 질문에는 정작 “딸이 어머니 유품이라며 들고 온 아날로그 시계가 기억에 남는다. 감정해봤을 땐 5만원도 채 안 되는 시계인데도 5만원 이상 받고 고쳐가더라”며 “시계는 몸에 늘 붙어 있던 거니까, 그 그리움 때문에 그렇게들 고쳐 쓰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월남 전쟁터에서도 시계 고쳐… “식구 먹여 살리려 시작한 게 평생 일 됐다”
세운스퀘어 시계공이 수십년간 분해하고 수리해 다시 조립해온 시계에는 우리 근현대사가 오롯이 녹아 있다. 우리나라는 70~80년대 국제기능올림픽에 출전해 시계 부문에서 여러 번 우수한 성적을 거뒀을 만큼 뛰어난 시계 기술을 갖고 있다. 그런 만큼 이곳 시계공이 들려준 이야기에선 기술에 대한 긍지와 함께 가난하던 시절 입 하나 덜기 위해 배운 기술로 평생 가족을 먹여 살리려 땀 흘려온 그들의 수십년 노고도 담겨 있었다.
유용기 씨의 수리점은 손님 두세 명이 들어오면 가득찰 정도로 좁다. 그곳에서 유씨는 동그란 확대경 한 알을 끼고 언뜻 봐도 오래돼 보이는 금시계를 손 보고 있었다. 책상 위에는 각종 장비와 크기별 핀셋 및 드라이버만 수십개가 가지런히 정돈돼 있고, 그 옆에는 부품 상자가 쌓여 있다.
유씨의 시계 수리 경력은 60년이 넘는다. 충남 논산에서 태어난 그는 중학교 내내 반에서 1등을 했을 정도로 머리가 좋았지만 마지막 학기를 앞두고 학비를 내지 못해 고교 진학을 포기했다. 하는 수 없이 기술을 배워야 했다. 기술을 배우면 먹고는 살지 않겠냐는 생각이었다. 마침 어머니의 육촌 형제가 전북 익산에서 시계방을 하고 있었다. 유씨는 그곳에서 밥만 얻어먹는 대가로 일을 도우며 어깨너머로 기술을 배웠다. 일제 강점기 당시 일본에 건너갔다 돌아온 시계 기술자가 그의 스승이었다.
유씨는 월남전에 참전해서도 시계를 고쳤다. “그때만 해도 시계가 귀한데, 고참들이 거기(베트남)서 시계를 고쳤는데 고쳐 온 시계가 가지 않거든. 그래서 시계점에 가서 ‘너 나와 봐라. 내가 고쳐볼 테니’ 하고는 거기로 들어가서 고쳐 온 거지”. 그 후로 그는 고참들의 시계를 도맡아 고쳤다. 귀국 후에는 예지동에 정착했다. 노점 장사를 시작했지만 곧 빚을 져 장사를 접고 남이 하는 시계방에 들어가 시계를 고쳤다. “그때는 죽으라고 시계를 고쳤어. 그때 시계가 제일 잘 되고 (시계로) 돈을 벌 때였는데, 나는 수리비는 싸게 받으면서 그 사람들 뒷바라지만 한 거지.” 그렇게 새벽에 출근해 막차 시간까지 일하며 번 돈으로 빚을 다 갚고서야 자신만의 수리점을 차렸다.
이생희(68) 씨는 50여년째 시계방이나 백화점 같은 시계 업자를 상대로 일해오고 있다. 그 역시 처음부터 시계가 좋아 시계 기술을 배운 건 아니다. 6남매 중 맏이였던 그는 집에서 입 하나 줄이기 위해 시계 기술을 배우기 시작했다. 그 역시 일제 때 일본 시계 공장에 동원됐다가 해방 후 한국에 들어온 시계 수리공 밑에서 어깨너머로 일을 배웠다. 지금이야 부품을 얼마든지 수입할 수 있지만 당시는 실수로 부품 하나만 망가뜨려도 큰일이었다. “그땐 맞아가면서 배웠지. 실수하면 죽는 거야.” 그는 “배우고 싶어서 배운 것도, 하고 싶어서 한 것도 아니다. 살아야 하니까, 먹고 살기 위해서 한 거”라고 말했다. 이씨는 그렇게 배운 기술이 평생의 업이 돼 지금도 시계를 만지고 있다.
이미령 인턴기자 digital@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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