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년 만에 재번역 출간된 1961년작 논란의 역사 고전 
1938년 9월 28일 뮌헨 협정을 체결한 4개국 지도자들. 앞줄 왼쪽부터 영국의 네빌 체임벌린, 프랑스의 에두아르드 달라디에, 독일의 아돌프 히틀러,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와 갈레아초 디 치아노. 페이퍼로드 제공

‘전쟁을 좋아하는 정치인’은 형용 모순에 가까운 표현이다. 아무래도 안정된 집권에 전쟁이라는 변수가 이롭기보다는 해로운 쪽으로 작용할 공산이 크기 때문이다. 군비에는 돈이 들고 전장에서는 사람이 죽는다. 궁핍과 불안을 국민이 감내하게 해야 한다. 한반도를 보라. 정도가 다를 뿐 남북 모두 병영 국가다.

히틀러라고 달랐을까. 물론 강력한 독일제국을 건설하겠다는 욕망이 약하진 않았다. 정치 지도자라면 누구나 품는 야심이니까. 그걸 관철하려 전쟁도 불사하느냐는 별개 문제다. 정황들은 히틀러가 유별난 호전광이 아니라고 말한다. 여느 정치인과 마찬가지로 히틀러 역시 전쟁 준비 때문에 국민의 생활 수준이 떨어져 자기 인기가 추락하는 일이 없기를 바랐다.

대규모 전쟁을 준비하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준비하지 않는 게 히틀러가 추구한 정치 전략이었다. 그는 군비 지출 비용을 부풀렸다. 전쟁 발발 전 나치 정부가 재군비를 위해 900억마르크를 썼다고 히틀러는 주장했지만 실제 투입한 비용은 400억마르크에 불과했다. 전쟁 직전인 1938, 1939년에야 비로소 투입 예산을 본격 늘리기 시작했는데, 그때는 이미 ‘낙장불입’ 상태였다.

장기전을 치를 능력이 독일에 없다는 사실을 히틀러는 알고 있었고, 그건 내내 고민거리였다. 만약 다른 강대국들이 독일에 대항해 연합할 경우 독일이 위태로워질 가능성이 있다고 그는 판단했다. 허세의 배경이었을 것이다.

히틀러는 치밀한 전략가라기보다는 임기응변에 능한 기회주의자였다. 집권부터 장기적 음모의 결과가 아니었다. 집권 뒤에도 독일을 대공황에서 벗어나게 할 복안은 없었다. 오로지 신념과 결심뿐이었다. 주도면밀한 계획에 따라 행동하기보다 주어진 상황과 일어나는 사건들을 최대한 이용하는 정치인이 히틀러였다. 독일군이 오스트리아 빈으로 진격하던 중 수송 수단의 70%가 고장났다는 사실은 그의 무모를 단적으로 증명한다. 교묘한 술책으로 승승장구하던 그가 결국 파멸한 건 진짜 군사력이 승패를 결정하게 된 때였다.

1940년 6월 파리 입성 뒤 에펠탑 앞에 선 히틀러(가운데). 페이퍼로드 제공

전쟁 없이 엄포만으로 히틀러가 원하는 것을 계속 얻어낸 데에는 ‘파멸만은 피해야 한다’는 유화론자들의 강박 사고와 히틀러의 전쟁 의지에 대한 그들의 오판이 세게 작용했다. 오스트리아 합병(1938년), 체코 수테텐란트 병합 및 프라하 침공(1938~1939년) 등은 당한 나라의 자초(自招)와 막아야 할 나라의 묵인에 히틀러가 편승한 결과였다. 회피 노력이 전면전을 부추긴 역사의 아이러니이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을 히틀러가 꾸며낸 음모의 실현으로 간단히 치환해 버리는 주류 역사가들을 향해 “히틀러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면 책임을 나눠야 할 모두가 만족스럽기 때문 아니냐”고 일갈하는 이 책은, 1961년 초판이 나오자마자 격렬한 논쟁을 일으켰다. 당연한 일이었다. 히틀러에게 면죄부를 줬다는 비난이 들끓었고 2년 뒤인 1963년 저자가 ‘다시 생각함’이라는 제목의 서문을 덧붙여 해명하기도 했다. “히틀러 변호를 위해서가 아니라 역사적 진실을 위한 수정”이라고 말이다.

영국 옥스퍼드대 교수를 지낸 저자가 정의하는 역사는 “사람들의 구체적인 사고와 행동이 빚어내는 돌발적인 사건들과 다시 이에 대처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서술하는 것”이다. 역사에 관철되는 관념이나 철학, 역사를 설명하는 일반론이 있다는 시각의 반대편에 저자는 선다. 자국 정부가 하는 행동은 관대하게 해석하는 반면 히틀러를 악의 화신인 것처럼 몰아가는 식의 이기적인 태도는 바람직한 게 아니라는 것이다. “인간의 사악함보다는 실수가 역사 형성에 더 많은 역할을 한다”는 게 저자 주장이다. 당위론도 배격한다. “역사가의 의무는 일어났어야 하는 바를 말하는 게 아니라 무슨 일이, 왜 일어났는지를 밝히는 것”이라고 말한다.

 준비되지 않은 전쟁, 제2차 세계대전의 기원 
 A. J. P. 테일러 지음ㆍ유영수 옮김 
 페이퍼로드 발행ㆍ560쪽ㆍ3만3,000원 

책은 이미 2003년에 한 번 번역됐다. 17년 만의 재출간이다. 역자는 “참신한 해석의 이면에 갖춰진 엄격한 사료 채택 방식과 논리적 완결성으로 역사 서술의 모범이 된 건 물론 2차 세계대전 원인에 대한 본격 연구를 촉발한 고전”이라며 “특히 젊은 세대가 편하게 읽을 수 있게 쉽게 옮기는 데 주력했다”고 했다. 저자 사후 1991년 출간된 증보판이 원본이다.

권경성 기자 ficcione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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