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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남미 꼴 난다’ 하지 말라

입력
2020.01.24 04:4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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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지난해 11월 23일 칠레 수도 산티아고 중심지의 모습. 시위가 한창임에도 삶은 또 이어져가고 있다.
지난해 11월 23일 칠레 수도 산티아고 중심지의 모습. 시위가 한창임에도 삶은 또 이어져가고 있다.

지난 연말 취재차 남미를 다녀왔다. 칠레 시위 현장을 시작으로 아르헨티나, 브라질을 거쳐 베네수엘라까지, 여정은 한달 가량 걸렸다. 그리 길지도 그렇다고 짧지도 않은 시간, 많은 사람들을 만나며 ‘500년째 기회의 대륙’인 지구 반대편 남미를 속속들이 들여다 보려 했다.

우리나라에선 지하철 요금 50원(30페소) 인상 때문에 국민들이 들고 일어섰다는 점에 초점이 맞춰져 보도된 칠레는 실제 가보니 국가가 아예 서민들을 챙기지 않아 분노가 극에 치달은 경우였다. 국가는 남미에서 제일 부유한데, 국민 대다수는 가난한 속사정이 표출됐다. 아르헨티나에서는 당장의 이익을 빼앗긴 국민들이 부패한 포퓰리즘(인기영합주의) 정부를 다시 선택한 배경을 살펴 봤다. 브라질에서는 소수 엘리트들의 이익을 위한 정치에 국민들이 범죄에 자연스럽게 발을 담그는 모습도 목도할 수 있었다.

그리고 국내에서는 포퓰리즘으로 망한 나라로 알려진 곳, 베네수엘라. 물론 나라를 등진 대다수 국민들이 주변국에서 업신여김과 손가락질을 받는 상황이 펼쳐지고 있었다. 그러나 내부에서는 다시 민간의 힘으로 경제에 힘이 실리고 활기가 넘실대는 광경도 볼 수 있었다. 석유의 저주가 여전하지만 ‘언제든 하늘이 둔 자원의 힘으로 다시 일어설 수 있다’는 현지인들의 자신감도 느낄 수 있었다. 남미 국가 어느 하나도 뭉뚱그려 ‘이꼴이다’고 단정할 수 없는 그들 나름의 삶을 사는 방식을 보았다.

그 동안 우리는 남미를 어떻게 봐왔나. 자원은 풍부하지만 가난하고 게으르고 그래서 못 살고 부패한 대륙으로 치부해오지 않았나 싶다. 서방에 경도된 색안경에다 우리의 잣대까지 들이대며 그들을 재단한 결과다.

우리 정치권에서 남미는 경멸의 대상이 된 지 오래다. 걸핏하면 ‘이러다가 남미 꼴 난다’, ‘베네수엘라 꼴 난다’는 말들이 난무해 왔다. 복지 정책은 어느덧 ‘베네수엘라의 퍼주기’가 되고, 일자리 창출은 ‘남미의 포퓰리즘’과 동급이 됐다. 국제통화기금(IMF)과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등 국제기구가 우리에게 권고한 ‘확장 재정’을 정부가 실행해도 ‘건전재정을 팽개친 남미’가 소환되기 일쑤였다.

남미가 우리에게 반면교사가 될 부분이 적지 않은 건 사실이다. 그러나 이처럼 오직 정쟁을 위해, 상대를 폄하하고 끌어내리기 위해 제대로 알지 못하는 나라를 제멋대로 난도질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남과 북의 대치 상황만 보고, 북한의 미사일 실험만 보고 ‘전쟁이 곧 일어날 나라’로 우리를 보는 해외의 어긋난 시각과 다를 게 없다. 아르헨티나는 노벨상 수상자를 5명이나 배출한 나라다. 그것도 평화상을 2명, 의학과 화학에선 3명을 배출했다. 칠레에서는 문학 2명, 브라질은 의학 1명이 각각 나왔다. 칠레와 브라질엔 세계 100위권 대학도 즐비하다. 브라질 항공기술도 인정받는 분야다. 이런 부분들은 제쳐둔 채 쉬이 ‘남미 꼴 난다’고 말하는 것은 무책임하고 무례하지 않은가.

취재 도중 칠레에서는 “한국의 의료보험 제도가 정말 부럽다”는 말을, 브라질에서는 “우리나라를 한국인들이 이끌었으면 훨씬 발전했을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자부심을 가져도 되는 말인데, 왜 우리 정치권은 우리 스스로를 ‘남미 꼴’ 운운하며 격하하는지 멋쩍었다.

정작 현지에서 느낀 것 중에 ‘남미 꼴 났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점이 있었다. 바로 행복감이다. 유엔 산하 자문기구인 지속가능발전해법네트워크(SDSN)가 발표한 ‘2019 세계 행복 보고서’에 따르면 2016~18년 국가별 행복도는 칠레(26위) 브라질(32위) 아르헨티나(47위) 순으로 나타났다. 우리나라(54위)보다 높다. 정치인들이 해야 할 일은 명확하다. 국민 행복도를 높이는 것. 베네수엘라의 순위가 108번째라고 또 ‘그 꼴 난다’고 말할 게 아니다.

이대혁 정책사회부 차장 selected@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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