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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출마의 이유

입력
2020.01.23 04:4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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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5℃’는 한국일보 중견 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총선에서 유권자의 선택을 받은 국회의원들에게만 주어지는 금 뱃지. 한국일보 자료사진
총선에서 유권자의 선택을 받은 국회의원들에게만 주어지는 금 뱃지. 한국일보 자료사진

출사표가 넘실댄다. 기어코 총선의 계절이 돌아온 덕이다. 선언은 그 물결에 떠내려갈 것 같은 정도로 쏟아지지만, 가끔은 이런 현기증이 싫지만은 않다. 뜨겁고, 결연하고, 엄숙하고, 때론 위트 있는 어떤 ‘출마의 변’들은 한 발짝 옆에서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울컥하는 울림을 주기 때문이다.

공존의 정치를 펴겠다. 원칙을 지키고 타협하지 않겠다. 약자의 편에 서겠다. 장애인의 소망을 안고 함께 훨훨 날아오르겠다. 갈등의 벽에 사랑의 못을 박겠다. 전우의 땀과 눈물의 무게를 기억하겠다. 전관예우를 거부하고 약자를 보호하는 현장에 있겠다. 경력단절 여성이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작은 희망의 근거를 만들겠다. 사회에서 배운 것을 법과 제도로 돌려드리겠다. 제 젊음을 조국을 위해 쓰겠다 등등. 주위를 반짝 빛내는 이런 말들을 한 글자 한 글자 다시 본다. 선한 사람이 이리도 많구나. 은근한 위안도 안긴다.

더러 빛보다는 얼룩처럼 느껴지는 출마의 변도 적잖다. 누군가를 깎아 내리고, 제거를 다짐하고, 압승을 장담하며, 저격을 꿈꾼다. 아버지의 길을 잇겠다 각오하고, 어르신의 뜻을 따르겠다 벼른다. 봉건시대 토호도 아닌데 우리 동네의 아들, 딸, 사위, 일꾼 심지어 머슴도 자처한다. 이제 드디어 여러분이 기다리던 제가 나선다는 식의 선심도 쓴다. 동물의 언어도 아닌데 으르렁 소리가 들리는 듯하다. 역시 한 글자 한 글자 다시 본다. 선거란 역시 참 묘한 잔치구나. 입맛이 쓰다.

출마의 이유를 구성하는 말들은 그 언어도 각양각색이지만, 거기 담긴 의욕의 빛깔이 놀라울 정도로 다채롭다. 헌신 포기 각오 변화 애국 소명 출세 명예회복 등이 혼재한다. 이 가운데 가장 묘한 욕망은 명예회복이다. 이런 경우 출사표는 “넘어진 아이를 일으켜 세워달라”, “주민과 당원의 판단을 받겠다”, “(선거 때도 공세를 계속 하는 건 그 후보를 택할) 시민에 대한 모욕이다” 등의 말로 채워진다.

이 기대대로 온갖 논란과 구설에도 불구하고 ‘유권자의 선택을 받은 자’라는 프리패스를 얻고 나면 공세의 화살이 갈피를 잃게 되니, 혹자들에게 선거는 참 매력적인 부활전의 무대다. 금배지의 위력이다. 이런 기사회생이 얼마나 큰 다른 대가를 초래하는지 정확히 추산하긴 어렵겠지만.

이런 형형색색의 출사표를 보고 있자면 떠오르는 장면이 하나 있다. 한 참모가 까칠하기로 소문난 자기 의원을 존경하는 이유를 귀띔하던 장면이다. 옛날 옛적 적잖은 지인과 참모가 말리던 험지 출마를 당 원로들의 요청에 따라 굳이 결정하면서 그가 그랬다는 거다. 판단의 첫 기준은 ‘국가와 민주주의 발전에 도움이 되는 일인가’여야 한다. 두 번째 기준은 ‘진영에 도움이 되는 일인가’여야 한다. 마지막 기준은 ‘나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일인가’여야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참모들이 말리는 이유는 모두 개인을 기준으로 한 것이고, 당이나 진영 그리고 민주주의의 요구를 거부하기 어렵기 때문에 출마할 수 밖에 없다는 영웅설화 같은 이야기다.

3단계의 적용은 거꾸로도 가능하다. 이번 출마는 나를 위해 바람직한가. 우리 진영 전체의 총선 승리와 발전에도 도움이 되나. 궁극적으로 민주주의와 국가의 발전에도 기여할 수 있나. 위인전에 나올 법한 낯간지러운 이야기지만, 이 얘길 들은 뒤론 각종 출마 선언을 바라보며 3단계를 곱씹어 본다. 저이의 출사표는 이중 몇 단계를 통과할까.

이번 총선이야 말로 나라의 명운이 걸려있다는 이들이 많다. 이번에는 특히 각자의 공약과 진정성은 물론이거니와 내건 출사표에 담긴 언어와 욕망이 어떠한지 천천히 곱씹어 볼 생각이다. 출사표에 들어찬 언어와 욕망이 아름답지 않은데 정치만 아름다워질 도리는 없을 테니까.

김혜영 정치부 기자 shin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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