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 정부의 역사교과서 국정화 파동 3년 후인 2018년, 교육부는 중학교 역사ㆍ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를 다시 검정 체제로 바꾸고 새롭게 교과서 집필기준을 제시했다. 학계 안팎에서는 기존의 규제를 대폭 완화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김한종 한국교원대 교수는 “(2015년 역사교과서 국정화 논란 당시) 개별 사실에 대해 교육부가 방향을 제시하는 건 교과서를 통제하는 장치로 작용할 가능성이 많아 학계 전문가 상당수가 집필기준을 없애는 쪽으로 의견을 전한 바 있다. (새 교과서 집필기준은) 교과서를 다양하게 쓸 수 있다는 메시지”라고 말했다.
그럼에도 새 한국사 교과서에 아직 역사적 평가가 남은 현대사, 예컨대 촛불집회와 4대강 사업 등에 관한 기술이 일제히 들어간 이유는 뭘까.
중도성향의 역사학계 한 중견학자 A씨는 “새 교과서 집필기준에 ‘민주화와 함께 이루어진 과거사 청산의 흐름을 사례를 들어 보여 준다’고 기술돼있다. 이번 정부의 집필기준 성격을 가장 잘 드러낸 부분”이라고 지적했다. 그는 “고등학교 교과서에 이런 방식으로 과거사 청산을 기술하는 것은 사회통합에 역행하는 분열적 발상”이라며 “6·25전쟁 기술을 누락한 채 과거사 청산을 기술하라는 주문은 역사해석의 기본을 무시하는 억지”라고 덧붙였다.
교과서 필자들은 집필 규정을 충실히 따랐다는 입장이다. 해냄에듀의 교과서를 쓴 박중현 영등포여고 교사는 “촛불집회나 문재인정부를 특별히 강조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이미 교과서 새 집필기준에 ‘1987년 이후 사회전반의 민주화 관점에서 시민 사회 움직임을 서술’하라고 명시돼있다”고 말했다. ‘민주화 운동은 곧 반독재 투쟁이라는 점에서 독재 체제의 반민주성과 인권 유린의 사례를 유념하며 서술한다’, ‘시민 사회와 남북 관계의 발전과 동아시아의 평화 안착을 위한 다양한 움직임을 설명한다’ 등 새 교과서 집필규정을 따르다 보면, 문재인정부의 남북대화 노력이 자연스럽게 서술된다는 설명이다.
정부가 역사 교과서 정화 파동을 겪으며 집필 기준을 없애지 못하고 대폭 줄이는 방법을 취하면서 오히려 역효과를 냈다는 지적도 나온다. 또 다른 역사학계 중견 학자 B씨는 “교과서 개발에 최소 수억 원을 투자해야 한다. 출판사 입장에서 검정을 반드시 통과해야 하니 정부 집필규정 ‘한 줄 한 줄’ 디테일에 더 신경 쓸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편 2009년 교육과정의 고교 한국사 교과서를 펴낸 8개 출판사 중 두 군데는 새 검정체제에서 교과서를 발행하지 않는다. 지난해 고 노무현 대통령의 얼굴을 드라마 ‘추노’ 사진과 합성시킨 수험서를 제작해 물의를 빚은 출판사 교학사는 개정 역사교과서를 준비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새로 고교 한국사 교과서를 내게 된 출판사 해냄에듀는 소설 ‘태백산맥’ 등 조정래 작가의 대표작들을 펴낸 종합출판사 해냄의 자회사다. 2015년 개정 고교 국어교과서, 문학교과서 등을 낸 바 있고, 한국사교과서 필진은 한일 공동역사교과서인 ‘마주보는 한일사’(2006, 사계절 발행)를 쓴 박중현씨 등 모두 현장 교사들로 꾸렸다. 역시 2018 고교한국사 교과서 출판사로 새로 선정된 씨마스는 역사학계 중도좌파로 꼽히는 신주백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소장에 대표집필을 맡겼다.
이윤주기자 miss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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