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레거시 미디어의 종언에 관하여
※시대의 독설가, 피아 구분 없는 저격수를 자처하는 진중권 전 동양대 교수가 ‘포스트 트루스’ 시대의 여러 현상들을 미디어 이론을 통해 조명해보는 글을 씁니다. 매주 목요일 ‘한국일보’에 연재합니다.
“오랜 ‘레거시 미디어(Legacy Media)’의 유산이라 할 수 있는 저는 카메라 앞에서 물러날 때가 되었습니다.” JTBC의 손석희 사장이 ‘뉴스룸’의 앵커 직을 떠나며 남긴 말이다. 무슨 얘기일까. 알 수 없다. 뜻을 가늠하기는 어렵지만, 내 귀에 이 말은 마치 한 시대의 종언을 알리는 우울한 조사(弔辭)처럼 들렸다. 아나운서 손석희를 한국 언론의 ‘전설’로 만들어 주었던 저 위대한 저널리즘의 시대. 그 시대는 이제 영영 흘러가 버린 것일까.
◇신뢰도에서 호감도로 바뀐 저널리즘
얼마 전 KBS에서 ‘미디어 신뢰도 조사’라는 것을 했다. 결과에서 눈에 띄는 것은 JTBC의 추락과 MBC의 상승이다. 작년 하반기 JTBC는 신뢰도가 급락(20.6%→11.7%)한 반면, MBC는 신뢰도가 대폭 상승(5.1%→12.7%)했단다.
무슨 일이 벌어진 걸까. 요인은 하나, 조국 사태밖에 없다. 서초동 집회현장에서 군중들이 보도를 하는 JTBC 기자에게 몰려가 “물러가라”고 외치던 장면. 그 충격적인 장면은 이 상황을 시각적으로 상징한다.
돌아보건대 조국 국면에서 JTBC는 저널리즘 원칙에 충실하게 ‘사실’을 보도했다. 그런데 결과는 신뢰도의 급락으로 나타났다. 반면 MBC는 노골적으로 당파적 입장에 서서 피의자에 유리한 ‘대안적 사실(허구)’을 창작했다. 특히 ‘피디수첩’은 그 목적을 위해 야바위에 가까운 날조도 서슴지 않았다. 그런데도 MBC의 신뢰도는 이 시기에 급격히 상승했다. 이처럼 한국의 대중은 사실보다 허구를, 대안적 사실을 더 신뢰한다.
새로울 것도 없는 일이다. 과거에 ‘나꼼수’도 신뢰도 최고를 자랑했었으니까. 사실 팟캐스트는 그 본성상 그리 신뢰할 만한 매체가 못 된다. 고로 여기서 말하는 ‘신뢰도’란 보도의 객관성, 공정성 따위와는 그다지 관계가 없다고 봐야 한다. 즉, 그 매체의 보도가 설사 허위ㆍ왜곡ㆍ날조임이 밝혀진다 해도 그놈의 신뢰도는 절대 떨어지지 않을 거라는 얘기다. 그런 의미에서 그것은 신뢰도라기보다는 차라리 호감도에 가깝다.
뉴스의 비판적 수용자는 사라졌다. 오늘날 대중은 자신을 콘텐츠의 소비자로 이해한다. 그들이 매체에 요구하는 것은 사실의 전달이 아니라 니즈의 충족. 그 니즈란 물론 듣기 싫은 ‘사실’이 아니라 듣고 싶은 ‘허구’다. 그 수요에 맞추어 매체들은 대중에게 듣기 좋은 허구, 흥미로운 대안적 사실을 창작해 공급하게 된다. 이번 조사에서 신뢰도가 오른 매체들은 대체로 다 그랬다. MBC의 상승폭이 컸던 것은 날조의 정도가 가장 심했다는 뜻이리라.
◇세상을 ‘호오’로만 판단, 정신 퇴행
“현대의 대중은 사실을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비루한 일상에 충분히 지쳐 있다. 그들에게 제공해야 할 것은 멋진 환상이다.” 이 괴벨스의 이상이 한국에서 실현될 모양이다. 한국의 대중은 진위(眞僞)가 아니라 호오(好惡)의 기준으로 세상을 본다. 그들은 ‘지루한 사실’보다는 ‘신나는 거짓’을 선호한다. 이 변화한 취향에 맞추어 매체들 역시 ‘사실’에 부합하는 보도를 하는 대신에 대중의 ‘욕망’에 부응하는 보도를 하려 애쓰게 된다.
호오의 감정이 이성적 판단을 대체할 때 대중의 정신은 유아의 단계로 퇴행한다. 세상을 쾌, 불쾌로 판단하는 어린이처럼 우리의 ‘어른이들’ 역시 세상을 ‘호오’의 감정으로 판단한다. 우리 편 좋아, 쟤네 편 싫어. 진위와 선악을 가리는 이성적 과제는 간단히 속할 진영을 가리는 본능적 과제로 치환된다. 우리의 어른이들은 정의의 기준에 따라 진영을 판단하지 않는다. 진영부터 정하고 거기에 정의의 기준을 뜯어맞춘다.
듣고 싶은 것만 듣는 대중은 결국 확증편향에 빠져 제 믿음에 배치되는 사실은 배제하고, 제 견해에 위배되는 의견은 배척하려 한다. 바로 여기서 대안매체와 레거시매체 사이에 갈등이 발생한다. 레거시매체들은 비교적 엄격한 준칙에 따라 ‘사실’을 보도한다. 반면 인터넷 대안매체들은 심의규정을 준수할 의무가 없어 자유로이 ‘허구’를 창작한다. 문제는 레거시매체가 전하는 ‘사실’과 대안매체가 만드는 ‘대안적 사실’이 번번이 충돌한다는 데에 있다.
대안매체에게 레거시매체는 불편할 수밖에 없다. 레거시매체가 전하는 ‘사실’이 자기들이 만드는 ‘대안적 사실’의 허구성을 폭로하기 때문이다. 레거시매체가 가하는 이 ‘팩트의 폭력’에 대안매체는 또 하나의 음모론을 꾸며내 맞선다. ‘알릴레오’ 송년특집에서 유시민은 레거시매체의 ‘기레기들’이 검찰과 유착하여 그들이 흘리는 기사만 받아쓴다고 매도했다. 레거시매체의 보도 전체를 졸지에 믿을 수 없는 ‘검찰괴담’으로 격하시켜 버린 것이다.
◇대안 매체 좇는 레거시매체의 위기
더 심각한 문제는 최근 레거시매체들마저 대안매체의 행태를 뒤쫓기 시작했다는 점이다. 거기에는 권력과 시장이라는 두 개의 배경이 존재한다. 2017년 정권교체 이후 대안매체의 운영자들은 대거 레거시매체로 진출했다. 나꼼수 멤버 정봉주는 SBS의 ‘정봉주의 정치쇼’, 김어준은 SBS의 ‘블랙하우스’와 TBS의 ‘뉴스공장’, 주진우는 MBC의 ‘스트레이트’, 김용민은 SBS ‘뉴스브리핑’과 KBS의 ‘김용민 라이브’의 진행을 맡았다.
이들을 통해 이른바 ‘나꼼수 스타일’이 그대로 레거시매체로 옮겨졌다. 이들이 이렇게 레거시매체까지 장악하는 데에는 물론 정권교체라는 정치적 배경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하지만 그보다 결정적 역할을 한 것은 시장이라는 요인이리라. 실제로 한국의 미디어시장에는 이들의 방송에 대한 탄탄한 수요가 존재한다. 객관성을 잃은 편파적 진행, 왜곡에 가까운 당파적 보도의 적절성을 묻는 질문에 김용민은 그것은 "시청률로 판단해야 한다."고 대답했다.
올바름은 시청률로 증명된다. 원래의 레거시매체들마저도 시청률로 입증되는 그들의 올바름(?)을 보고 결국 그들의 방식을 그대로 따르게 된다. 예를 들어 보자. 2018년 김어준의 ‘블랙하우스’는 성추행 의혹을 받던 정봉주 전의원의 알리바이를 조작해 주었다가 들통이 난 적이 있다. 방송은 정 전 의원이 자기에게 유리하게 발췌, 선별해서 제공한 사진들을 ‘증거’라고 들이대며 사진전문가를 데려다 이런 결론을 내렸다. “절대 조작일 수 없다.”
김어준이야 그렇다 치자. 문제는 다음이다. 1년 반 후 MBC ‘피디수첩’도 같은 수준의 조작방송을 내보냈다. 수법도 비슷했다. 전문가를 내세워 존재하지 않는 원본 표창장에 실제 인주가 묻었음을 증명(?)한 것이다. ‘고로 위조일 리 없다.’ 충격적인 것은 이 날조의 주인공이 한학수 피디였다는 사실. 황우석 사태의 저널리즘 영웅이 일거에 제2의 김어준으로 전락한 것이다. 하나의 극에서 반대의 극으로. 이카루스의 추락이 이보다 극적일까.
◇당파적 보도 ‘진실’ 착각, 실재의 위기
보도가 당파적일수록 신뢰도는 오른다. 그 ‘신뢰도’란 실은 호감도에 불과하나 그 호감도가 여전히 ‘신뢰도’라 불리는 한, 호감도 높은 당파적 보도가 객관적 보도보다 외려 진실에 가깝다는 착시가 발생한다. 실제로 유시민씨는 대안매체가 대중에게 신뢰를 받는 것은 그 동안 레거시매체가 거짓말을 해온 탓이라고 주장한다. 한 마디로 레거시매체가 전달해 온 세계가 가짜이고, 대안매체가 창작하는 ‘대안적 세계’야말로 진짜라는 것이다.
원래 대안매체는 레거시매체를 흉내낸 짝퉁이었으나, 그 짝퉁이 어느 새 원본의 자리를 가로채고 외려 원본을 짝퉁이라 배척하는 셈이다. 디지털시대에 모든 것은 복제되는 횟수만큼 존재감을 갖는다. 레거시매체가 사실을 보도해도 조회수가 낮으면 그 사실은 없던 것이 된다. 대안매체가 허구를 창작해도 조회수가 높으면 현실에 사건으로 등록된다. 그런데 조회수가 높은 것은 역시 대안매체 쪽. 그래서 오늘날 대안적 사실은 사실보다 더 실재적이다.
이렇게 사실과 허구의 자리가 뒤바뀐 곳에서는 ‘버티고’ 현상이 일어난다. 구름이 기울어져 있으면 비행사는 자기가 기울어졌다고 믿고, 경사진 구름과 수평이 되게 날개를 기울이게 된다. 계속 그 상태로 비행하다 보면 결국 사고가 난다. 멀쩡했던 지식인들이 요즘 갑자기 얼빠진 소리들을 하지 않던가. 그게 다 이 버티고 현상 때문이다. 버티고에서 벗어나는 방법이 있다. ‘눈을 믿지 말고 계기를 믿으라.’ 인간에게 그 계기는 물론 ‘이성’이리라.
진중권 미학자, 전 동양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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