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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와 노동을, 말이 아니라 제 몸으로 살아낸 작가 존 버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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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부와 노동을, 말이 아니라 제 몸으로 살아낸 작가 존 버거”

입력
2020.01.22 04:40
수정
2020.01.22 11:38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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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노동에’ 시리즈 새로 번역한 김현우 EBS PD

존 버거의 대표작 대부분을 번역, 국내에 소개한 김현우 EBS PD. 그 때문에 우리 땅에서 김 PD는 ‘존 버거의 한국 양자’라 불린다. 홍인기 기자
존 버거의 대표작 대부분을 번역, 국내에 소개한 김현우 EBS PD. 그 때문에 우리 땅에서 김 PD는 ‘존 버거의 한국 양자’라 불린다. 홍인기 기자

1970년대 마흔 넘어 오십으로 가던 존 버거의 인생은 황금기였다. 오늘날까지 미학 필독서로 꼽히는 ‘다른 방식으로 보기’를 히트시킨 미술평론가이자, 소설 ‘G’로 부커상까지 거머쥔 소설가였다. 여생을 명성에 잠겨 보내도 충분할 그때, 버거는 돌연 알프스 기슭의 산악 마을 프랑스 캥시로 거처를 옮긴다.

그 뒤 15년간 직접 농민이 되어 농촌의 노동 그 자체를 생생하게 그려 낸 ‘그들의 노동에’ 시리즈를 써낸다. 괜히 폼 한번 잡은 게 아니다. 책을 쓴 뒤로도 버거는 2017년 1월 2일 91세 나이로 세상을 뜰 때까지, 40여 년간 캥시 마을 농민으로 살다 죽었다.

‘그들의 노동에 함께 하였느니라’(민음사)라는 제목으로 한 번 번역되어 나왔던 ‘그들의 노동에’ 시리즈가 최근 열화당에서 다시 번역되어 나왔다. 이전 버거의 책 대부분을 번역해온 김현우 EBS PD의 번역이다. 지난 17일 경기 고양 EBS에서 김 PD를 만나 존 버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눴다.

가장 큰 궁금증은, 인생의 황금기에서 모든 것을 다 내려놓은 버거의 선택이다. 김 PD의 설명이다. “버거는 21세기가 되면 사라질 농민의 삶을 기록으로 남겨야 한다고 생각한 거예요. 그런데 그는 어떤 대상에 대해 쓰려면 그들과 똑같은 경험을 해야 한다고 믿는 사람이었죠. 그래서 택한 겁니다. 노동 그 자체를.” 사라져 가는 계급을 기록해야 하는 게 ‘작가의 책무’라면, 기록을 위해 그들과 같은 경험을 해야 한다는 건 ‘작가의 윤리’라는 얘기다.

사진작가 장 모르가 2008년 찍은 외양간에서 건초를 부리고 있는 여든한 살의 존 버거. 잘 나가던 작가 버거는 40대 중반 농촌에 들어가 죽을 때까지 직접 일 했다. 열화당 제공.
사진작가 장 모르가 2008년 찍은 외양간에서 건초를 부리고 있는 여든한 살의 존 버거. 잘 나가던 작가 버거는 40대 중반 농촌에 들어가 죽을 때까지 직접 일 했다. 열화당 제공.

존 버거에게 이런 사고방식은 낯설지 않다. 김 PD는 말을 이었다. “버거는 에이즈 보균자가 주인공인 ‘결혼을 향하여’을 써낸 뒤 인세를 에이즈 연구재단에 기부 했어요. 부커상 상금 절반은 아프리카계 미국인의 좌파 조직인 ‘블랙팬서’당에 기부했고요. 나머지 상금은 이주노동자 연구 작업에 썼죠.”

김 PD는 대학 시절 우연히 버거 책을 접했다가 이런 매력에 빠졌다. “그때만 해도 대학에 운동권 문화가 남아 있어서 ‘학생운동과 연애는 양립할 수 없다’ ‘어느 하나는 희생해야 한다’ 같은 생각이 강했거든요. 그런데 버거의 책에는 정치 활동과 생활이 하나가 되어 있는 거예요. 주장하는 대로 살고, 사는 대로 주장하는 거죠. 그게 무척 감동이었습니다.”

2014년 프랑스에서 존 버거를 만난 김현우 PD가 직접 찍은 버거의 손. 평생 직접 노동을 한, 단단한 손이었다. 김현우 제공
2014년 프랑스에서 존 버거를 만난 김현우 PD가 직접 찍은 버거의 손. 평생 직접 노동을 한, 단단한 손이었다. 김현우 제공

실제 버거는 정치적으로는 마르크스주의자였지만 소설가로서는 성과 사랑이란 주제에 탐닉했다. 부커상 수상작 ‘G’에게조차 ‘지적 포르노’라는 꼬리표가 붙을 정도였다. ‘그들의 노동에’ 시리즈도 이런 경향 아래 있다. ‘끈질긴 땅’ ‘한때 유로파에서’ ‘라일락과 깃발’ 세 권으로 구성된 이 시리즈 또한 소 젖 짜고 염소 치는 노동과 농촌 사람과 도시 사람간 연애에 관한 아주 세밀한 이야기다. “버거는 사적인 영역을 사회 경제적 맥락에서 분석한 작가예요. 이념적이었지만, 몸의 경험을 절대 외면하지 않았죠. 가장 치열한 세계를 가장 다정한 문장으로 다뤘다고 할까요.”

김 PD는 1998년 아르바이트 삼아 번역 일을 시작했다. 지금까지 버거 작품 13권을 비롯, 40여종의 책을 번역했다. “혼자 좋아하던 작가를, 제 번역으로 다른 이들과 함께 읽을 수 있게 됐으니 전 참 운 좋은 독자”라고 말하는 김PD에게 번역은 책을 누구보다 꼼꼼히 읽는 작업이다. 버거 타계 3년 전 프랑스 자택으로 직접 찾아가 만나기도 했다. 그런 김 PD에겐 ‘버거 같은 삶’은 하나의 화두다. “노숙인 얘기를 다룬 버거 소설 ‘킹’을 번역한 뒤 번역 인세를 노숙자 시설에 기부했어요. 버거처럼 한번 해보고 싶었으니까요.”

존 버거 3부작 '그들의 노동에'
존 버거 3부작 '그들의 노동에'

이 모든 걸 떠나 1991년 완간된, 그것도 저 멀리 프랑스 산간마을에 대한 이야기가 오늘날 한국 사회에 어떤 의미일까. 김 PD는 “여전히 시골마을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대도시로 떠나야만 했던 사람들과의 연대”를 언급한 버거의 서문을 끄집어냈다. ‘그들의 노동에’ 3부작은 결국 타인에 대한 이해와 연대의 기록이다. “그 시절 농민이 지금 우리에겐 성소수자, 외국인, 장애인일 수 있죠. 내가 속하지 않은, 모르는 세계의 사람들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이 책이 좋은 기준이라 생각해요.”

한소범 기자 beo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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