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박자박 소읍탐방]경북 영양 석보면 
영양군 석보면 소재지의 두들마을. 언덕 위에 자리잡은 400년 가량 된 재령 이씨 집성촌이다. 영양=최흥수 기자

영양의 옛 지명은 고은(古隱)이다. 숨어 살기 좋은 은둔자의 땅이다. 전란과 정쟁을 피해 자신의 신념을 지키며 살고자 골짜기로 들어온 양반 집안 마을이 곳곳에 있다. 그러나 낭중지추(囊中之錐), 주머니 속 송곳은 드러나게 마련이고 재능이 뛰어난 사람은 언젠가 알려지게 마련이다. 석보면 두들마을의 장계향과 지경마을의 남자현이 대표적이다. 남성 중심의 유교적 지배 질서가 뼛속까지 깊이 뿌리내린 고을이어서 그만큼 돋보이는 인물들이다.

 ◇스스로 우뚝 선 군자, 두들마을 장계향 

두들마을은 1640년 석계 이시명(1590~1674)이 병자호란의 국치를 부끄럽게 여겨 벼슬을 버리고 들어와 형성한 재령 이씨 집성촌이다. 이시명은 퇴계 학맥을 이어 학문 연구와 후학을 양성하는 데 전념한 인물이다. 두들은 둔덕 즉, 언덕이라는 뜻이다. 그가 살았던 석계고택을 중심으로 제법 번듯한 규모의 기와집 여러 채가 언덕 위에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주변에는 동대ㆍ서대ㆍ낙기대ㆍ세심대 등 선비의 가치를 실천하며 유유자적하던 멋스러운 지명이 남아 있다.

석보면 두들마을 풍경. 처음 터를 잡은 이시명의 석계고택(맨 앞)을 중심으로 여러 채의 기와집이 마을을 형성하고 있다.

학자ㆍ재상ㆍ문인으로 이름 날린 이 마을 재령 이씨 문중에서 요즘 가장 유명한 인물은 의외로 장계향(1598~1680)이라는 여성이다. 최초의 한글 조리서인 ‘음식디미방’을 쓴 저자다. 얼마 전까지도 본명보다 ‘안동 장씨’, 또는 ‘정부인 장씨’로 불리던 인물이다. 그의 업적을 기려 최근 지은 건물은 당당히 ‘장계향 문화체험 교육원’이라는 이름을 달았다.

음식디미방(飮食知味方)의 ‘디’는 ‘알 지(知)’의 옛말이다. 뜻을 풀이하면 ‘음식의 맛을 아는 방법’쯤 된다. 예부터 전해 내려오거나 집안에서 개발한 조리법을 담고 있어 조선 중기 양반가의 식생활 문화를 짐작할 수 있는 음식 백과사전이다. 국수와 만두 등 주식을 비롯해, 국ㆍ찜ㆍ전ㆍ떡 등 반찬과 후식까지 146가지 음식을 만드는 방법을 소개하고 있다. 그 중에는 재료를 보관ㆍ저장하는 방법과 51가지의 다양한 술을 빚는 방법도 들어 있다. 교육원 로비에 음식디미방에 소개된 요리를 모형으로 전시하고 있다. 그러나 말 그대로 유리상자에 든 ‘그림의 떡’이다. 책 속의 음식을 한 가지라도 맛보고 싶어 먼 길을 찾아온 여행객으로선 참으로 아쉽다. 음식디미방의 요리를 제대로 맛보려면 장계향 문화재단(054-682-7764)에 3일 전, 10인 이상 예약해야 한다니 번거롭기는 마찬가지다.

두들마을 장계향문화체험교육원에 음식디미방에서 소개된 요리를 모형으로 전시해 놓았다. 직접 먹어 보려면 3일 전 예약해야 한다.
음식디미방에는 조리법뿐만 아니라 재료 보관법도 소개돼 있다.

음식디미방은 어법과 절차가 정확할 뿐만 아니라 풍부한 어휘를 구사하고 있어 한글 연구 자료로도 가치가 크다. 교육관에서는 장계향을 ‘여중군자(여성 중 군자)’로 소개한다. 양반가 안살림을 책임진 현모양처 이상의 큰 인물이라는 의미다. 전시실로 들어서면 초서로 휘갈긴 ‘학발시(鶴髮詩)’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13세의 아이가 썼다고 믿기지 않을 정도로 유려하고 대담한 필체다. 서두에 시를 짓게 된 내력이 나와 있다. 어린 시절 모친과 함께 이웃마을 어느 가난한 집을 찾게 되었는데, 남편을 멀리 변방으로 떠나보내고 슬퍼하는 아내와 아들을 기다리다 앓아 누운 노모의 딱한 사정을 보고 함께 울었다고 한다. 학발시는 집으로 돌아온 장계향이 그들을 가엾게 여겨 지은 한시다. 그의 시와 서체를 보고 당대 초서의 일인자로 알려진 정윤목은 “중국의 필법”이라며 탄복했고, 정조 때 영의정을 지낸 채제공은 “여인들의 작품 중에 일찍이 이와 같은 것이 없었다”며 극찬했다. 전시관에는 이외에도 그가 남긴 다수의 글과 그림 사본이 걸려 있다. (진품은 대부분 안동의 국학진흥원에 있다.) 남존여비의 유교적 질서에 적극적으로 맞서지 않았지만, 퇴계 학맥의 적통 장흥효의 딸, 당대의 큰 학자 이시명의 아내, 재상까지 오른 이현일의 어머니로서가 아니라 장계향 스스로 큰 인물이었음을 입증하는 자료들이다.

장계향이 초서로 쓴 ‘학발시’. 13세의 나이에 썼다는 게 믿기지 않는다.
장계향문화체험교육원의 전시물. 원본은 대부분 안동 국학진흥원에 전시하고 있다.

배고픈 이웃과 음식을 나누며 극빈자 구휼에도 힘썼다는 그의 인품은 음식디미방을 전하는 방식에도 나타나 있다. 그는 “이 책을 이리 눈 어두운데 간신히 썼으니 뜻을 알아 이대로 시행하고, 딸자식들은 각각 베껴가되 책을 가져갈 생각일랑 마음도 먹지 말며, 부디 상하지 않게 간수하여 쉽게 떨어지게 하지 말라”는 당부를 유훈으로 남겼다. 조리 비법을 독점하지 않고 널리 알리려는 마음이 읽힌다. 음식디미방이 오늘날까지 온전하게 전수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박원양 영양군 문화관광해설사는 “그의 학덕과 인품이 신사임당 못지않은데, 널리 알리지 못해서 안타까울 뿐”이라 했다.

두들마을에는 장계향 외에도 이름을 날린 이들이 수두룩하다. 유우당은 파리장서사건에 가담해 독립운동에 이바지한 이돈호의 집이다. 그의 조카 이병각 역시 항일 애국시인으로 활약했다. 유우당 옆 석간고택은 소설가 이문열이 어린 시절을 보낸 집이다. ‘영웅시대’ ‘그대 다시 고향에 가지 못하리’ ‘황제를 위하여’ 등 수많은 작품에 고향 두들마을과 문중의 역사가 투영돼 있다. 이문열 역시 장계향의 넷째 아들 후손이다.

마을 중심에 자리잡은 석계고택은 두들마을에서도 가장 소박한 주택이다.
두들마을 유우당 고택. 독립운동가 이돈호의 집이다.
두들마을 언덕에 새겨진 낙기대. 굶주림을 즐긴다는 뜻이다.

마을에 그의 작품을 기리는 문학관과 북카페인 ‘두들책사랑’이 있지만 찾는 이가 없는 탓인지 문이 닫혀 있다. 민속자료로 등록된 고택도 대부분 사람이 거주하지 않아 골목이 조금은 쓸쓸하다. 마을을 돌아 나오는데 언덕배기 붉은 퇴적암층에 ‘낙기대(樂飢臺)’라는 글자가 선명하다. 굶주림을 즐기는 곳이라니, 안빈낙도의 삶을 직설적으로 옮긴 이름이다. 두들마을의 중심인 이시명의 석계고택이 별다른 장식을 하지 않은 이 마을 고택 중에서도 가장 검소하고 소박한 이유를 짐작할 만하다.

 ◇‘여자 안중근’, 지경마을의 남자현 

두들마을에서 약 3km 떨어진 지경마을은 대한민국 독립운동사에서 꼭 기억해야 할 여성 남자현(1872-1934) 지사의 고향이다. 남자현은 영화 ‘암살’에서 전지현이 연기한 저격수의 모티브가 된 인물로 알려졌다. 그러나 실제 독립운동에 뛰어들 당시의 남자현은 전지현처럼 젊은 여성이 아니었다.

석보면 지경마을의 남자현 지사 생가.
생가 방 안에 그의 초상이 놓여 있다.

넉넉하지 않은 양반 집안에서 태어난 남자현은 19세에 같은 마을에 거주하는 김병주에게 출가한다. 하지만 결혼 직후 의병활동에 참가한 남편은 유복자를 남기고 전사한다. 남편을 잃은 남자현은 더 골짜기인 수비면으로 이사해 가난한 살림에 길쌈을 하고 농사를 지으며 3대독자를 키웠다. 지사가 본격적으로 독립운동에 뛰어든 것은 삼종지도의 의무를 다한 후인 47세 때였다. 3ㆍ1독립운동에 적극 가담한 죄목으로 일본 경찰의 지명수배를 받고 만주로 망명한다. 남편의 친족인 일송 김동삼과 함께 활동한 남자현은 만주 각지에 흩어져 있는 독립운동단체의 통합을 위해 기밀 통신과 연락 책임을 맡았다. 부녀자에 대한 감시가 허술하다는 점을 역이용한 선택이었다.

1920년 국치기념대회에서는 혈서로 낭독문을 작성해 독립운동의 의지를 드높였고, 1925년에는 사이토 조선총독을 암살하기 위해 서울로 잠입하기도 했다. 1932년 상해사변의 진상을 조사하러 국제연맹 조사단이 하얼빈에 왔을 때는 왼손 무명지 마디를 잘라 흰 천에 ‘조선독립원(朝鮮獨立願)’이라 혈서를 쓴 후 자른 손가락과 함께 조사단에 보냈다. 양반가 아낙으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남자현을 ‘여자 안중근’이라 부르는 이유다.

1933년에는 만주국 전권대사 무토 노부요시를 폭살하기 위해 폭탄을 숨기고 신경(현 장춘)의 일본대사관에 들어갔다가 체포되고 말았다. 5개월간의 혹독한 형벌과 15일간의 단식투쟁 후 병보석으로 출감한 그는 하얼빈 시내 조선여관에서 끝내 독립을 보지 못하고 62세의 일기로 생을 마감한다. 대한민국정부는 1962년 여성으로서는 최초로 남 지사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했다.

지경마을의 남자현 지사 동상. 잘려 나간 무명지에 가슴이 아리다. ‘조선독립원’이라고 쓴 혈서를 들고 있는 모습이다.
지경마을에 있는 의병대장 이현규 의사 기념비.

영양군은 1999년 생가를 복원해 그의 정신을 기리고 있다. 도로가에 지은 생가는 제법 규모 있는 기와집으로 겉모습은 번듯하지만, 지사의 업적을 되새길 만한 전시물이 거의 없어 다소 쓸쓸하다. 입구에 ‘독립군의 어머니 남자현’이라 쓴 안내책자가 비치돼 있고, 방 안에 한복 차림의 초상화가 놓인 게 전부다. 마당 한쪽에 그의 동상이 세워져 있다. 무명지가 잘린 왼손을 보고 있으면 가슴이 아리다. 그의 생가 인근에는 역시 이 마을 출신 의병장 이현규를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영양군에는 고속도로는 말할 것도 없고 아직까지 4차선 국도도 없다. 가장 가까운 고속도로는 청송군에 위치한 상주영덕고속도로 동청송영양IC다. 지역 배려 차원에서 덧붙인 ‘영양’이 오히려 더부살이처럼 옹색하다. 두들마을은 이곳에서 약 13km 떨어져 있다.

영양=글ㆍ사진 최흥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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