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성범죄 사진·영상 삭제 골든타임 사수하라”… 디지털 세상의 119구급대
알림
알림
  • 알림이 없습니다

“성범죄 사진·영상 삭제 골든타임 사수하라”… 디지털 세상의 119구급대

입력
2020.01.21 04:40
수정
2020.01.21 10:59
11면
0 0

[현장을 가다, 이슈를 읽다] <6> 방심위 디지털성범죄심의지원단

지난달 20일 오후 서울 양천구 방송통신심의위원회 디지털성범죄의심지원단 피해접수팀 직원들이 디지털 성범죄 피해 민원을 모니터링하고 있다. 박형기 인턴기자
지난달 20일 오후 서울 양천구 방송통신심의위원회 디지털성범죄의심지원단 피해접수팀 직원들이 디지털 성범죄 피해 민원을 모니터링하고 있다. 박형기 인턴기자

“누군가가 저희 아이 사진을 퍼뜨리고 있습니다. 제발 빨리 없애주세요.”

지난달 20일 오후 서울 양천구 방송통신심의위원회 디지털성범죄심의지원단(이하 디성단) 사무실. 디성단의 피해접수시스템 창을 열자마자 절박한 외침이 보였다. 미성년자인 딸의 얼굴 사진을 음란물과 합성해 유포하는 성폭력 피해를 막아달라는 호소다. 합성 사진이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공유되면 피해자의 명예가 훼손되고 성희롱에 시달리기 때문에 일명 ‘지인 능욕’이라 불리는 범죄다. 이용배 디성단 피해접수팀장은 “디지털 성범죄 피해는 나이를 가리지 않고 발생한다”며 “미성년 자녀를 대신한 부모님의 신고는 자주 있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살려주세요’, ‘숨을 쉴 수가 없어요.’ 디성단 피해접수시스템에 실시간으로 접수되는 피해 신고는 긴급구조신호(SOS)나 다름없다. 디지털 성범죄는 피해자의 사회적 인격을 말살하는 범죄이기 때문이다. 최근 세상을 떠난 몇몇 여성 연예인들처럼, 디지털성범죄가 실제 피해자의 목숨을 앗아가는 일도 빈번하다. 누군가 무심코 누른 ‘공유’ 버튼 하나로 피해도 겉잡을 수 없이 커진다. 피해영상 유출 6개월만에 성인사이트나 웹하드, SNS, 포털 등에 2,712건이 유포된 사례도 있다.

디성단은 이 같은 디지털성범죄에 대응하는 119 구급대와 같은 존재다. 디지털성범죄 대응 ‘골든타임’인 24시간안에 피해내용을 심의하고 유통 차단ㆍ삭제조치를 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하루 동안 들어오는 도움 요청만도 약 120여건. 지난 한해 디성단이 심의해 시정요구를 한 디지털성범죄정보는 2만5,900건에 달한다. 그러나 지난해 심의로 피해영상 원본이 삭제된 경우는 4건에 불과하다. 디지털성범죄정보의 대다수가 해외 서버에서 시작되는 탓에, 국내 사이트로 복제ㆍ공유된 정보의 노출을 ‘차단(2만5,896건)’하는 것이 최선일 때가 많기 때문이다. 인력과 기술을 투입해도 넘기 힘든 국제공조의 벽은 디성단의 성패를 가를 과제다.

지난달 20일 오후 서울 양천구 방심위 디성단 사무실에서 피해접수팀 직원이 디지털성범죄 심의 진행상황을 확인하고 있다. 박형기 인턴기자
지난달 20일 오후 서울 양천구 방심위 디성단 사무실에서 피해접수팀 직원이 디지털성범죄 심의 진행상황을 확인하고 있다. 박형기 인턴기자

◇디지털성범죄 확산 막는 골든타임 ‘24시간’

디성단이 24시간 대응 시스템을 갖춘 것은 지난해 9월이다. 2018년 4월부터 운영되던 디지털성범죄대응팀이 확대 개편되면서 대응 속도는 훨씬 빨라졌다. 그 동안은 신고 접수에서 차단ㆍ삭제 등 시정조치까지 3.2일이 걸렸다. 전담팀이 생기기 전에는 약 10.9일을 소요했다. 피해자가 자신의 디지털성범죄 피해사실을 알고 신고했다면, 이미 피해영상은 도처에 퍼졌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신고 후 시정조치까지 수일이 걸렸으니 말 그대로 ‘늑장대응’ 일 수밖에 없었다.

“이미 (디지털성범죄정보가) 다 퍼진 뒤 조치를 취하는 게 무슨 의미냐라는 문제의식이 있었습니다.” 김영선 확산방지팀장은 말했다. 이에 방심위는 조직을 약 3배로 확대하고 ‘119 종합상황실’ 처럼 밤낮없이 움직이는 조직을 꾸렸다. 30여명의 직원들이 3교대로 근무하며 실시간으로 신고민원을 접수하고, 추가 피해를 모니터링하며, 인터넷사업자에 협조를 구한다.

디지털성범죄 시정 심의가 온라인으로 열리게 된 건 더욱 중요한 변화다. 방심위의 모든 조치는 ‘최소규제의 원칙’에 따라 심의위원들의 의결을 거쳐 결정된다. 표현의 자유 침해를 막기 위한 것이지만, 한시가 급한 디지털성범죄정보 대응에는 걸림돌이었다. 심의위원들을 한데 모아 회의를 여는 데만 족히 사흘은 걸렸기 때문이다. 이에 방심위가 고안한 건 ‘전자심의시스템’이다. 인터넷이나 모바일을 통해 심의위원들이 언제 어디서든 접속하면 안건을 검토하고 의결한다. 디성단의 안건만 전담하는 ‘디지털성범죄심의소위원회’를 신설한 것도 병목현상을 크게 줄였다.

◇1개 삭제 60만원…. 피해자 ‘돈벌이’로 보는 풍토

조직이 개편되면서 심의건수도 2018년(1만7,486건)에 비해 약 48%, 2015년(3,768건)에 비해 약 7배 늘었다. 하지만 이를 성과로만 보긴 어렵다. 사회가 ‘몰카’를 ‘불법촬영’으로 부르기 시작하고, 디지털성범죄 피해자에 ‘왜 치마를 입었냐’고 다그치는 그릇된 인식이 개선되면서 피해신고 자체가 늘었기 때문이다.

피해자를 ‘돈벌이 수단’이 아닌 피해자 그 자체로만 보는 정식 구제기구가 생긴 것도 신고가 늘어난 이유다. 디성단이나 여성가족부의 디지털성범죄피해지원단이 조직을 갖추기 전까지 피해자들은 ‘디지털 장의사’ 업체의 문을 두드렸다. 잘못한 건 촬영ㆍ유포자인데, 피해자가 자신의 영상을 지우기 위해 1건당 50~60만원의 돈을 내며 매달려야 한 것이다. 더 큰 문제는 디지털 장의사 업체들이 영상 유포의 핵심 역할을 하는 웹하드와 결탁해 피해자의 돈을 유도하는 ‘삭제-유포’를 반복해온 것이다. 2018년 유튜버 양예원씨의 스튜디오 불법촬영영상 피해를 통해 드러난 ‘웹하드 카르텔’이다.

이처럼 피해자의 인권을 사고파는 디지털 성범죄는 더욱 복잡다단해지고 있다. 헤어짐에 대한 복수를 한다며 불법촬영영상물을 유포하는 일명 ‘리벤지 포르노’ 범죄부터, 인공지능기술을 이용해 얼굴을 교묘히 합성하는 ‘딥페이크’ 등이다. 특히 청소년이 피해자를 넘어 가해자가 되는 범죄 양상도 등장하고 있다. 김영선 팀장은 “아동청소년과 관련해서는 랜덤채팅앱 등을 통한 성착취 영상ㆍ이미지가 주된 문제였지만 최근에는 청소년이 다른 청소년의 영상을 촬영해 돈을 받고 판매하는 일명 ‘일탈계’등도 증가하고 있다”고 말했다.

피해자가 금전적ㆍ시간적 상실 등 2차피해를 감수하며 영상 유포를 홀로 막아야 하는 현실은 개선되고 있지만, 디성단에 도움을 요청하는 피해자들은 여전히 위축돼있다고 한다. 고현철 긴급대응팀장은 “피해사실을 부끄러워하는 피해자들이 많기 때문에 아예 신고를 하지 않고 넘어가는 경우도 많다”고 말했다. 지난 10일 국회에서 불법촬영물 삭제지원 요청을 본인이 아닌 가족이 할 수 있도록 한 ‘성폭력방지 및 피해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 개정안이 통과된 것도 그 때문이다. 한번 피해사실이 알려지면 오히려 피해자의 일상이 망가지는 탓에 성형이나 개명을 택하는 경우도 있다. 고현철 팀장은 “같은 영상에 대해 피해 신고를 했는데 다른 이름을 가진 경우도 흔히 있는 일”이라고 설명했다.

◇음란물 소비 처벌 강화돼야

디성단은 현재 신고된 디지털성범죄영상의 DNA를 추출해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하고 모니터링하고 있다. 영상에서 연속되는 오디오ㆍ그래픽을 분석해 프레임당 고유의 수치를 추출한 것으로, 말 그대로 사람의 유전자(DNA)처럼 영상 고유의 특징을 담은 것이다. 기존에는 디지털 자료의 겉으로 드러난 숫자 값인 ‘해시값 필터링’을 통해 유포된 영상을 찾았는데, 이는 파일 크기나 확장자만 바꿔도 변형되기 때문에 추적이 어려웠다. 이용배 팀장은 “그동안은 원본 영상을 변형하고 복사만 해도 동일한 영상인지 찾기 어려웠는데, 이제는 30분짜리 영상을 아주 짧은 영상으로 줄여도 DNA를 통해 찾아낼 수 있다”고 말했다.

모니터링 기술이 발전했다지만 정책적 장벽은 디성단을 가로막고 있다. 인터넷 정보 삭제 권한은 포털 등 인터넷 사업자가 갖고 있어 이를 강제할 권한이 없기 때문이다. 특히 불법촬영영상 유포의 온상인 해외 SNS에는 삭제 조치가 사실상 불가능하다. 문제는 디지털성범죄정보 원본의 99%가 해외서버에 있다는 점이다. 2만5,000여건의 심의건 중 단 4건만이 완전 삭제된 이유다. 그러니 피해는 고스란히 반복될 수밖에 없다. 고현철 팀장은 “수년 전 유명했던 연예인의 불법촬영영상이나 5년 전 화제였던 일명 ‘워터파크 몰카’ 영상 등도 최근 심의 안건으로 올라왔다”고 말했다.

디성단은 해외 사이트와의 협조를 강화해 차단ㆍ삭제 건수를 늘리는데 노력하고 있다. 김영선 팀장은 “디지털성범죄가 우리나라만큼 사회적 논란이 되는 나라가 흔치 않기 때문에 디성단처럼 정부에서 차단ㆍ삭제에 관여하는 시스템도 없어 해외 사업자들은 이 같은 공조에 익숙하지 않다”며 “그러나 구글, 페이스북 등 유명 사업자는 물론 다른 나라 정부와 공조하면서 협조 네트워크를 구축하고 있다”고 말했다. 2018년 5월 디성단이 불법촬영물 유포의 온상으로 꼽혔던 텀블러와 협의를 한 뒤 그해 12월 텀블러가 자체 음란물 차단 정책을 발표한 것도 한 성과다.

하지만 여전히 불법촬영물 영상이 ‘XX녀’, ‘**년생XX’ 등 자극적인 제목으로 소비되는 문화에서는 차단과 삭제는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없다. 고현철 팀장은 “최근 디지털성범죄 피해는 계속 발생하고 있지만 불법영상을 소비하고 공유한 사람들은 처벌이 되지 않고 있다”며 “디지털 성범죄의 고리를 유지하는 소비에 대한 처벌이 강화되지 않으면 디성단의 역할은 응급구조에 그칠 것”이라고 말했다.

신혜정 기자 arete@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