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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선] 재계 1세대의 일본 인연

입력
2020.01.20 18:00
수정
2020.01.20 18:33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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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오후 8시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서 열린 롯데그룹 창업주 고 신격호 명예회장 장례식 초례(장례를 시작하고 고인을 모시는 의식)에 모처럼 30여명의 가족들이 다 모였다. 맨 앞줄 오른쪽부터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고인의 부인 시게마쓰 하츠코 여사, 신동주 전 롯데홀딩스 부회장. 롯데그룹 제공
19일 오후 8시 서울아산병원 장례식장에서 열린 롯데그룹 창업주 고 신격호 명예회장 장례식 초례(장례를 시작하고 고인을 모시는 의식)에 모처럼 30여명의 가족들이 다 모였다. 맨 앞줄 오른쪽부터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고인의 부인 시게마쓰 하츠코 여사, 신동주 전 롯데홀딩스 부회장. 롯데그룹 제공

LG그룹 창업주 구인회(1907~1969) 회장은 경기 양주, 파주 일대에서 대대로 벼슬을 하다 진주로 거처를 옮긴 집안 출신이다. 유교의 영향을 받고 자란 그의 사업 본능을 자극한 것은 살던 마을(현 경남 진주시 지수면) 어귀에서 일본인이 운영하던 잡화점이었다. 가진 것 없이 이 동네에 왔던 무라카미라는 주인은 눈깔사탕이나 연필, 성냥 등 잡화를 팔다 학교가 들어서자 문구점으로 업종을 전환했다. 남포등을 밝히는 집이 늘자 석유까지 팔며 사업을 키워 재산을 늘려갔다.

□ 발 빠르게 소비자 욕구에 맞춰 한복에 갓까지 쓰고 장사하는 그의 접객 방식을 눈여겨본 스무 살 청년 구 회장은 협동조합을 만들어 더 싼 가격으로 좋은 잡화를 공급해 성공했다. LG그룹의 출발점으로 보는 구인회포목상점의 뿌리다. 같은 진주 지역 지주 집안의 삼성그룹 이병철(1910~1987) 회장은 중동중 재학 중 일본 유학을 결심했으나 부모 반대에 부닥치자 옆 동네 형인 조홍제(효성그룹 창업주)에게 500원을 빌려 함께 유학길에 오른 이야기가 유명하다. 귀국 후 친구들과 벌인 첫 사업도 일본으로 팔려가는 쌀을 도정하는 정미소 운영이었다.

□ SK그룹의 전신인 선경그룹 최종건(1926~1973) 회장이 운영한 첫 회사는 선경직물이다. 일제 말기 경성공립직업학교를 졸업한 뒤 이 일본회사에 기술자로 취직해 관리직까지 오른 그는 한국전쟁 뒤 적산(敵産ᆞ국내에 있던 일제, 일본인 재산) 불하 때 선경직물을 인수해 그룹으로 키웠다. 정주영(1915~2001) 현대 회장은 사업 초창기 일본과는 악연이 더 많았다. 호의로 물려받은 쌀가게를 전시체제령으로 닫아야 했고, 자동차수리공장은 태평양전쟁 발발 후 기업정비령으로 뺏겼다.

□ 국내 재벌 가운데 롯데만큼 한일 기업의 끈끈한 관계를 상징하는 기업도 드물 것이다. 19일 세상을 떠난 신격호(1921~2020) 명예회장은 일찌감치 일본에서 성공하기 위해 유학을 떠났고 고학으로 학업을 마친 뒤 일본에서 사업을 시작해 재벌 반열에 올랐다. 일본에서 성공을 바탕으로 1960년대 후반 한국으로 사업을 확대한 것은 글로벌 기업 활동의 원형으로 볼 수도 있다. 한일 경제는 그때와는 기술력도 경제 규모도 달라졌다. 정치의 영향으로 갈등도 겪고 있다. 일본과 인연이 각별했던 재계 1세대가 모두 떠난 지금, 후대 경영인들이 어떤 청사진을 그려갈지 궁금하다.

김범수 논설위원 bs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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