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독] 서울판 ‘얼굴 없는 기부 천사’ 대리인 포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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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독] [단독] 서울판 ‘얼굴 없는 기부 천사’ 대리인 포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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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1.16 1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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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은 기부자 키워드 ‘경북 봉화ㆍ남성ㆍ선친 유언ㆍ묻지마’

월곡2동 주민센터에 10년간 1억8000만원 어치 쌀 기부

서울 성북구 월곡2동 인근에 사는 주민들이 16일 트럭에 실린 20kg 쌀 300포대를 옮기고 있다. 익명의 기부인은 올해로 10년 째 월곡2동 주민센터에 쌀을 기부했다. 매해 설 연휴 1~2주 전 주민센터로 쌀이 오면 동네는 축제가 된다. 쌀 운반 도우미로 나선 한 주민은 “두 포대 줘”라고 웃으며 쌀을 운반했다. 양승준 기자

16일 오전 6시 서울 성북구 월곡2동 주민센터. 어둠이 짙게 깔린 새벽녘에 2.5톤 흰색 트럭 한 대가 들어섰다. 불쑥 튀어나온 짐칸은 천막용 비닐로 꽁꽁 덮여 있었다. 차 앞좌석에서 여성과 남성 두 명이 내려 긴장한 기색에 상기된 얼굴로 주민센터에 들어갔다. ‘묻지마 테러?’ 의심도 잠시, 두 사람이 들어서자 주민센터 직원의 표정이 환해졌다. 곽정숙 월곡2동장은 “10년째 쌀을 보내 주신 분들”이라며 웃었다. 직원들은 지난주에 “16일 아침에 쌀을 보내니 잘 부탁한다”는 전화를 받고 이날 새벽부터 ‘쌀차’를 기다리고 있던 참이었다.

두 사람이 타고 온 트럭엔 20kg 쌀 300포대가 실려 있었다. 설을 앞두고 몸과 마음이 허기질 취약계층을 위해 준비한 선물이었다. 온정의 손길은 2011년 “쌀을 준비했으니 어려운 이웃들에게 전해 달라”는 전화 한 통으로 시작돼 이후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이어졌다. 두 사람이 10년 동안 주민센터에 보낸 쌀은 총 3,000포대로 시가 1억 8000만원에 달한다.

반전은 따로 있다. 두 사람은 ‘기부 대리인’이었다. 곽 동장과 성북구에 따르면 익명의 시민이 두 사람을 통해 꼬박 10년간 쌀을 기부했다. 두 기부 대리인은 경북 봉화군에서 정미소를 운영하는 이모씨와 그의 아들이었다. 한국일보와 만난 두 모자는 익명의 기부인에 대해 “남성”이란 정보를 제외하곤 철저히 함구했다. 기부자의 이름과 나이, 사는 곳 등을 묻자 이씨는 “잘 모릅니다”라는 말만 반복하며 경계했다. 기부자 감추기 ‘007작전’이 따로 없었다.

월곡2동의 ‘얼굴 없는 천사’는 이렇게 10년째 베일에 싸여 있다. 주민센터를 비롯해 성북구도 진짜 기부자의 이름은커녕 사는 곳도 몰랐다. ‘누군지 밝히라고 하면 기부를 포기할 수 있다’는 말을 전해 듣고 신상을 확인하는 일도 포기했다. 20년째 몰래 수천만 원씩을 기부해 세밑을 따뜻하게 데운 전북 전주 ‘얼굴 없는 천사’가 서울에서도 있었던 것이다.

트럭에 실린 쌀 포대엔 두 모자가 운영하는 봉화군의 정미소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서울의 자치구에 보낼 쌀을 왜 봉화군에서 보냈으며, 기부 장소는 왜 월곡2동을 택했는지 미스터리투성이다. 기부자의 부모님이 이 동네 인근에서 살다 제조업으로 성공해 뒤늦게 보답하며 산다는 풍문만 떠돈다. 이씨는 “기부자가 부모님 유언을 받들어 기부하는 것으로 안다”고 단서의 한 조각만 들려줬다. 두 모자가 기부자가 아니냐는 물음이 끝나기도 전에 “난 서울에 산 적이 없다”는 답이 돌아왔다.

이날 주민센터엔 20~30여 명의 주민이 찾아와 일손을 거들었다. 머리 혹은 어깨에 쌀 포대를 올려 매고 트럭에서 쌀을 옮겼다. 기부가 10년째 이어지다 보니 주민센터에 연락해 때맞춰 찾아온 도움의 손길이었다. 지난 4년간 익명의 기부자가 보낸 쌀을 받았다는 홀몸 노인 이 모(93)씨는 “난 남 도운 게 없는데 눈물 날 정도로 감사하다”며 “지하에 살아도 (이렇게 기부를 받다 보니) 내 인생은 낙원”이라고 고마워했다.

새벽 추위를 녹이는 또다른 소식이 덤으로 들려왔다. 기부는 기부를 낳고 있었다. 구립 상월곡실버센터 이용자 100명이 “독거노인 대부분이 그 쌀을 받는다”며 1인당 1만원씩 모아 100만원을 주민센터에 기부했다.

양승준 기자 comeo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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