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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과 문화] 시인과 문예지

입력
2020.01.16 04:40
3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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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절마다 쉬지 않고 나오는 군소 출판사들의 두툼한 문예지들의 운영비가 어디서 충당되는지는 정확히 모른다. 아마도 누군가의 희생으로, 누군가의 발품으로, 누군가의 넉넉함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럼에도 많은 시인들은 문예지의 청탁 전화를 기다린다. 유난한 욕망이 있어서는 아니다. 시를 쓰는 순간의 찬탄 그리고 절망을 이전 세대가 해왔던 가장 안정적인 방식으로 해내고 싶을 뿐이다. ©게티이미지뱅크
계절마다 쉬지 않고 나오는 군소 출판사들의 두툼한 문예지들의 운영비가 어디서 충당되는지는 정확히 모른다. 아마도 누군가의 희생으로, 누군가의 발품으로, 누군가의 넉넉함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럼에도 많은 시인들은 문예지의 청탁 전화를 기다린다. 유난한 욕망이 있어서는 아니다. 시를 쓰는 순간의 찬탄 그리고 절망을 이전 세대가 해왔던 가장 안정적인 방식으로 해내고 싶을 뿐이다. ©게티이미지뱅크

혼자서 쓰는 시도 좋지만 어떤 경로든 등단이란 걸 하게 되면 그때부터는 보다 많은 이들에게 시를 보여 주어야 한다. SNS에 시를 올리거나 단번에 시집을 내는 경우도 있겠으나 아직까지는 이른바 ‘문예지’라는 매체에 시를 발표하는 게 주요한 통로가 된다. 아무래도 신인일수록 발표 지면이 귀하다. 오랜 무명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데뷔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에는 모르는 번호가 찍힌 전화는 일단 무조건 공손하게 받은 기억이 있다. 그게 문학 매체의 청탁 전화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전화를 건 사람이 고객님, 하며 말을 시작하면 실망했지만, 시인님이나 선생님으로 말을 시작하면 설렜다. 아, 시를 발표할 수 있겠구나. 물론 전자의 경험이 압도적으로 많긴 했지만.

우리나라에 시인이 많은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거기에 필연적으로 문예지 즉, 시를 다루는 잡지의 숫자도 많다. 아닌 게 아니라, 많은 게 참으로 많다. 문학상도 많고 문학 관련 사업도 많고 시를 가르치는 아카데미도 많고 시집도 많고 따라서 시집 출판사도 많다. 과연 우리나라는 김밥 천국이 아닌 시의 천국이 아니겠는가. 이토록 많은 사람이 시를 쓰고 읽는다니 우리 문화와 언어의 높은 까마득한 수준을 감히 가늠하기 어렵다. ……물론 모두 알다시피 그렇지는 않다. 시의 언어는 현실의 언어의 영향력을 미치지 못한 지 오래되었다. 시적인 사회라면 일어날 수 없는 사건과 사고가 우리 주변에는 빈번하다.

이러한 시-인플레이션의 실감은 시인들만이 느끼는 듯하다. 한 해 수많은 시집이 출간되고 시가 발표되지만 일부를 제외하고 그것을 읽는 사람은 얼마 없다. 시장에서의 수요는 극히 일부에게 집중된다. 많은 돈을 벌기 바라고 시를 쓰는 이는 없겠지만 시로는 최소한의 수입도 창출하지 못하는 시인이 부지기수다. 자본과는 최대한의 거리를 둔 시의 특성이 시의 미적 가치를 함양하는 부분이기는 하지만, 가난이 남루한 것은 어쩔 수 없다. 문예지라고 사정이 다르지 않다. 계절마다 쉬지 않고 나오는 군소 출판사들의 두툼한 문예지들의 운영비가 어디서 충당되는지는 정확히 모른다. 아마도 누군가의 희생으로, 누군가의 발품으로, 누군가의 넉넉함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중 어떤 문예지는 발표하는 시인에게 원고료를 정기구독으로 대체해 주길 넌지시 권한다. 일부 문예지는 고료를 명시하지 않고 글을 청탁한다. 찜찜한 마음으로 글을 써서 보내주면 한참 후에 역시나 찜찜할 만큼 적은 액수의 고료가 입금된다. 심한 경우에는 고료 자체가 없을 수도 있다. 사정이 어려워서 그렇겠으나, 그 시를 쓴 시인이라고 사정이 나을 게 없다. 무엇보다 흔히 ‘옥고(玉稿)’라 부르듯, 힘들게 쓴 소중한 저작물의 가치가 싸도 너무 싸게 매겨져 있는 게 문제다. 이는 문예지의 전통이나, 그것은 운영하는 이들의 진심이나, 같이 발표할 시인의 이름값 같은 것으로는 상쇄할 수 없는 본질적 모순이다.

그럼에도 많은 시인들은 문예지의 청탁 전화를 기다린다. 읽는 사람이 적더라도, 하다못해 동업자끼리라도 종이에 인쇄된 시를 나누어 읽는 게 좋다. 그렇게 시를 모아 시집을 내면 더 좋다. 유난한 욕망이 있어서는 아니다. 시를 쓰는 순간의 찬탄 그리고 절망을 이전 세대가 해왔던 가장 안정적인 방식으로 해내고 싶을 뿐이다. 다른 방식도 있을 것이다. 세상은 변하니까. 시도, 문단도 변화해야 마땅하니까. 천천히 변화해도 된다. 문예지는 조금 더 솔직해지면 좋겠다. 사정이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고료를 명시하고 시인의 양해를 구하는 것이 우선이다. 누군가는 거절할 테지만, 시인에게 거절할 자유라도 주어야 마땅하지 않겠는가.

서효인 시인ㆍ문학편집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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