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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벨트를 가다] 르웬조리의 밤은 아름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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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피벨트를 가다] 르웬조리의 밤은 아름다웠다

입력
2020.01.15 09: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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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회> 아프리카의 진주, 진주처럼 빛나던 별들

끝없이 이어지는 사바나를 지나자 멀리 푸른빛의 르웬조리 산맥이 모습을 드러냈다. 잠시 차에서 내려 멋진 풍경을 감상할 즈음, 에볼라 바이러스를 주의하라는 적색 여행경보 문자가 들어왔다. 최상기씨 제공
끝없이 이어지는 사바나를 지나자 멀리 푸른빛의 르웬조리 산맥이 모습을 드러냈다. 잠시 차에서 내려 멋진 풍경을 감상할 즈음, 에볼라 바이러스를 주의하라는 적색 여행경보 문자가 들어왔다. 최상기씨 제공

우간다에서의 마지막 커피 산지 방문 일정은 르웬조리(Rwenzori) 산맥 주변이었다. 우간다 남서쪽 콩고민주공화국과 국경을 이루는 지역이다. 이곳을 가기 위해서는 흙먼지 풀풀 날리는 사바나 지역을 지나 사자, 표범, 코끼리, 고릴라, 버팔로 등의 다양한 야생 생태계를 만날 수 있는 퀸 엘리자베스 국립공원을 관통해야 한다.

쾌적한 기온의 커피 산지와 달리 고도가 낮은 사바나는 덥고 건조했다. 한 시간 남짓 덜컹거리는 길을 달릴 즈음, 적도선을 알리는 작은 팻말이 눈에 띄었다. 우간다를 아프리카의 중심이라 부르는 이유가 새삼스럽다. 우간다 청년들 중 한 명이 적도에서는 콜롬버스의 달걀 이야기가 통하지 않는다고 했다. 적도선이 지나가는 곳은 남쪽과 북쪽으로 끌어당기는 힘이 같기 때문에 달걀 끝을 깨지 않고도 쉽게 세울 수 있다는 것이다. 날달걀이 없어서 직접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우간다 친구들이 보여준 동영상을 보니 거짓말처럼 달걀이 똑바로 세워진다.

한창 포장공사가 진행 중인 도로 주변에서 야생동물은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머리 위에서 빙빙 맴도는 독수리 무리만 보일 뿐이다. 혹시 풀숲에 드러누운 사자를 볼 수 있을까 눈을 부릅뜨고 차창 밖을 살폈지만, 끝없는 지평선 위에는 흔한 임파라나 들소 떼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그렇게 지루한 풍경의 사바나를 지나 콩고민주공화국과의 국경이 가까워질 무렵, 눈 앞에 거대한 장벽이 가로막는다. 해발 5,100m의 르웬조리산. 고대부터 ‘달의 산’으로 불리며 신성시돼 왔고, 주변에 에드워드 호수, 앨버트 호수 등을 끼고 있어 나일강의 중요한 수원이 되는 산. 그 거대한 산맥의 동쪽 언덕배기에서 우간다 아라비카 커피가 생산된다.

차에서 내려 멀리 푸르스름한 르웬조리산 능선을 바라보던 중에 외교부로부터 뜻밖의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우간다 서쪽 콩고민주공화국과의 국경 50㎞ 이내 지역은 에볼라 바이러스로 인한 특별여행 주의 지역이기 때문에 방문 예정 국민은 여행을 취소하거나 연기해달라는 내용이다. 여행 경보 4단계 중 3단계 적색경보다.

발병하면 치사율이 90%에 이른다는 에볼라 출혈열. 주로 대서양에 인접한 서아프리카에서 유행 중이어서 달리 걱정을 하지 않았는데, 이웃나라인 콩고민주공화국에서 넘어온 바이러스로 우간다에서도 희생자가 발생했다는 얘기를 들으니, 순간 섬찟한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고 예닐곱 시간을 달려 여기까지 왔는데, 우간다 친구들에게 다시 돌아가자는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들에게 먼 아시아 국가의 정부에서 보낸 문자 내용을 조심스럽게 전하자 대수롭지 않은 듯 피식 웃는다.

빅토리아를 비롯해 호수가 많은 우간다에서는 전염병을 옮기는 모기가 많다. 이 모기가 숙주인 말라리아는 우간다 전체 사망원인 중 27%로 1위를 차지하고 있고, 매년 5만명 넘는 어린 아이들이 이 병으로 죽는다. 그 외에도 황열병, 장티푸스, 콜레라, 빌하지아, 마버그열 등 전염병이 일상인 나라에서 신종 바이러스인 에볼라로 수십명이 사망한 것은 크게 놀랄 일도 아니다. 1980년대에는 전 국민의 60%가 에이즈 환자였고, 지금도 말라리아에 이어 두 번째로 많은 사람들이 에이즈로 사망한다고 하니, 이들이 에볼라에 왜 이렇게 덤덤한 지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문득 함께 있는 우간다 청년들이 전쟁의 산을 넘고, 기아의 늪을 건너 무서운 전염병까지 위협하는 생사의 갈림길에서 살아 돌아온 용감한 전사들처럼 보였다.

마을 부녀자들이 커피 창고에 모여 수확한 생두에서 결함이 있는 원두와 이물질을 골라내는 선별작업을 하고 있다. 품질관리를 위해 비교적 엄격한 작업 규칙을 운영하고 있었다. 최상기씨 제공
마을 부녀자들이 커피 창고에 모여 수확한 생두에서 결함이 있는 원두와 이물질을 골라내는 선별작업을 하고 있다. 품질관리를 위해 비교적 엄격한 작업 규칙을 운영하고 있었다. 최상기씨 제공

르웬조리 산악 지대의 커피 산업은 우간다 동쪽 부기수(Bugisu)보다 더욱 영세해 보였다. 우리가 방문한 부콘조(Bukonzo) 영농조합은 불과 1년 전에 가공시설과 창고 등이 만들어졌다. 조합은 3,000명의 농부들로 구성돼 있는데, 이들이 1년에 생산하는 커피는 약 60톤에 불과하다. 전체 생산량을 농민 수로 나눠 보니, 농가당 20㎏라는 매우 적은 생산량이 나온다. 숫자가 의심스러워 되물었다. 커피가 주 생산 작물이 아니고, 집 앞 텃밭에 심는 수준이어서 그렇다는 답변이다.

조합 창고에는 마을 부녀자들이 모여 커피 분류작업을 하고 있었다. 흥미로운 점은 창고 벽면에 붙어있는 한 장의 종이였다. ‘커피 분류 작업 규칙’이란 제목으로 영어와 토속 언어인 루간다어로 나란히 쓰여 있었다. 분류(Sorting)는 커피 생두에서 결함이 있는 원두나 이물질을 제거하는 작업을 말한다.

작업자들은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아침 8시반부터 오후 5시까지 일한다. 이들은 일하기 전에 향수를 사용할 수 없으며, 플라스틱 재질의 자기 비품들은 제공된 바구니에 따로 담아야 한다. 품질 관리자의 지침에 따라 썩거나 깨진 생두, 돌과 나무조각 등의 이물질을 골라내야 하고, 작업장에는 가방을 들고 갈 수 없다.

담배를 피울 수 없고, 약을 먹을 수도 없다. 17세 이하는 작업에 참여할 수 없으며, 어린 아이를 데려와서도 안 된다. 작업규칙에는 ‘금지(Not Allowed)’라는 단어가 유난히 많이 들어 있다. 규모는 작지만, 좋은 커피를 생산하기 위한 품질 관리 노력을 확인할 수 있었다.

우간다의 아라비카 생산 비율은 전체 커피 생산량의 20% 정도에 불과하지만, 그 비율은 계속 늘고 있다. 인근 국가인 케냐 또는 에티오피아를 통해 아라비카 커피가 도입됐을 것 같지만, 우간다 아라비카는 20세기초 말라위를 통해 들어왔다. 우가(Wugars)로 불리우는 워시드 커피와 드루가(Drugars)로 불리우는 내추럴 방식 모두 생산한다.

우간다는 고품질의 아라비카를 생각할 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나라는 아니다. 에티오피아에 이어 아프리카 제 2의 커피 생산국가임에도 불구하고, 생산량 대부분이 로부스타라는 이유로, 또 이웃나라인 에티오피아나 탄자니아에 비해 아라비카 생산량이 많지 않다는 이유로 우간다의 아라비카 커피는 바이어들의 큰 관심을 받지 못해왔다.

하지만 우간다의 아라비카 커피가 저평가 받는 것은 커피 그 자체의 문제보다 농법이나, 관행, 그리고 인프라 때문이다. 예컨대 우간다 동쪽과 서쪽 고산지대는 좋은 커피를 재배할 수 있는 적당한 기후와 지형 조건, 양분이 풍부한 붉은 화산토 토양이 존재한다. 정부기관이나 지역단위 영농조합을 통해 좋은 품질의 아라비카 커피를 개발하기 위한 노력과 자원이 계속 투입되고 있으며, 농민들의 품질에 대한 생각도 바뀌고 있다.

품질에 따라 커피를 분별하고, 국제 인증이나 적절한 마케팅 능력을 갖춘 영농조합이 해외 바이어들을 직접 설득하면서 국제 커피시장에서 우간다 아라비카의 관심도가 점차 높아지고 있다. 특히 우간다의 좋은 스페셜티 커피들은 새로운 평가를 받는 데 선봉장 역할을 하고 있다.

이제 그들의 노력에 화답해야 하는 것은 소비 하는 나라들이 해야 할 일이다. 소비자의 선택을 바꾸는 것이 생산자의 몫이라면, 마찬가지로 생산자의 노력을 이끌어내는 것은 결국 소비자의 역할일 것이다.

르웬조리 산맥을 끼고 달리는 사륜구동의 차창 밖은 이미 어둠이 내려앉았다. 낮에 길가에서 사먹은 음식이 좋지 않았는지 속이 불편했다. 아프리카를 방문할 때면 과일을 제외한 날 음식을 멀리하며 주의를 기울이지만, 배앓이는 통과의례처럼 찾아온다. 멀미 기운이 나서 창문을 열었다. 밤 공기가 무척 차다. 꽤 높은 산중간을 지나고 있음을 직감했다. 깊은 밤, 세상의 유일한 빛은 비포장 길을 달려가는 이 차의 전조등 불빛뿐이다. 가로등이 없을뿐더러, 농가에서 새나오는 희미한 전등불조차 찾기 힘들다.

문득 우주에서 찍은 지구의 밤 사진이 생각났다. 대도시나 해안선을 따라 환한 불빛들이 반짝거리지만 대륙의 산악지역과 큰 대양은 온통 까맣게 보이던 사진. 아마도 르웬조리 산맥과 이 산맥이 좌우로 나뉘고 있을 콩고의 밀림과 우간다의 사바나, 그리고 바다처럼 넓은 빅토리아 호수까지 우주에서 내려본 아프리카 대륙의 중심은 태초의 지구의 밤이 그랬듯 암흑 그 자체일 것이다.

일행 중 한 명이 손으로 하늘을 가리켰다. 쏟아질 듯 수많은 별들. 마치 드라마나 영화에서 컴퓨터 그래픽으로 그려 넣은 것처럼 흩뿌려 놓은 수많은 별들. 평생 저렇게 많은 별들을 어디서 다시 볼 수 있을까. 적도선이 지나가는 르웬조리 산맥, 아프리카 정 중앙의 높은 산언덕에서 바라본 밤하늘은 평생 잊을 수 없는 감동의 우주였다. 그날 밤 묵을 숙소에 도착하기 전까지 달리는 차 안 내내 그렇게 밤하늘을 올려보며 불편한 속을 달랠 수 있었다.

아프리카의 진주, 진주처럼 빛나는 별들. 르웬조리의 밤은 아름다웠다.

* [커피 벨트를 가다] 우간다 편은 이번 회를 마지막으로 막을 내립니다. 다음 회부터 중앙아메리카 커피의 대표국가, 과테말라 편이 이어집니다.

최상기 커피프로페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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