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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시선, 워코노미] 기관총 앞 선명한 표적된 파란색 군복… 시대착오가 된 군복 통일의 경제학

입력
2020.01.18 04:40
1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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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 1차대전 프랑스-독일 국경전투

※ 태평양전쟁에서 경제력이 5배 큰 미국과 대적한 일본의 패전은 당연한 결과로 보입니다. 하지만 미국과 베트남 전쟁처럼 경제력 비교가 의미를 잃는 전쟁도 분명히 있죠. 경제 그 이상을 통섭하며 인류사의 주요 전쟁을 살피려 합니다. 공학, 수학, 경영학을 깊이 공부했고 40년 넘게 전쟁에 대한 관심을 기울여온 권오상 프라이머사제파트너스 공동대표가 <한국일보>에 격주 토요일 연재합니다.

1차대전 초기였던 1914년 8~9월 앙숙 관계이던 프랑스와 독일은 양국 국경은 물론이고 북쪽 벨기에까지 이르는 긴 전선을 두고 동시다발적 전쟁을 치렀다. 독일군 침공을 받은 벨기에의 군인들이 기관총을 운반하는 개들을 이끌고 후퇴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1차대전 초기였던 1914년 8~9월 앙숙 관계이던 프랑스와 독일은 양국 국경은 물론이고 북쪽 벨기에까지 이르는 긴 전선을 두고 동시다발적 전쟁을 치렀다. 독일군 침공을 받은 벨기에의 군인들이 기관총을 운반하는 개들을 이끌고 후퇴하고 있다. ⓒ위키피디아

1914년 8월 7일 14사단과 41사단으로 구성된 프랑스 7군단은 동북쪽의 뮐루즈를 향해 국경을 넘었다. 뮐루즈는 단순하지 않은 과거를 가진 도시였다. 16세기 초부터 스위스의 일부였던 뮐루즈는 프랑스혁명 후인 1798년 시민들의 투표에 의해 프랑스에 합류했다. 1871년 프랑스-프로이센전쟁에서 프랑스가 패하면서 알사스에 속한 뮐루즈는 뮬하우젠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말하자면 뮐루즈는 프랑스 작가 알퐁스 도데가 쓴 ‘마지막 수업’의 무대였다. 독일에게 내준 알사스가 못내 아쉬웠던 프랑스는 1차대전이 시작되자마자 이를 되찾기 위한 공격을 개시했다. 즉 뮐루즈전투는 1차대전에서 프랑스군이 치른 최초의 전투였다.

◇두 앙숙, 국경 두고 길게 대치하다

독일은 개전 초 프랑스를 굴복시키기 위해 전매특허라고 할 수 있는 우회기동을 통한 포위섬멸전을 시도했다. 국경을 직접 마주한 남쪽의 6군과 7군이 전면의 프랑스 1군, 2군과 엉겨붙는 사이 북쪽에 배치된 1군부터 5군까지의 5개 군이 벨기에를 관통해 파리로 진격하는 계획이었다. 1905년까지 독일군 총참모장이었던 알프레트 폰 슐리펜이 수립한 원래의 작전계획은 사실 이보다 더 대규모였다. 슐리펜이 꿈꿨던 규모에 미달했던 현실의 독일군은 기다란 대낫보다는 짧은 호미에 가까웠다.

8월 2일 룩셈부르크를 점령한 독일군은 이튿날 프랑스에게 선전포고를, 벨기에를 향해서는 영토 통과를 방해하지 말라는 최후통첩을 날렸다. 벨기에가 거부하자 곧바로 다음날 아침 독일군은 벨기에를 침공했다. 병력이 많지 않은 벨기에군이 독일군을 단독으로 막아낼 가능성은 낮았다. 단적인 예로, 벨기에군의 거치식 기관총은 개가 끌었다.

프랑스군은 독일군의 계획과 의도를 모르지 않았다. 프랑스-프로이센전쟁에서 패배한 후 프랑스는 벨기에를 포함한 국경지대까지 병력을 신속하게 수송할 수 있는 철로를 16개 건설했다. 이는 13개 철로를 사용할 수 있는 독일보다 더 신속하게 병력을 배치할 수 있다는 의미였다. 프랑스 3군, 4군, 5군은 곧바로 국경을 넘어 벨기에 영토로 진입했다. 가장 좌익에 선 프랑스 5군의 북쪽에는 영국군이 자리했다. 결과적으로 프랑스의 5개 군은 개전 첫달에 북쪽의 벨기에 영토부터 남쪽의 독일 접경 지대에 걸쳐 독일군과 대치했다. 동시다발적인 전투는 당연한 일이었다. 이 전투들은 나중에 집합적으로 ‘국경전투’라고 알려졌다.

◇속사포로 40년 전 설욕 나선 프랑스

비록 40여 년 전 프랑스-프로이센전쟁의 패배로 자존심에 금이 가긴 했지만 여전히 프랑스군은 유럽의 대표적인 강군이었다. 우선 프랑스군의 포는 당대 최고 수준이었다. 가령, 1897년에 개발된 구경 75㎜ 야포 슈나이더에는 주퇴복좌기가 달려 있었다. 주퇴복좌기는 포의 역사에 한 획을 그은 혁신적인 기계장치였다.

슈나이더 이전의 모든 포에 공통적으로 존재했던 한 가지 문제는 발사 때의 반동이었다. 쏠 때마다 반동 때문에 바퀴 달린 포가(포신을 올려놓는 받침틀)가 뒤로 굴러가 여차하다간 무거운 포에 깔릴 위험이 다분했다. 또한 다시 원위치시켜서 조준하는 데 많은 시간이 소요되어 빨라야 1분당 2발 발사가 고작이었다. 대구경의 공성포나 중포가 주로 사용하는 바퀴가 없는 고정된 포좌도 완전한 해결책이 될 수 없었다. 요새를 방어하는 포라면 몰라도 전장이 수시로 바뀌는 야전에 그런 포를 끌고 다니기는 힘들었다. 발사 시의 반동력을 포가 전체가 아닌 포신의 후퇴를 통해 흡수하고 유압을 통해 원래 위치로 되돌리는 주퇴복좌기는 앞서 언급한 모든 문제를 해결했다.

주퇴복좌기로 인해 슈나이더 75㎜포는 1분에 15발이라는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포탄을 쏠 수 있었다. 슈나이더를 가리키는 다른 이름은 바로 ‘속사포’였다. 1899년의 의화단운동에서 보병을 따라다니면서 포탄을 쏟아내는 프랑스군 속사포의 위력은 무시무시했다. 슈나이더는 처음 개발된지 40여 년 후인 2차대전에서도 사용될 정도로 기술적 완성도가 높았다. 독일군은 슈나이더의 포가만 바꾼 대전차포 Pak 97/38으로 소련군 전차 KV와 T-34를 파괴했고, 미군은 M3 리나 M4 셔먼 같은 전차에 전차용으로 개조한 슈나이더를 주포로 탑재했다.

◇전장에선 독이 된 혁명 전통

프랑스군의 또 다른 강점은 남다른 사기와 자부심에 있었다. 프랑스혁명 이후의 프랑스군은 동시대 어느 나라 군대도 상대가 되기 힘든 용기를 보여줬다. 원치 않는 전쟁에 강제로 동원된 다른 나라 병사들과 달리 프랑스 보병은 자발적으로 전투에 나섰다. 왕과 귀족계급에 의해 지배되지 않는 자신의 조국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이어 나폴레옹은 신분과 무관하게 실력에 따라 진급하도록 군제를 바꿨다. 나폴레옹군의 유능한 장군 다수는 예전이라면 장교가 될 수 없는 평민이었다. 이는 돈을 더 많이 내는 귀족이 지휘관으로 승진하는 영국군을 비롯한 다른 나라 군대와 좋은 대조를 이뤘다.

프랑스군의 군복은 이러한 프랑스혁명의 정신에 따라 만들어졌다. 자유, 평등, 우애를 각각 상징하는 파랑, 하양, 빨강의 삼색은 프랑스 국기뿐만 아니라 군복에도 반영되었다. 그중 가장 중요한 색은 자유에 해당하는 파랑이었다. 모자의 깃털 장식이나 윗옷 목깃에 사용된 빨강이나 가죽 벨트에 사용된 하양에 비해 파랑은 전열보병의 상의와 샤쇠르, 즉 경장추격병의 상하의 모두에 사용될 정도로 중요한 색깔이었다. 프랑스군은 군복의 파랑색을 포기할 수 없는 자신들의 정체성으로 여겼다.

군대가 통일된 군복을 입는 일은 비단 프랑스군만의 전통은 아니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을 상징하는 군복색은 오랫동안 흰색이었다. 서구 역사에서 흰색은 순결, 교회, 권력을 상징했다. 프로이센군은 전통적으로 검정색 군복으로 유명했고, 감청색 군복도 많이 착용했다. 영국육군은 빨강을 자신들을 상징하는 색으로 간주했다. 화려한 장식과 색깔로 꾸민 군복을 통일해 입은 군대는 전장에서 상대방을 주눅들게 했다. 2차대전 때 미군을 지휘한 조지 패튼은 “전투력은 잘 다려진 군복과 엄정한 군기에서 나온다”고 말했다.

통일된 군복에는 군대의 자부심과 동질감을 높이는 표면적인 목적 외에 다른 숨겨진 목적도 있었다. 바로 병사들의 탈주를 어렵게 하려는 목적이었다. 부대간 전투에서 개인의 이익과 부대의 이익은 완벽히 일치하지 않는다. 경제학적 관점에서 각 개인은 도망이 합리적인 선택이다. 부대에 오래 남아 있을수록 전투에서 죽을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부대는 정반대다. 도망이나 후퇴를 시도하는 병사가 많아질수록 부대가 전투에서 패할 가능성이 커진다. 개인별 합리성의 단순합이 총체적 선을 담보하지 않는 것이다.

도망치려는 병사를 통제하는 전통적인 방법은 배수진이었다. 도망치기 어렵게 만들어 눈앞의 적을 물리치는 게 유일하게 살 수 있는 길이라고 믿게 만드는 방법이다. 즉 배수진은 싸울 의사가 별로 없는 병사들을 징집했을 때 주로 사용되었다. 화려한 군복은 같은 목적을 달성하려는 다른 방식의 시도였다. 눈에 잘 띄는 군복을 입은 병사가 홀로 도망을 시도하다간 뒤에서 지키고 있는 자국군 장교의 칼이나 총탄이 곧바로 날아들었다. 또 그걸 피한다 해도 적병의 눈에 띄어 죽거나 포로로 잡힐 가능성이 높았다.

◇떼죽음 초래한 낡은 자부심

소총의 정확도 향상과 기관총의 등장은 눈에 잘 띄는 군복을 입고 선 채로 줄 맞춰 진격하는 보병 횡대를 집단적 자살행위로 만들었다. 영국군은 인도 침략과 영국-보어전쟁에서 이를 뼈저리게 느끼곤 빨강을 버리고 카키색 군복으로 갈아 입었다. 흰색을 고수하던 오스트리아-헝가리군도 19세기 후반에 이미 암청색과 회색 군복으로 바꿨다.

프랑스군에서도 비슷한 인식이 없지 않았다. 전쟁장관 아돌프 메시미는 1차대전 발발 2년 전인 1912년 선명한 파랑색을 대신해 회색이 들어간 청색으로 바꾸려고 시도했다. 프랑스군은 “군의 위신이 위기에 처했다”며 집단으로 반발했다. 메시미의 시도는 실현되지 못했다.

1914년 8월의 국경전투에서 프랑스군의 선명한 군복은 독일군 기관총의 뚜렷한 표적이 되었다. 프랑스군의 병력 손실이 많지 않다면 이상할 노릇이었다. 8월 말까지 프랑스군은 7만5,000명의 전사자를 비롯한 26만여 명의 사상자를 잃었다. 같은 시기 독일군의 피해는 약 20만7,000명에 그쳤다. 실수를 뒤늦게 깨달은 프랑스군은 그 해 가을 눈에 덜 띄는 색으로 결국 군복을 바꿨다.

권오상 프라이머사제파트너스 공동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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