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객기 격추 인정, 거센 후폭풍… 시민 수천명 “독재자에 죽음을”
이란이 우크라이나 여객기를 오인 격추한 사실을 인정한 이후 거센 후폭풍에 직면했다. 국제 사회의 여론 악화는 물론 이란 내 반정부 시위도 재점화하면서 대미 강경파 일색인 이란 정부가 수세에 몰리고 있다. 미국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이란 정부를 압박하며 협상 재개 등 국면 전환을 시도할 것으로 보인다.
이란 정부는 11일(현지시간) 테헤란의 이맘 호메이니 공항에서 지난 8일 새벽 추락한 우크라이나 여객기를 미군의 크루즈미사일로 오인해 격추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고 APㆍ로이터통신 등이 보도했다. 하산 로하니 이란 대통령은 자국군의 ‘재앙적 실수’에 대해 피해국인 우크라이나ㆍ캐나다 정상들과의 전화 통화에서 깊은 유감과 사과의 뜻을 전하며 진상 조사와 책임자 처벌을 약속했다. 다만 모하마드 자바드 자리프 외무장관은 트위터에서 “미국의 모험주의 때문에 위기가 고조된 상황에서 ‘사람의 실수’가 발생했다”며 ‘미국 책임론’을 제기했다.
이란군은 앞서 8일 새벽 미국에 대한 보복으로 이라크 내 미군기지 2곳에 미사일 공격을 감행했고, 4시간쯤 뒤 이맘호메이니 공항을 막 이륙한 우크라이나 여객기를 미사일로 격추시켰다. 이로 인해 이란인 82명과 캐나다인 63명(이란계 57명)을 포함한 탑승객 176명 전원이 사망했다. 사고 직후 제기된 ‘격추설’을 서방의 심리전이라고 비난하던 이란 정부는 결국 사흘만에 책임을 인정하고 고개를 숙였다.
이란 정부의 공개 사과 자체가 이례적이지만 국내외 여론은 급격하게 악화하고 있다. 여객기 희생자 추모행사에 참여했던 이란 시민 수천명은 정부와 군을 비판하는 집회를 열어 “독재자에게 죽음을”, “쓸모없는 관리들은 물러가라” 등의 구호를 외쳤다고 CNN방송 등이 전했다. 심지어 이란의 최고지도자인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를 ‘살인자’로 부르며 그의 사임을 요구하는 이들도 있었다. 미국이 가셈 솔레이마니 혁명수비대(IRGC) 정예군(쿠드스군) 사령관을 폭살한 이후 반미 시위로 옮아가는 듯하던 반정부 시위가 다시 불붙기 시작한 것이다. 미국의 공습 직후부터 반미를 기치로 내세우며 내부 결속을 꾀하던 하메네이와 군부 등 대미 강경파 지도부는 사실상 직격탄을 맞은 셈이다.
◇이란 강경파 정치적 타격… 기회 잡은 트럼프
반면 솔레이마니 공습 이후 안팎의 비판에 직면했던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겐 상황 반전의 기회가 되고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날 트위터에서 “용감하고 오랫동안 견뎌온 이란 국민들이 고맙다”며 이란 내 반정부 시위대를 공개 지지했다. 그는 트윗 내용을 이란어로도 올렸다. 솔레이마니 제거 작전을 밀어붙였다가 도마에 올랐던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도 “이란 국민들은 하메네이의 부패정치와 IRGC의 잔혹함에 진저리가 난 것”이라고 가세했다.
이란 군부의 명백한 과실이 드러나면서 대미 강경노선을 취해 온 이란 지도부는 적잖은 정치적 타격을 입게 됐다. 특히 IRGC 등 군부의 영향력 위축은 당분간 불가피해 보인다. 로버트 오브라이언 백악관 국가안보보좌관이 “이란 측과 협상에 들어갈 가능성이 커졌다”고 말한 건 이란이 대미 강경노선으로 일관하기 어려울 거라는 판단의 반영이다. 다만 미ㆍ이란 간 협상은 결국 ‘새 핵합의’로 나아갈 수밖에 없고, 이 과정에선 유럽연합(EU) 주요국과 중국ㆍ러시아의 이해관계까지 조정돼야 하는 만큼 이른 시일 내 가시적 성과는 기대하기 어려워 보인다.
최나실 기자 verit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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