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벌의 탄생, 대치동 리포트] <4>대학 서열화의 병폐 
지난 10일 서울 강남구 대치동의 고교 건물 벽에 '2019학년도 주요대학 합격현황' 현수막이 걸려 있다. 명문대 진학을 홍보하는 현수막이 학벌주의를 부추긴다는 우려가 높지만, 이런 관행은 쉽게 사라지지 않고 있다. 배우한 기자

‘서울대 26명 합격, 연세대 56명, 고려대 27명, 서강대 29명, 성균관대 45명, 한양대 43명, 중앙대 70명, 경희대 47명, 한국외대 24명, 서울시립대 9명.’

지난 7일 서울 대치동에 위치한 한 고등학교 건물 벽에는 지난해 주요 대학 합격현황을 알리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대치동 학원가 인근에 위치한 또 다른 고교에는 ‘성공적인 대학입시 전략 설명회’라는 제목의 현수막 밑으로 서울대 수시 합격생의 실명이 써있는 전광판이 번쩍였다.

현수막에 적힌 내용은 공식처럼 떠도는 대학 서열을 압축했을 뿐이다. 학생들 머리 속에는 좀더 일목요연하게 정리돼 있었다. “문과는 ‘서연고 서성한 중경외시 건동홍 국숭세단 광명상가’, 이과는 의치한(의대ㆍ치대ㆍ한의대)을 제외하고 ‘서카포 연고 한성서’로 정리돼요.” 지난해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을 치르고 졸업을 앞둔 조주현(18)군은 들어보거나 알고 있는 대학 서열을 거침없이 말했다.

대학 이름의 앞 글자를 따서 만들어진 암호 같은 문구는 학생들 사이에서 공식처럼 암기돼 통용되고 있다. 학교와 학원가에 걸린 현수막에 나오는 순서 그대로다. 고교 3학년인 심민기(18)군은 “친구나 선생님과 대화할 때 이런 대학 서열이 자연스럽게 언급되고, 그게 당연한 것처럼 받아들여진다”며 “고교 2학년 때 어떤 선생님은 동기부여를 한다며 대학 서열을 칠판에 적어 놓고 암기하도록 한 적도 있었다”고 전했다. 서울 소재 대학을 ‘인서울’로 부르거나, 지방대를 ‘지거국(지방 거점 국립대)’과 그 이외의 대학으로 구분한 지는 이미 오래 됐다. 조주현 군은 “학생들 사이에선 진학 목표를 말할 때 ‘인서울은 해야지’ ‘지거국 갈 거야’라는 식으로 말한다”며 “대학을 서열에 따라 구분하는데 아주 익숙해져 있다”고 말했다.

지난 2016년 서울 중계동 입시학원에 대학 합격자 명단이 게시돼 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대학 서열화에 멍드는 교육 

이처럼 학생들에게 내면화한 대학 서열은 교육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심어주고 있다. 학력과 개인 능력을 동일시하고, 능력보다 학력을 과대평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명문대 간판이 중요해지다 보니 교육이 입시위주로 변질돼, 개인의 잠재력을 키운다는 본질은 화석화 돼버렸다. 오호영 한국직업능력개발원 선임연구위원은 ‘대학서열화와 대학교육에 관한 연구’ 보고서에서 “대학 서열화는 고교에서의 진로 선택을 재능이나 적성보다는 명문대 진학경쟁으로 변질시켰다”고 지적했다.

입시위주 교육은 학창시절부터 친구를 경쟁자로 인식시켜, 경쟁자의 실패를 바라는 심리 상태를 갖게 만든다. 서울대 재학생인 김모(22)씨는 “고교 시절 시험점수를 일부러 낮게 알려 주는 친구들이 있었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상대를 방심하게 하려는 전략이었다”며 “학습자료를 공유하지 않는 건 기본이고, 내신 1등급인 상위권 친구끼리는 친하게 지내지도 않는다”고 말했다.

상위권이 아닌 학생들은 패배의식에 젖어 쉽게 무기력증에 빠진다. 고교 1학년 자녀를 둔 남형은(47)씨는 “아이가 영어와 수학을 잘하지 못하면 다른 것을 아무리 좋아해도 ‘결국 안 될 거야’라고 생각한다. 아이가 학교에 왜 가는지 모르겠다고 말할 때마다 안타까울 뿐”이라고 밝혔다.

사회적 비용을 키우는 재수생 양산도 대학 서열화의 폐단으로 꼽힌다. 한국교육과정평가원에 따르면 2020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응시원서 접수자 가운데 졸업생 비중은 25.9%에 달했다. 최근 10년간 25%가 넘은 적은 처음이다. 서열에서 더 높은 대학에 진학하기 위한 경쟁이 졸업 후에도 계속되고 있는 셈이다.

공고화된 대학 서열은 도전과 재평가 기회를 박탈하기도 한다. 한국산업인력공단의 ‘편견없는 채용ㆍ블라인드 채용 실태조사 및 성과분석 최종보고서’에 따르면, 260개 공공기관에서 학력 등을 가리고 직무능력 중심으로 인재를 선발한 결과, 이른바 ‘스카이(SKY)’ 대학 출신 신입사원 비중이 15.3%에서 10.5%로 감소한 반면, 비(非)수도권대 출신은 38.5%에서 43.2%로 늘어났다. 그 동안 채용과정에서 학력차별이 있었다고 추정해 볼만한 내용이다. 연구에 참여한 신유형 한양대 교수는 “예전에는 ‘서울대 경영학과를 나오면 한국에서 경영을 가장 잘하겠네’라고 평가했다면, 블라인드 채용에선 직무 상황을 알려주고 지원자들이 어떻게 대처하는지 평가해 선발한다”며 “블라인드 채용은 ‘학벌=직무 능력’이라는 편견을 깨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편입할 때 서열에 따른 차별을 겪은 경우도 있다. 지방 국립대를 다니다가 약대 편입시험을 준비했던 배모(24)씨는 A대학에는 지원조차 하지 못했다. A대학의 입학자 데이터를 분석해 보면 ‘서성한’ 이상의 학교를 다녀야 입학 최소기준에 들어간다는 이야기가 공공연한 비밀로 통했기 때문이다. 배씨는 “단순히 학벌이 낮아 불이익을 받는다면 다시 평가 받을 기회를 원천적으로 없애는 것”이라고 밝혔다.

 ◇로스쿨도 서울대 가려고 반수 열풍 

대학 서열화 현상은 법학전문대학원(로스쿨)에서도 나타나기 시작했다. 법조계 주류가 되고 싶으면 SKY 로스쿨에 입학하거나, 최소한 성균관대 로스쿨까지는 가야 한다는 인식이 퍼져 있다는 것이다. .

최근엔 ‘삼수를 해서라도 서울대 로스쿨을 가야 한다’는 인식이 빠르게 자리잡고 있다. 서울대 로스쿨이 전공필수 과목에 대해 절대평가제를 도입한 게 결정적이었다. 이창현 한국외대 로스쿨 교수는 “상대평가를 하면 C학점을 받는 학생은 서울대 로스쿨생이라고 해도 대형 법무법인(로펌) 취업이 어렵다. 반면 절대평가를 하게 되면 ‘패스’만 주면 되니까, 서울대 로스쿨생들의 대형 로펌 입성이 쉬워졌다”고 분석했다. 예전엔 로펌에서 서울대 로스쿨 하위권 학생보다 비(非)서울대 로스쿨의 상위권 학생을 선호했지만, 앞으론 서울대 로스쿨생이 로펌을 싹쓸이할 가능성이 커졌다는 것이다. 김동훈 국민대 법대 교수는 “연세대와 고려대 로스쿨생조차 서울대 로스쿨을 가기 위해 반(半)수를 하는 실정”이라며 “서울대가 블랙홀처럼 자원을 빨아들이면서 대학간 경쟁이 제대로 작동할 수 없게 됐다”고 지적했다.

 
지난 2017년 광주 시내의 한 학원이 건물 외벽에 ‘인서울 50명 합격’ 등의 내용을 담은 현수막을 내걸자, 시민단체인 학벌없는사회를위한광주시민모임이 이에 항의하는 현수막을 내걸었다. 학벌없는사회를위한광주시민모임 제공. 한국일보 자료사진
 ◇‘출신학교=능력’이란 편견 사라져야 

한국에선 전국의 모든 대학을 일렬로 놓고 순위를 매길 정도로 서열 매기기가 극심하다. 외국에도 물론 명문대는 있지만, 기껏해야 ‘아이비리그’ 같은 그룹 단위로 인식되고 있다는 점에서 한국과는 차이가 있다. 시민단체 사교육걱정없는세상의 홍민정 상임변호사는 “한국에선 같은 대학에서도 수시와 정시 출신을 구분 짓고, 어느 고교를 나왔는지를 따져 층을 나눈다. 촘촘히 나눠서 차별함으로써 자신을 돋보이게 하거나 자신의 지위를 공고히 하려는 욕구가 반영된 현상”이라고 분석했다.

하지만 대학 서열과 능력이 비례하지 않는다는 것은 여러 연구를 통해 증명되고 있다. 한국직업능력개발원이 2017년 발간한 ‘한국 사회의 학력주의와 포스트 NCS(직무능력표준)’에 따르면 일류대 출신이라도 업무 성과가 좋은 직원부터 나쁜 직원까지 분포가 다양했으며, 명문대 출신이 아니라도 학점이 높은 직원은 업무 성과가 높게 나타났다. 홍민정 변호사는 “좋은 대학을 나왔다는 건 학창시절 특정 교과목 성적이 우수하다는 것이지, 그 사람의 의사소통 능력과 성실성, 창의성 등을 설명해주지는 못한다”며 “출신학교를 근거로 합리적 이유 없이 차별하는 일은 없어져야 한다”고 강조했다.

채지선 기자 letmeknow@hankookilbo.com

김민준 인턴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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