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알림

[36.5˚C] 트럼프슬레이션과 나쁜 참모

입력
2020.01.10 04:40
30면
0 0

※ ‘36.5˚C’는 한국일보 중견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영국 런던에서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와 양자회담 중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폼페이오 장관은 트럼프 참모진 중 대표적인 ‘예스맨’으로 꼽힌다. 런던=로이터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지난달 영국 런던에서 쥐스탱 트뤼도 캐나다 총리와 양자회담 중 마이크 폼페이오 미 국무장관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폼페이오 장관은 트럼프 참모진 중 대표적인 ‘예스맨’으로 꼽힌다. 런던=로이터 연합뉴스

요즘 국제 담당 기자의 중요한 업무 중 하나는 말 한 마디로 전 세계를 들었다 놨다 하는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입을 지켜보는 일이다. 트위터에서, 백악관 집무실에서, 전용기 안에서 그가 내뱉는 말은 모두 기사가 될 뿐 아니라 국제 정세에도 큰 영향을 미친다.

‘6학년 수준 문법(카네기멜론대 언어기술연구소 보고서)’에 한 음절 단어를 주로 구사하는 그의 발언은 맥락에 따라 다르게 해석된다. 예컨대 강도를 높여가는 북한의 위협에 대해서도, 중국과의 무역 협상에서 긍정 신호를 내보낼 때도 똑같이 “두고 보자(We’ll see)”고 말하는 식이다. 오죽하면 트럼프(Trump)와 통역(Translation)이 합쳐진 ‘트럼프슬레이션(Trumpslation)’이라는 조어가 생겼을까. 물론 트럼프슬레이션에 힘을 쏟아도 해석되지 않는 말도 많다. 더구나 참모들의 설득에 따라 손바닥 뒤집듯 입장을 바꾸는 일도 허다하다.

세계를 놀라게 한 미군의 가셈 솔레이마니 이란 이슬람혁명수비대(IRGC) 정예군(쿠드스군) 사령관 살해도 그랬다. 트럼프 대통령은 새해맞이 행사에 참석하는 길에 “나는 평화를 좋아한다”며 이란과의 전쟁 가능성을 일축했지만 사흘도 지나지 않아 솔레이마니 사령관 제거 작전을 최종 승인했다.

미 언론에 따르면 이 같은 결정 뒤에 마이크 폼페이오 국무장관과 마이크 펜스 부통령이 있었다. 이에 대해 트럼프 대통령과 같은 공화당인 랜드 폴 상원의원(켄터키)은 6일 “트럼프 대통령이 ‘솔레이마니 살해’라는 나쁜 조언을 받아들였다”며 “이는 대(對)이란 외교정책의 죽음을 의미한다”고 비판했다.

외교 문제에 미숙한 대통령이 참모진의 호전적 조언에 귀 기울였다는 점은 2003년 미국의 이라크 침공 직전 상황과도 비교된다. ‘아들 부시’인 조지 W 부시 당시 대통령은 사담 후세인 이라크 정권의 대량살상무기(WMD) 보유 의혹을 주장한 딕 체니 부통령과 도널드 럼스펠드 국방장관의 조언에 따라 이라크전을 승인했다. 미국은 한 달도 안 돼 후세인 정권을 축출하고 이라크를 장악했다. 그러나 그 후로도 오랫동안 이라크는 안정을 찾지 못했고 미국의 희생도 이어졌다. 전쟁의 명분이 된 WMD의 증거도 드러나지 않았다. 미 시사지 애틀랜틱은 최근 다시 격랑에 휩싸인 중동 정세를 당시에 빗대 “2003년이 다시 돌아왔다”고 썼다.

이란과의 확전이 대선 가도에 미칠 부정적 영향을 우려해서인지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의 보복 공격 이튿날인 8일 대국민 연설을 통해 이란에 군사력이 아닌 경제 제재로 대응하겠다고 밝혔다. 이날만큼은 트럼프슬레이션이 필요한 충동적 언어 구사 대신 연설문을 충실히 읽었다.

마키아벨리는 군주란 자신의 이해관계를 배제한 채 국가 사업을 수행하고 정직한 조언을 할 수 있는 인재를 곁에 둬야 한다고 주문했다. 출범 초기부터 참모진을 꾸준히 예스맨으로 교체해 온 트럼프 행정부에 기대하기에는 너무 먼 이야기다. 오히려 최근에 입각한 참모일수록 ‘코드 인사’ 성격이 강해, 전문성에도 의구심을 갖게 된다. 존 볼턴 후임으로 지난해 9월 임명된 로버트 오브라이언 국가안보보좌관은 방송 출연 중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이름을 헷갈리는 말실수까지 했다. 그는 성과 이름을 혼동한 듯 “은위원장은…”이라고 말했다.

미국처럼 전쟁 위기 순간까지 내몰린 것은 아니지만 참모진의 잘못된 보필 때문에 위태롭기는 한국도 다를 게 없다. 대통령의 최측근이었던 조국 전 법무부장관의 부정은 민심이 진보와 보수로 두 동강 난 직접적 원인이 됐다. 악화된 한미ㆍ한일 동맹관계도 좀처럼 나아지지 않고 있다. 우리에게도 한 순간의 잘못된 판단으로 전쟁과도 같은 심각한 상황에 이르게 될 정책 결정이 많다는 점을 잊지 말길 바란다.

김소연 국제부 차장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