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알림

[아침을 열며] 투명우산과 새해소원

입력
2020.01.10 04:40
31면
0 0
우리는 아이들에게 교육이라는 이름을 붙여 많은 우산을 들려줬다. 그 우산에 ‘예방’, ‘진흥’, ‘촉진’이라는 색깔마저 칠해줬다. 모두 아이들을 위한다며 만든 것들이다. 하지만 이 많은 법령들이 정작 교육을 방해할 때가 많다는 것을 학교 밖 어른들은 잘 모른다. 아니 알면서도 모른 체한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우리는 아이들에게 교육이라는 이름을 붙여 많은 우산을 들려줬다. 그 우산에 ‘예방’, ‘진흥’, ‘촉진’이라는 색깔마저 칠해줬다. 모두 아이들을 위한다며 만든 것들이다. 하지만 이 많은 법령들이 정작 교육을 방해할 때가 많다는 것을 학교 밖 어른들은 잘 모른다. 아니 알면서도 모른 체한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두 달 전에 아내와 함께 운동을 시작했다. 아내는 격한 운동을 하지 말라는 의사의 처방으로 차분한 운동이 필요했다. 나는 늘 여기저기 돌아다니지만 운동이라고는 도통 하지 않으니 규칙적인 운동이 필요했다. 그래서 퇴근 후에 저녁밥을 먹고 소화도 시킬 겸 만경강변을 같이 걷기로 했다.

대수롭지 않게 시작했던 이 산책이 의미 있게 다가왔다. 그래서 산책 대신 운동이라 부른다. 아내는 전에는 돈 주고 하던 운동인데 요즘엔 하루에 백 원씩 마일리지로 돈을 번다며 좋아한다. 같이 걸으니 이백 원이니 덩달아 나도 좋다. 달이 차오르고 저무는 걸 보며 날짜 가는 걸 같이 느낀다. 걷다가 서서 별자리를 찾느라 고개를 들어 하늘도 본다. 시험이 끝난 날에는 딸도, 대학에 다니다 집에 온 아들도 가끔 같이 걷는다. 이렇게 귀한 시간을 주었으니 해가 바뀌어도 이 운동을 거르지 않는다.

그런데 요 며칠 겨울비가 계속 내리는 바람에 운동을 못했다. 날씨만큼이나 몸도 찌뿌둥하다. 원고 마감시한도 다가왔는데 글감마저 떠오르지 않는다. 저녁밥을 먹고 나니 마침 빗줄기도 약해졌다. 강변에 나갔으면 좋겠는데 졸업식을 마친 아내는 피곤하다며 침대로 향한다. 혼자라도 가려 하니 비도 오는 날 어두운 강변에 홀로 나서는 게 을씨년스럽다. 탁 트인 강변을 걸으면 머리도 개운해지고 글감도 떠오를 것 같다며 아내를 졸랐다. 아내는 여느 때처럼 강바람을 막기 위해 롱패딩 지퍼를 턱 끝까지 치켜 올리며 강변으로 나선다.

시원한 강바람에 기분이 좋아지는지 아내는 졸업식 날 끝내 눈물을 쏟고 말았다는 말을 털어놓는다. 새로 짓기로 한 우리집은 어떻게 지을지, 아들과 딸이 어떻게 컸으면 좋은지, 올해는 어떤 아이들을 만나면 좋은지, 아내와 같이 몸담고 있는 교원단체는 올해 어떤 일을 하면 좋은지, 학교가 어떻게 바뀌면 좋겠는지 이야기는 이어진다. 그렇게 이야기에 빠져 바람을 등지고 강변을 향해 걷느라 비바람이 제법 들이친다는 것도 몰랐다. 집으로 돌아오려고 방향을 바꾸고 나서야 얼굴로 달려드는 빗줄기가 제법 차고 거세다는 것을 알았다.

바람이라도 막아보려고 들고 간 우산을 펼쳤다. 얼굴로 달려드는 비바람은 막겠는데 손전등 불빛을 우산이 가려 앞이 잘 보이지 않아 걷기가 힘들다. 그런데 투명우산을 들고 있는 아내는 씩씩하게 잘 걷는다. 그렇게 걸으며 잘 보인다고 날 놀린다. 그 놀림을 기분 좋게 받으며 교육도 투명우산이었으면 좋겠다고 했다. 아내는 앞이 안 보이는 내 우산을 접고 투명우산을 같이 쓰자고 하며 이유를 묻는다.

그동안 우리는 아이들에게 교육이라는 이름을 붙여 많은 우산을 들려줬다. 그 우산에 ‘예방’, ‘진흥’, ‘촉진’이라는 색깔마저 칠해 줬다. 오늘 기준으로 교육이라는 말이 들어간 법률이 154건, 행정규칙이 577건, 자치법규가 4,781건이다. 모두 아이들을 위한다며 만든 것들이다. 하지만 이 많은 법령들이 정작 교육을 방해할 때가 많다는 것을 학교 밖 어른들은 잘 모른다. 아니 알면서도 모른 체한다. 아이가 비를 맞지 않게 우산을 들려줬으니 할 일을 다 했다며 위안을 삼기도 한다. 그러느라 아이가 든 화려한 색깔의 우산만 보고 정작 우산을 든 아이는 보지 못한다. 우산을 든 아이도 제대로 앞을 보지 못한다.

새해가 밝았다. 소원 하나쯤은 품어볼 때다. 우산에서 색깔을 빼야 아이의 색깔이 보인다. 아이도 우산 너머를 볼 수 있다. 새해에는 교육 앞에 붙은 색깔 대신 선생님들과 아이들 각자의 색깔, 서로의 색깔을 보고 싶다. 그렇게 바라보며 학교에서 보내는 우리들의 하루하루가 행복하면 좋겠다. 이보다 진짜 급한 소원이 있다. 겨울방학도 했다. 눈 구경 좀 하고 싶다. 오늘밤에는 펑펑 내리는 함박눈을 만경강변에서 맞아보고 싶다. 그렇게 눈이 내리기만 한다면 투명우산도 필요 없다.

정성식 실천교육교사모임 회장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