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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방·상금 쥔 ‘경마장 갑’ 마사회… “기수 극단적 선택 책임져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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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방·상금 쥔 ‘경마장 갑’ 마사회… “기수 극단적 선택 책임져야”

입력
2020.01.07 18:30
수정
2020.01.07 21:00
1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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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단계 하청 인력구조 도마 

 마주-조교사-기수·말관리사… 수직 구조에 막강 권한 행사하며 

 2년에 한 번꼴 나오는 죽음에는 “법적인 계약 관계 없다” 모르쇠 

 5위 안에 들어야 돈 주는 제도는 불합리한 지시 거부 못하는 족쇄 

17일 빈 상여를 멘 고(故) 문중원 기수 시민대책위원회가 청와대로 행진하고 있다.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제공
17일 빈 상여를 멘 고(故) 문중원 기수 시민대책위원회가 청와대로 행진하고 있다. 민주노총 공공운수노조 제공

“앞이 보이지 않는 미래가 불안해 살 수 없다. 도대체 뭐가 선진 경마일까. 지금까지 죽어나간 사람이 몇 명인데…”

한국마사회 렛츠런파크 부산경남 소속 문중원(당시 40세) 기수는 지난해 11월 29일 이런 내용의 유서를 남기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2005년 개장한 부산경마공원에서만 일곱번째 극단적 선택이었다.

이로써 2년에 한 번 꼴로 발생한 기수들의 잇단 죽음은 그간 방치돼온 경마업계의 부조리를 드러냈고, 해결을 촉구하는 기폭제가 되고 있다. 특히 경마업계의 비뚤어진 하청 구조와 상금 지급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는 요구가 들끓고 있다.

7일 빈 상여를 메고 청와대까지 행진에 나선 ‘고 문중원 기수 시민대책위원회’ 측은 실질적인 사용자인 마사회의 공식 사과와 진상 규명을 촉구했다. 기수들에겐 견딜 수 없는 압박으로 작용하는 부조리한 계약 관계 정점에 마사회가 있지만 책임을 회피하고 있다는 게 이들의 주장이다. 전주희 서교인문사회연구실 연구원은 “마사회는 감독 역할을 하는 조교사를, 조교사는 기수와 말관리사를 통제하는 다단계 하청 구조가 연이은 죽음의 배경”이라고 꼬집었다.

마사회 고용구조. 불안정노동철폐연대 제공
마사회 고용구조. 불안정노동철폐연대 제공

마사회는 1993년 말 소유와 경마 시행을 분리하는 개인마주제를 도입하면서 조교사, 기수, 말관리사와의 고용관계를 해지했다. 이후 마사회는 마주와는 경주마 출주 계약을 맺고, 조교사에겐 마방임대와 면허교부를, 기수에겐 면허교부만 한다. 다시 마주가 개인사업자인 조교사에게 경주마를 위탁하고, 조교사는 기수와는 기승계약을, 말관리사와는 고용계약을 각각 체결하는 복잡한 구조다. 요약하면 마사회의 책임이 크게 줄고 조교사로 책임이 넘어간 것이다.

문제는 책임이 줄어든 마사회가 권한은 막강하다는 데 있다. 마사회는 “경기장 관리만 한다”고 주장하지만, 면허교부권과 마방임대권은 물론 각종 징계권과 상금 지급기준 결정권 등을 통해 조교사와 기수, 말관리자 모두에게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한다는 게 중론이다. 마방을 임대 받지 못하거나 임대 계약이 해지된 조교사는 일을 할 수 없고, 이런 조교사와 계약한 기수와 말관리사도 일자리를 잃게 되는 구조기 때문이다. 고 문 기수도 이런 마사회의 막강하지만 자의적인 권한을 비판했다. 기수로서 회의를 느낀 그는 2015년 조교사 면허를 취득했으나 4년 넘게 마사회로부터 마방을 임대받지 못해 괴로워했다. 그는 유서에 “마방을 얻기 위해선 높은 양반들과 친분이 없으면 안 됐다”고 적었다.

서울과 부산, 제주 3곳에 있는 마사회 경마공원 중 유독 부산에서만 극단적 선택이 반복되는 건 이런 부조리한 다단계 하청 구조에다, ‘선진경마제’라는 미명 하에 무한경쟁체제를 도입한 탓도 적지 않다는 지적이다.

렛츠런파크 부산경남은 성적을 기준으로 임금을 달리하는 기수 간 경쟁체제를 도입했다. 출전한 기수 10~14명 중에서 5위 안에 들어야만 돈을 받을 수 있는 제도다. 돈을 벌기 위해 경주에 부적절한 말인데도 조교사의 지시로 타는 경우도 적지 않다. 지시를 어기면 출전 기회가 줄고 출전료ㆍ상금 등을 적게 받기 때문에 기수들은 노동조건 개선을 요구하기는커녕 불합리한 지시에 따를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입을 모은다. 김혜진 불안정노동철폐연대 상임활동가는 “마사회가 조교사와 기수의 실질적 사용자이고 상금 결정권도 가지고 있지만 법적인 계약 관계가 없다는 이유로 반복되는 자살 사고에 제대로 된 대책을 마련하지 않고 있다”고 지적했다.

제도 개선을 요구하는 목소리는 커지고 있다. 마사회의 책임을 강화하고 기수들의 생계를 보장해야 한다는 것이 핵심이다. 고광용 전국공공운수노동조합 부산경남경마공원지부장은 “렛츠런파크 서울에서 운영하는 부가순위상금 제도를 확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경주 순위상금의 일부를 나눠 순위에 들지 못한 기수들에게도 일종의 고정급처럼 지급되는 부가순위상금 제도를 전체로 확대해야 한다는 얘기다. 마사회 고위관계자는 “조교사와 기수, 말관리사, 이들 노조의 상급노동단체 등이 포함된 다자간 협의체를 만들어 경마제도 개선이 이뤄질 수 있도록 노력하겠다”고 말했다.

세종=변태섭기자 liberta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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