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자폭탄이 떨어진 것 같다.”
앤드루 콘스탄스 호주 뉴사우스웨일스(NSW)주 교통부 장관은 4일(현지시간) 석 달 넘게 동남부 일대를 휩쓸고 있는 최악의 산불 사태를 이렇게 묘사했다. 상황의 심각성을 알 만한 발언이다. 정부가 예비군 수천 명을 투입하는 등 안간힘은 쓰고 있으나 고온과 강풍이 계속되면서 불길은 좀처럼 잡히지 않고 있다. 호주 국민의 분노는 스콧 모리슨 총리를 향하고 있다. 기후변화에 대한 정부의 미온적 대처가 대재앙을 불렀다는 것이다.
모리슨 총리는 이날 호주 역사상 처음으로 육ㆍ해ㆍ공군 예비군 3,000명에게 동원령을 내렸다. 화마와 싸우고 있는 의용소방대를 돕기 위함이다. 화재 진압에 투입할 군용기 임대비용 1,400만달러(약 163억4,500만원)를 지원하고, 주민과 관광객 수천 명을 대피시키기 위해 세 번째 해군 함정도 급파했다. 그는 “오늘 결정으로 더 많은 군인이 지상에 배치되고 더 많은 항공기가 하늘을 날며, 더 많은 배가 바다에 띄워질 것”이라고 약속했다.
그러나 모리슨 총리의 호언장담과 달리 상황은 걷잡을 수 없이 악화하고 있다. 지난해 9월 말부터 시작된 산불로 현재까지 24명이 목숨을 잃고 주택 2,000채 이상이 소실됐다. 특히 사망자의 절반이 넘는 13명이 지난 한 주 사이 숨지는 등 피해 규모는 되레 커지는 모습이다.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는 “화염에 녹지 4만 8,562㎢가 잿더미로 변했는데, 이는 스위스 전체 면적(4만1,285㎢)보다도 넓다”고 전했다. 우리로 치면 서울의 80배에 이르는 면적이 초토화된 셈이다.
호주가 자랑하는 야생동물도 절멸 위기에 내몰렸다. 시드니대 생태학자들에 따르면 이번 산불로 지금까지 약 4억8,000만마리에 달하는 포유류와 조류, 파충류가 죽음을 맞았다. 문제는 호주 내 야생동물들의 87%가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고유종이라는 점이다. 호주의 상징인 코알라 피해도 극심하다. 동작이 느리고 이동을 잘 하지 않는 특성 탓에 미처 불길을 피하지 못한 사체가 곳곳에서 발견되고 있다. 현지 언론은 화재로 코알라 서식지의 80%가 파괴됐다며 전체 개체수의 30% 이상은 이미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고 추정했다.
정부 비난 여론은 최고조에 달했다. 모리슨 총리는 산불이 확산되던 지난 연말 하와이로 가족여행을 떠나는 등 무책임한 태도로 일관, 피해를 키웠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최근에는 피해 지역을 찾았다가 주민들로부터 “썩 꺼져라” “당신은 이 곳에서 단 한 표도 얻지 못할 것” 등의 야유와 욕설을 듣고 돌아선 일도 있었다.
무엇보다 기후변화에 대한 늑장 대처를 규탄하는 목소리가 거세다. 전문가들은 40도를 넘나드는 이상고온과 강풍, 수 년째 이어져온 가뭄 등 지구온난화 여파를 대형 산불의 원인으로 지목하고 있다. 하지만 모리슨 총리는 제대로 된 이산화탄소 저감 정책을 내놓기는커녕 자국 석탄산업을 적극 옹호해 도마에 올랐다. 5일 “지구온난화로 인한 이상기후가 호주를 비롯한 각국에 영향을 주고 있다는 건 논쟁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라며 수습하기는 했지만 때늦은 해명이었다.
책임 소재를 떠나 호주 국민에겐 이 엄청난 불길이 언제 잡힐지가 최대 관심사다. 전망은 신통치 않다. 폭염과 강풍이 기존 산불의 확산을 부채질하고, 마른 벼락으로 인한 자연 발화도 연일 계속되고 있기 때문이다. 실제 NSW주 산불방재청은 현재 150건 이상의 산불이 진행 중이며 이 중 64건은 통제불능 상태라고 밝혔다. NSW주 내 팜불라 지역에서는 불씨와 연기가 얼마나 심각한지 대기가 전부 핏빛으로 뒤덮인 모습까지 포착됐다.
강유빈 기자 yubi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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