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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5℃] 신뢰의 경제적 가치

입력
2020.01.03 04:40
30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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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5℃는 한국일보 중견기자들이 너무 뜨겁지도 너무 차갑지도 않게, 사람의 온기로 써 내려가는 세상 이야기입니다.

게티이미지뱅크
게티이미지뱅크

저명 경제학자인 스티븐 레빗 미국 시카고대 교수의 베스트셀러 ‘괴짜경제학’(스티븐 더브너 공저)에는 오래 몸담았던 조사기관을 퇴직하고 베이글 무인판매 사업을 시작한 폴 펠드먼의 이야기가 나온다. 워싱턴의 140개 회사에 매일 아침 베이글과 수금 상자를 가져다 두고 점심시간에 돈과 남은 빵을 수거하는 게 그의 사업 방식이었다. 고객사 직원이 빵 또는 돈을 슬쩍 할 위험을 늘 감수하면서 그는 22년 경력의 전직 조사분석가다운 기질을 발휘했다. 베이글 대금 회수율을 다양한 조건에서 조사해 통계를 낸 것이다.

작은 회사일수록, 날씨가 좋을수록, 직원 사기가 높을수록, 그리고 지위가 낮을수록 빵값을 정직하게 치르더라는 흥미로운 결론 가운데도 특히 눈에 띄는 대목이 있었다. 10년가량 완만하지만 지속적으로 하락하던 회수율이 2001년 9ㆍ11 테러 직후 돌연 급등하더니 계속 그 수준을 유지했다는 사실이다. “펠드먼의 고객들이 새삼 애국심이나 정의감과 관련해 진지해졌거나 감정이입이 확산된 덕분일 수 있다”는 레빗의 해석까지 듣고 보면, 사회적 신뢰란 특정 개인이나 조직 간 관계를 넘어 보다 거시적 요인에 의해 형성(또는 훼손)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할 만하다.

경제학자들은 오래전부터 사회적 자본으로서 신뢰의 중요성을 강조해왔다. 신뢰가 경제 성장에 기여할 수 있다는 다수의 연구 결과가 대표적 사례(이하 고선 중앙대 교수 논문 참조)다. 이들 연구는 신뢰가 시장경제 체제에서 거래비용을 줄여 경제 효율성을 높인다고 강조한다. 거래 상대방의 약속 불이행 위험이 높으면 감독, 보험, 중개인 도입 등 안전장치 구축 비용이 들게 마련인데, 신뢰가 높은 사회라면 이런 거래비용을 줄여 경제 활동이 원활하게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구체적으로 △혈연ㆍ지연ㆍ학연 등에 얽매이지 않는 협업 증진 △불확실성 해소를 통한 투자 확대 △기업 설립ㆍ생산ㆍ거래를 둘러싼 규제 및 행정절차 간소화로 나타난다.

한 나라의 사회적 신뢰 수준은 정부에 대한 신뢰도에 크게 좌우된다는 점도 경제학자들이 대체로 동의하는 대목이다. 이는 자연스럽게 정부가 예측가능하고 믿을 만해야 국가경제 성장에 보탬이 된다는 논리로 이어진다. 최근 국내 논문을 살펴봐도 정부와 국회에 대한 신뢰도가 높을수록 국민소득과 고용률이 안정적 흐름을 보인다거나(김정훈ㆍ김기호), 정부 신뢰도 변동이 국가신용등급에 상당한 영향을 미친다(안지인ㆍ허인ㆍ오형나)는 등 이런 논리를 뒷받침하는 연구 결과를 쉽게 찾을 수 있다.

하지만 주지하듯 우리나라 국민들의 정부 신뢰도는 다른 나라에 비해 낮은 편이다.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신뢰도 지표인 세계가치관조사(WVS)에서 한국의 정부 신뢰도는 0.28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ㆍ평균 0.46) 회원국 가운데 5번째로 낮았다. 1위인 스위스(0.77)와 비교하면 매우 큰 격차다. 문재인 정부 들어 수 차례의 고강도 대책을 쏟아냈는데도 여전히 잡히지 않은 집값은 ‘저신뢰 정부’가 겪어야 할 숙명일지도 모른다. 박호정 고려대 교수는 정부의 부동산 조세정책을 연구한 최근 논문에서 “정부 정책의 비일관성은 신뢰에 부정적 영향을 미치면서 시장에서 복잡계(카오스)를 증대시킬 수 있다”고 지적했다. 정부 정책 불신이 시장 불안정을 키울 수 있다는 얘기다.

정부 신뢰도가 새삼 걱정되는 이유는 경제에 있어 정부의 역할이 지속적으로 커지는 추세이기 때문이다. 저출산ㆍ고령화 추세로 복지정책 수요가 빠른 속도로 늘어가는 상황에서 경기 하강까지 겹치면서 정부는 올해 512조원에 이르는 ‘슈퍼 예산’을 쏟아부을 채비를 하고 있다. 재정건전성 약화를 감수하며 투입되는 나랏돈이 막힘없이 나라 경제의 혈류를 타고 흐르려면 정책적 일관성과 신뢰 획득이 어느 때보다 필요하다. 경제학계에선 투명하고 촘촘한 제도, 공정한 기회 보장, 규제 완화 같은 것이 정부 신뢰도를 높이는데 중요하다고 입을 모은다.

이훈성 산업부 차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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