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종명의 차이나는 발품 기행] <30> 산시 ②시안 비림
시안 시내에서 ‘가볼 만한 곳’을 추천하라면 단연 비림(碑林)이다. 역사와 문화에 초점을 맞춘 여행이라면 말할 것도 없다. 한나라 시대부터 근대까지 4,000개에 이르는 비문, 1,000개가 넘는 비석을 일곱 군데로 나눠 전시실을 운영한다. 북위부터 송대에 이르는 석각 150건은 별도 예술관에 전시한다. 비림의 역사는 1,000년에 이른다. 당나라 때 세운 공묘가 성곽 남쪽에 있었다. 북송 철종 때인 1087년 공묘를 옮긴 자리가 현재 비림박물관으로 탈바꿈했다.
비림으로 들어가면 공묘 영성문(棂星门)이 보인다. 목(木)을 뺀 영성(灵星)은 하늘에서 농업을 관장하는 별, 천전성(天田星)이다. 한나라 고조가 황제에 오르고 영성에게 제례를 올렸다는 ‘후한서’ 기록이 있다. 송대에 이르러 제공(祭孔)이 곧 제천(祭天)이 됐다. 공묘 앞에 의젓한 고대 건축 양식으로 자리를 잡았다. 문 모양이 창살을 닮았다. 송대 유학자가 나무를 하나 붙이니 별이 창살로 변했다. 법가와 도가 중심의 한나라 초기 이념인 ‘황로(黃老ㆍ황제와 노자)’로부터 ‘유교’로 변모한 모양새다.
높은 벼슬을 상징하는 극문(戟门)이 나타난다. 문을 들어서면 서쪽에 국가급 보물인 대하석마(大夏石马)가 눈길을 사로잡는다. 머리와 몸통은 힘센 군마처럼 생겼다. 원석을 살려 세밀하게 앞다리와 뒷다리를 드러냈다. 꼬리 부분은 없다. 대하석마는 사마천의 ‘하본기’에 등장하는 하 왕조가 아니라, 십육국 시대 흉노족이 건국한 하나라(407~431ㆍ胡夏) 시대 보물이다. 417년 장안(지금의 시안)을 점령한 후 석마를 세우고 424년을 뜻하는 ‘대하진흥육년(大夏真兴六年)’ 등을 기록했다. 하나라가 남긴 유일한 문자다. 대하는 단명했다. 먼 친척뻘인 선비족이 세운 북위에 멸망한다.
문 동쪽에도 구색을 갖춰 국가급 보물이 있다. ‘천하제일 명종’이라 불리는 당경운종(唐景云钟)이다. 당 예종 경운 2년인 711년에 제작해 장안성 종루를 차지했던 종이다. 청동으로 주조했으며 무게 6톤에 높이 247cm다. 3층으로 구분하고 원둘레를 6등분해 모두 18개 격자가 생겼다. 하늘ㆍ용ㆍ학ㆍ사자ㆍ봉황ㆍ주작ㆍ소가 등장하며 네 귀퉁이에는 구름을 그려 미적 감각을 보탰다. 8개는 모두 엑스(Ⅹ) 자로 나눠 젖꼭지처럼 ‘종꼭지’를 볼록하게 4개씩 붙였다. 정면 아래 격자에 292개 문자도 있다. 황제가 직접 선정한 문자다. 역경(易經)을 인용하고 만물 변화에 따른 도가 사상을 담았다. 심오한 사상이나 생김새보다 종소리가 더 궁금한데, 한때 중앙인민라디오방송국에서 ‘제야의 종소리’로 사용했다.
안으로 더 들어가야 비림이다. 나무와 비슷한 높이로 반듯한 효경정(孝经亭)이 나타난다. 높이 620cm, 너비 120cm인 석대효경(石台孝经)을 보관하는 정자다. 3층 석대가 떠받치고 있는 네모형 비석이다. 윗부분에는 당 현종이 지정한 제목을 태자가 전서체로 썼다. 본문은 예서체다. ‘효경’은 효도와 공경에 관한 내용이다. 제자 증참이 공자와의 대화를 기술했다고 알려졌다. 현종은 초기에 내치와 외치에 성공한 황제로 태평천하를 열었다. 양옥환은 현종의 며느리였고 여도사로 출가했다 5년 만에 환속한다. ‘효심 가득한 후손이 되어야 하는’ 비석이 완성된 745년, 귀비 책봉도 마무리했다. 당나라 시인 백거이가 취중에 그려낸 비련의 서사시 ‘장한가’에 등장하는 주인공, 4대 미인 양귀비가 무대에 올랐다.
비림박물관으로 들어가면 전시실마다 돌이 풍년이다. 광물 집합체가 사랑받는 유물로 탄생했다. 역사로 화장했기 때문이다. 인간적 사상과 감성이 풍부한 덕분이다. 유리로 가렸거나 맨살을 드러낸 국보급 비석을 보면 눈이 즐겁다. 개성석경(开成石经)에는 유교 경전 12권을 쏟아부었다. 114개 비석에 65만 자를 깎은 대형 프로젝트다. 개성은 당나라 문종의 연호다.
청나라 황제도 모방했다. 유교 경전 13권, 190개 비석, 63만 자다. 건륭석경이라 부른다. 베이징 공묘 옆에 자리 잡고 있다. 최고학부 국자감으로 이동하는 복도에 세웠다. 여름에 가면 시원하고 겨울에 가면 따뜻해 한참 머무른다. 황제의 결심이 많은 사람을 오랫동안 고생시켰다는 생각이 든다. 명필을 감상하는 행복은 덤이다.
전시실을 다 둘러보려면 도시락 싸 들고 가야 한다. 모두 볼 수 없다면 서예 작품이 많은 전시실이 최고다. 송나라 4대 서예가 중 소식ㆍ황정견ㆍ미불을 만날 수 있다. 소식과 미불의 진품 필체도 탁월하지만, 황정견시첩(黄庭坚诗帖)이 최고 인기 상품이다. 다섯 부분으로 나눠 새긴 칠언율시가 가지런하다. 마침 탁본을 뜨고 있다. 백지를 붙이고 먹물을 묻혀 부드럽게 친다. 볼 화장 하듯 살살 톡톡톡, 수없이 반복한다. 도무지 언제 끝날지 알 수 없다. 작품을 집으로 가져갈 수 있다. 대략 450위안, 7만5,000원 정도다. 청나라 9대 황제인 함풍제 시대 석각으로 행서체가 아주 아름답다. 다만 황정견 작품으로 추정되며 위작이라는 소문도 있다. 비교적 저렴한 이유다.
조맹부팔찰(赵孟頫八札)도 있다. 원나라 최고 서예가이자 학자인 조맹부가 친구와 친척에게 보낸 편지로, 청나라 말기에 비석으로 만들었다. 글자체가 다양할뿐만 아니라, 여덟 개나 되는 묵직한 돌판에 거침없이 써 내려간 행초서가 생동감 넘친다. 화가이기도 한 조맹부는 오랫동안 재상을 역임했다. 몽골족 피가 흐르는 고려 충선왕과 인연이 깊다. 황족으로 태어나 재상을 역임한 조맹부는 쿠빌라이를 비롯해 황실로부터 총애를 받았다. 한족은 최하층 취급을 받던 시대였다. 몽골족 수도에 살던 고려 왕과 원나라 지배를 받는 한족 학자, 둘은 코드가 잘 맞았을지도 모르겠다.
낯선 공자상이 하나 있다. 당나라 화가 오도자의 공자행교도(孔子行教图)는 공자 그림의 전형이다. 두 손을 가지런히 맞잡고 예의 바르게 서 있는 자세다. 공자 사당을 가면 예외 없이 석상이나 화폭으로 등장한다. 취푸의 공묘, 난징의 부자묘, 베이징의 공묘, 핑야오와 젠수이의 문묘 등 공자를 만났던 장소에 어김없이 나타났다. 공손해 보이는 모습이 경전에서나 있을 법해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비림의 공자상은 좀 인간적이다. 강희제의 열입곱째 황자(皇子)인 애신각라윤예(愛新覺羅允禮)가 그린 작품이다. 상반신이 의젓한 노인을 닮았고 노익장까지 풍긴다. 불화를 잘 그렸던 오도자 관음상이 옆에서 지켜보고 있다.
탁본하기 좋은 그림으로 괴성점두도(魁星点头图)가 있다. 미리 탁본한 그림을 판다. 그만큼 중국인이 좋아한다. 청나라 10대 동치제 시대 섬감총독(陕甘总督)을 역임한 마덕소가 그렸다. 쓰촨 출신이라 이름 앞에 서촉(西蜀)이라 기재했다. 괴성은 과거급제를 상징한다. 두(头)는 1등이나 수석이다. 시경ㆍ서경ㆍ예경ㆍ역경ㆍ춘추 등 오경에 뛰어난 인재를 말한다. 괴성은 문장을 관장하는 신이며 동서남북 28개 별자리 중 하나로 서방에 위치한다. 신화이자 상징이다.
‘바른 마음으로 수신, 극기해 예로 돌아간다’는 정심수신(正心修身)과 극기복례(克己复礼) 8자를 복합해 괴성을 의인화했다. 붓과 벼루를 들고 있다. 눈썰미가 원더우먼 아니면 자세히 해체해도 분간이 어렵다. 전설 속 캐릭터인 ‘자라’를 밟고 있다. 자라 오(鳌)를 쓴 이유다. 공부하는 아이를 둔 부모는 집에 하나씩 걸어두면 좋다. 과거를 준비하는 학생은 괴성을 꿈꾼다. 과거 시험장을 공원(贡院)이라 부른다. 2006년 난징의 강남공원에서 처음 괴성을 보고 기이하다 생각했다. 이유를 알면 괴성이 한결 정겹고 친근해진다.
돌 위에 아로새긴 문화를 읽으면 역사가 보인다. 청나라 강희제가 쓴 영정치원(宁静致远)은 서한 시대 유안의 ‘회남자’와 제갈량의 ‘계자서’에 등장한다. 첫 글자가 하얗게 칠해져 보이지 않아도 역사 책을 열면 금방 찾는다. 북송 서예가이자 화가인 미불이 행서로 휘날려 쓴 작품은 한 칸만 남기고 모두 숨었다. 당나라 시인 임관의 작품인 성시석후왕춘궁(省试腊后望春宫)이다. 청나라 초기 풍전대사가 그린 달마동도도(达摩东渡图)와 달마면벽도(达摩面壁图)가 마치 한쌍처럼 서있다. 관중팔경의 하나인 태백전도(太白全图)는 1700년 청나라 화가 가립이 그렸다.
돌이 곧 역사책이다. 읽고 또 읽어도 끊임없이 이야기를 하자고 덤빈다. 온종일 머물러도 지겹지 않다. 10%도 보지 못한 듯하다. 이제 돌아간다. 옆집 가듯 다시 또 가면 된다. 문득 뒤통수를 잡아끄는 느낌이다. 정자에 걸린 비림(碑林) 편액에 시선을 멈춘다. 효경에 정신이 팔려 눈 밖에 났던 까닭이다. 자세히 보니 비(碑) 자 오른쪽 위에 삐침이 없다. 어느 사전이나 족보에도 없는 글자 ‘𥓓’가 됐다. 오타(?)의 주인공은 임칙서다. 청나라 말기 아편을 엄금할 것을 진언해 1839년 흠차대신(欽差大臣)으로 발탁됐다. 아편을 모조리 몰수하고 영국인을 추방했다. 영국은 아편전쟁을 일으켰고 유약한 청나라는 강화를 맺었다.
임칙서는 관직을 박탈당한 후 신장위구르 지역까지 유배됐다. 시안을 지나 실크로드를 거쳤다. 다시 돌아와 나머지 삐침을 찍겠다는 의지였다는 전설이 퍼졌다. 머리에 썼던 관모가 떨어진 비통함을 비유했다고도 했다. 명나라 장성 서쪽 끝 자위관을 나서며 16행에 이르는 칠언율시 출가욕관감부(出嘉峪关感赋)를 남겼다. 자위관 현벽장성의 실크로드 조각상 아래 사주고도(丝绸古道)에 임칙서가 그린 비분강개가 생생하게 기록돼 있다. 단 한 글자도 오기는 없다.
‘생략’을 버젓이 비림에 남겨둔 이유는 무얼까? 비림 안에 답이 있다. 비림 석각을 자세히 분석했더니 삐침 없는 글자가 많았다고 한다. 당나라 서예가 안진경의 작품 다보탑비(多宝塔碑)와 안근예비(颜勤礼碑)의 비(碑) 자에 모두 삐침이 없다. 당나라 서예가 유공권의 작품 현비탑비(玄秘塔碑)도 마찬가지다. 서예를 아는 사람들 사이에서 ‘안진경을 모르면 간첩’이다. 명필이 두 번이나 오점을 남길 리 없다. 당나라 때는 삐침 없는 글자가 상용이었다. 갑골문ㆍ금문ㆍ대전ㆍ소전은 물론이고 전ㆍ예ㆍ해ㆍ행ㆍ초 모두 대동소이하다. 사전 데이타베이스 한전(漢典)을 찾아 보니 강희자전(康熙字典)에도 버리지 않고 기록하고 있다.
비림을 나와 동쪽으로 1.5km, 다시 북쪽으로 800m를 걸으면 사대문 중 동문이 나온다. 장락문(长乐门)으로 들어가 옹성 계단을 따라 성벽으로 오른다. 높이 올라오니 도시가 다 드러난다. 잠시 역사 속 장안성을 새겨본다. 하늘이 맑은 날 성벽에 오르면 확 트인 공간이 옛 시간으로 후다닥 뛰어가게 한다. 아쉽지만 당시 ‘세계 최고 도시’ 장안의 모습은 남지 않았다. 지금 성벽은 명나라 때 건축했다. ‘수도 장안’이 아니었기에 그나마 13km가 조금 넘는 거리다. 자전거도 빌려준다. 자전거로 한 바퀴 돌아도, 그냥 터벅터벅 걸어도 좋다.
남문으로 내려가 북쪽으로 1km 정도 걸으면 시안 중심 종루에 이른다. 2006년 5월 처음 공항에서 버스를 타고 시안 시내로 들어올 때 기억이 난다. 드라마 세트인 줄 알았다. 당나라 시대 영화가 그대로 존재하는 듯 감동했다. 옛 향기 가득한 성벽, 고풍스러운 건물은 백화점과 식당과 호텔이었다. 여행으로 많이 찾지만, 시안을 제대로 만끽하려면 한 달로도 부족하다.
야간 조명에 종루가 불타기 시작한다. 명나라 만력제 시대 1582년에 지금 자리에 위치했다. 거의 440년 세월, 변함없이 웅장하다. 종소리는 성문을 여는 신호였다. 사대문 모두 들리도록 울렸다. 지금은 입장료 35위안을 받는 효자 유물이다. 사거리 가운데에 자리 잡았기에 신호도 없다. 차량은 그저 물 흐르듯 지나친다. 물론 퇴근 시간에는 지옥이다. 역사 유적이 가득한 고도 ‘장안’을 배우려면 ‘입시 지옥’을 치를 각오가 필요하다. 그냥 놀러갈 사람은 실망할 필요 없다.
최종명 중국문화여행 작가 pine@youyue.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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