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금 당겨서 정동진 해돋이를 보고 왔습니다. 한동안 하늘과 바다를 신비롭게 물들이기 시작하더니 바다 위로 쓱 올라오며 넘실넘실 떠오른 해는 지금까지 보아왔던 그 어떤 모습보다도 크고 아름다웠으며 지난해를 돌아보고 찾아온 2020년을 맞이하는 마음가짐을 다시 다져볼 만큼 충분하게 신비로웠습니다. 어제와 오늘 내일은 이어져 있으나 의미는 남달라, 그 순간부터 희망을 담은 미래 시계가 작동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씨앗도 그러합니다. 씨앗은 지난 한 해 동안, 식물들이 초록 잎을 펼쳐 경쟁하며 양분을 만들어 내고 꽃을 피워 꽃가루받이를 성사시키는 등 지난한 수고의 최종 목표가 튼실한 씨앗을 만들어 내는 일이었습니다. 새해가 되고 나니 이젠 그 씨앗들이 싹을 틔우고 어떻게 성장할 것인지에 더욱 관심이 갑니다.
지금 대부분의 씨앗은 휴면(休眠)의 상태에 있습니다. 동물로 치자면 겨울잠을 자고 있는 것이지요. 씨앗들이 자체 수분을 5-15%까지 빼 건조한 상태를 유지하고 단단한 씨앗 껍질을 가지면서 휴면을 하는 이유는 우리의 추운 겨울처럼 모진 환경을 피해 살기에 적절한 때를 기다리고자, 퍼져나가는 시간을 벌고자, 발아에 시간차를 두어 한 식물에서 만들어진 씨앗끼리의 경쟁을 하고자 하는 등 다양합니다. 휴면의 기간은 각기 다양해서 수개월, 수십 년 혹은 2,000년 만에 발견되어도 여전히 발아력을 유지한 연꽃과 같은 경우도 있습니다.
휴면을 깨는 일에는 여러 조건이 따르기도 하는데 미나리아재비과 식물들은 –5℃ 이하의 조건을 거쳐야 하고, 여러 호주의 토종 식물들은 산불과 같은 뜨거운 온도에서 껍질에 물리적 손상을 입어야 하기도 하며, 일부 숲의 식물들은 숲속에 볕이 드는 상태가 되어야 한다고 합니다.
휴면이 깨지면 발아(發芽)를 합니다. 먼저 씨앗에 물이 흡수되고 껍질은 불어 벌어지며 효소들이 활성화되어 RNA 단백질 등을 합성하면서 대사가 활발해지고, 씨앗에 저장되었던 양분들이 이용하기 좋은 상태로 바뀌어 생장을 유도합니다. 어린 뿌리와 떡잎이 자라 스스로 광합성을 통해 양분을 만들고 수분을 흡수할 수 있는 상태가 되면 발아는 끝이 납니다. 씨앗에서 독립된 하나의 새로운 개체로 커나가는 순간입니다.
혹시 지난해가 씨앗의 휴면처럼 딱딱하고 건조한 껍질에 갇혀 성장을 멈추고 있었던 시간이었을지도, 수많은 어려움으로 그 휴면을 타파하는 데 곤란을 겪고 있는 시간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길었던 겨울이 발아를 위한 필수적인 저온이었다고, 불에 덴 듯 호되게 겪었던 세상이 보여준 뜨거운 맛들은 단단하게 갇혔던 씨앗의 껍질을 깨듯 내 자아의 틀을 열어 주었다고 생각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때가 되었는데도 저절로 극복이 어렵다면 우리가 새봄에 씨앗을 심기 전에 냉장고에 잠시 넣어 저온 처리를 하거나 피나무처럼 딱딱한 껍질을 가진 것에는 물리적으로 상처를 내어 주고 심듯이 적극적으로 우리의 휴면을 타파할 수 있는 방법을 찾아보는 것도 이 새해 아침 우리가 결심할 수 있는 일의 하나입니다. 마침내 작은 씨앗이 싹을 틔워 큰 나무로 커나가듯, 우리에게도 아름답게 성장하는 반짝반짝 빛나는 초록빛 미래가 가까이 와 있다고 믿고 싶습니다. 그런 새해가 여러분의 것이기를 기원합니다.
이유미 국립수목원장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