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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2막] 35년 법관 경험을 3분 영상에… “이젠 유튜버 차산선생이라 불러주세요”

입력
2020.01.01 04:40
수정
2020.01.01 10:05
21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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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관 출신 유튜버 박일환

2012년 대법관 퇴임 이후

딸 권유로 2018년 도전

생활밀착형 법률 ‘꿀팁’ 전달

구독자 4만명 폭풍 성장

“많은 사람과 재밌게 소통하며

구독자 10만명 돌파가 꿈”

[저작권 한국일보] 유튜버로 활동한 지 1년이 된 박일환 전 대법관은 최근까지도 카메라를 고정하는 삼각대 다리를 조절하지 못해 쩔쩔맸다. 배우한 기자
[저작권 한국일보] 유튜버로 활동한 지 1년이 된 박일환 전 대법관은 최근까지도 카메라를 고정하는 삼각대 다리를 조절하지 못해 쩔쩔맸다. 배우한 기자

“처음에는 휴대폰을 고정해 세우는 삼각대도 어떻게 사용하는지 몰라서 안절부절 못했습니다. 삼각대 다리가 길게 내려오는 것도 최근에서야 알게 됐어요. 그 동안은 그냥 짧은 채로 사용한 거죠.”

그 흔한 책상이나 조명도 없다. 단지 휴대폰과 삼각대, 그리고 손에 든 종이가 전부다. 집의 거실 벽을 배경 삼아 의자 하나만 가져다 놓으면 그뿐. 지난 4일 서울 송파구의 자택에서 만난 박일환(68) 전 대법관의 동영상 촬영 준비는 이처럼 단출했다. 거실이 촬영 스튜디오인 셈이다. 그는 이제 막 ‘초짜’ 딱지를 떼려는 1년차 ‘유튜버’다.

그는 현재 구독자 4만여명을 둔 ‘차산선생 법률상식’을 운영하고 있다. 차산(此山)은 그의 조부가 지어준 호다. 지난해 12월 첫 영상을 띄운 이후 요즘에는 주로 직장인들이 들으면 좋을 만한 생활밀착형 법률 ‘꿀팁’을 전하고 있다. 20, 30대 젊은 구독자들이 거의 100%인 이유다.

일주일에 한 번 동영상을 촬영한다는 박 전 대법관. “시간이 많을 것 같다고요? 아닙니다. 주제를 선정하는 것부터 쉽지가 않아요. 요즘 젊은이들에겐 예전 판례들이 관심 밖이니까요. 콘텐츠로 활용할 사례가 그리 많지 않아 고민이 깊습니다.”

최고 조력자는 가족…초짜 유튜버의 좌충우돌 성장기

박 전 대법관의 동영상은 보통 2~4분 내외로 매우 짧은 편이다. 하지만 짧다고 편하게 녹화를 하는 건 아니다. 준비 기간만 일주일이 꼬박 걸릴 때가 대부분이다. 주제 선정 때문이다. 더 자주 동영상을 올리고 싶어도 못하는 이유다. 그는 “젊은 사람들이 관심 있을 만한 최신 이슈나 사건 등에 포커스를 맞추다 보니 사례를 찾기가 만만치 않다”고 말했다.

처음에는 ‘대법원 판례집’이나 ‘민사재판의 제문제’ 등에 기재된, 예전 화제가 됐던 사건들의 뒷이야기 등 세세한 사례를 들려주려 했다. 하지만 지금은 없어진 용어가 수시로 등장하는, 대중적이지 않은 판례는 큰 의미가 없었다. “1997년 외환위기(IMF)가 닥쳤을 때 흔히 쓰였던 ‘약속어음’ 같은 단어는 이제 없어졌잖아요. 그러니 요즘 시대와는 맞지 않죠.”

낡은 노트와 손때 묻은 A4용지 뭉치가 그의 아이디어 사전이다. 노트에 빼곡히 적힌 내용과 스크랩해 놓은 기사들은 지난 35년간 법관 생활이 녹아 든 재산들이다. 박 전 대법관은 자신이 경험한 사건들 중에서 현재와 맞닿아 있는 사례를 찾곤 한다. 최근에는 정보기술(IT) 산업이나 한류 등이 부흥하면서 지적재산권 같은 분야에 관심이 많아졌다. 1998년 특허법원 설립과 함께 재판부를 맡으며 지적재산권 등의 특허소송에서 전문성을 발휘했던 시절이 밑거름이다.

유튜브를 권했던 박 전 대법관의 딸도 훈수를 뒀다. 딸의 첫 주문이 “3분 내로 짧게” 였다. “방대한 법률 지식을 길게 말하면 누가 알아들을 수 있을까”라는 딸의 말에 박 전 대법관은 수긍했다. “법정에서 변호하는 것도 5분이면 길다고 합니다. 그러니 보통 유튜버들처럼 10분을 할 수 없겠더군요.”

편집도 아예 딸에게 맡겼다. 법률을 아는 사람이 아니라 일반인들에게 이해가 돼야 하기 때문이다. 전문적인 법률 용어나 단어는 어려우니 법에 대해선 비전문가인 딸이 자막을 입히는 게 낫겠다 싶어서다. 인터뷰를 진행한 날도 딸이 보내준 편집 영상(‘법관에게 주 52시간 근무제란?’)을 보던 박 전 대법관은 “원래는 3분이 훨씬 넘는 영상이었는데, 2분대로 더 짧아졌다”며 멋쩍어했다.

박일환 전 대법관의 유튜브 동영상을 보면 화면 각도가 잘 맞지 않는다. 자막이 턱에 걸릴 정도로 구도를 맞추지 못할 때(맨 마지막 사진)가 많다. 각도가 잘 맞는 화면(맨 위 사진)은 아내가 도와준 덕분이다. 유튜브 동영상 캡처
박일환 전 대법관의 유튜브 동영상을 보면 화면 각도가 잘 맞지 않는다. 자막이 턱에 걸릴 정도로 구도를 맞추지 못할 때(맨 마지막 사진)가 많다. 각도가 잘 맞는 화면(맨 위 사진)은 아내가 도와준 덕분이다. 유튜브 동영상 캡처

딸을 포함해 가족들은 든든한 후원자다. 손녀도 한몫 한다. 박 전 대법관의 초창기 영상에는 귀여운 꼬마 숙녀의 화면이 대문으로 걸려 있을 때가 많았다. 발레복을 입고 멋들어지게 한 바퀴 턴을 하면서 “우리 할배 사랑해주세요”라고 말하는 손녀의 모습이 담긴 오프닝 영상에서 그의 ‘손녀 사랑’을 엿볼 수 있다.

아내 문성옥씨도 영상 제작에 큰 도움을 주고 있다. 일단 화면이 반듯하게 구도가 맞는 건 열에 아홉은 아내의 손길을 거친 영상이다. 반면 콧구멍이 보일 정도로 카메라가 밑에 있거나, 목은 안 잡히고 얼굴만 간신히 보이는 영상은 십중팔구 그가 혼자 구도를 잡고 촬영한 것이다. 자막을 입히면 턱이 잘려나가게 보이는 화면도 부지기수다. 거의 혼자서 휴대폰을 삼각대에 끼워 촬영하다 보니, 아내가 집에 있는 날과 없는 날이 이렇게 차이가 난다.

이날 인터뷰 사진을 촬영할 때도 아내 문씨는 동분서주했다. 구글에서 만들어줬다는 ‘차산선생 법률상식’ 간판을 벽에 테이프로 붙이거나 꽃으로도 장식하며 남편의 사진이 멋지게 나오도록 애썼다. 유튜브 초기에 영상이 시커멓게 나온다는 독자들의 댓글이 달리자 곧바로 LED 스탠드를 설치해 놓기도 했다. 문씨는 “오랜 공직 생활을 접고 무료했을 남편에게 유튜브는 삶의 활력소가 됐다”며 “남편이 더 건강해진 것 같아 보기 좋다”고 말했다.

“구독자 10만명을 꿈 꿉니다”

박 전 대법관이 많은 관심을 받은 건 지난 7월 구글이 법률이나 의료, 금융 등 전문가 유튜버들을 소개하면서부터다. 이때 구독자 수도 깜짝 올랐다. 며칠 새 1만여명에 가까운 구독자가 몰렸고, 언론의 인터뷰 요청도 쇄도했다. 처음에는 큰 욕심 없이 그저 “1인 방송하는 것이겠거니” 했던 마음을 다잡는 계기가 됐다.

“독자들이 늘고 콘텐츠 조회수가 올라가는 걸 보니 기분이 너무 좋더군요. 하루 종일 휴대폰을 손에서 놓지 못하고 조회수나 댓글을 확인하기 시작했어요. 지금도 (자신의 휴대폰을 보여주며) 구독 평균 연령대 등을 수시로 확인하는 게 습관이 됐습니다.”

하지만 “봉사활동 한다”는 초심만은 변함이 없다. 그의 동영상에는 광고가 없다. 애초에 시작할 때부터 광고는 하지 않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니 수익은 ‘0’이다. 주변에선 “구독자가 4만명이나 된다는데 돈이 좀 되느냐”는 질문을 곧잘 한단다. 100만명이 넘는 구독자를 거느린 유명 유튜버들의 수입이 연일 언론에 공개되면서 친구들이나 지인들 역시 그의 수익이 궁금한 모양이다.

그는 돈보다는 60대 동년배 구독자들이 많아졌으면 한다. 시청 연령대 통계가 나온 그래프를 보여주면서 박 전 대법관은 “60대는 아예 없다고 나온다”며 해당 수치를 가리켰다. “친구들에게 아무리 보라고 해도 잘 안 봅니다. 그들이 들어오면 더 많은 구독자들이 생길 것 같은데 말이죠. 제 유튜브가 젊은 층과 중·장년 세대가 함께 소통할 수 있는 공간이 되었으면 합니다.”

[저작권 한국일보] 박일환 전 대법관은 ‘대법원 판례집’이나 ‘민사재판의 제문제’ 같은 전문 서적에서 요새 젊은이들과 소통할 만한 주제를 찾는 건 참 쉽지 않다고 말했다. 배우한 기자
[저작권 한국일보] 박일환 전 대법관은 ‘대법원 판례집’이나 ‘민사재판의 제문제’ 같은 전문 서적에서 요새 젊은이들과 소통할 만한 주제를 찾는 건 참 쉽지 않다고 말했다. 배우한 기자

장관급 예우를 받았던 전직 대법관이 매일 유튜브 동영상의 조회수를 확인하는 모습은 언뜻 상상하기 어렵다. 권위를 내려놓고 마음을 열어야 가능한 일이다. 1978년 서울민사지방법원 판사를 시작으로, 92년 서울지방법원 의정부지원 부장판사, 98년 특허법원 부장판사 등을 거쳐 2006년부터 2012년까지 대법원 대법관으로 일했지만, 그는 권위적이지 않으려고 애썼다. 그의 인품은 2012년 퇴임 전 대법원장 하마평에 오르내릴 때도 변함 없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때 (대법원장이) 되지 않은 게 다행인 것 같아요. 안 그랬으면 유튜브를 못했을 테니까요(웃음).”

유튜브가 삶의 일부가 될수록 그는 “욕심이 생긴다”고 했다. 구독자들이 더 많아져 함께 개인 신상도 편하게 이야기하는 시간이 왔으면 한다. 예전 자신의 젊은 시절 모습이나 추억의 장소를 담아 공개하고 싶은 마음도 있다. “그러려면 요새 젊은이들처럼 영상을 편집하거나 화면을 돋보이게 하는 기술이 있어야 한다”는 박 전 대법관은 독자들과 좀 더 가까워지는 계기를 손꼽아 기다리는 듯 보였다.

박 전 대법관에게 앞으로 법률가가 아닌 유튜버로서의 계획을 물었다. 답변을 들어보니 ‘천생’ 유튜버다. “구독자 10만명을 돌파하는 게 꿈입니다. 1만명만 넘어도 좋겠다고 했던 때가 있었지만, 이제는 꿈을 더 크게 가져보려고 해요. 많은 사람들과 소통하며 더 재미있게 살아보고 싶어요. 많은 이들이 법률상식을 늘리는 데도 보탬이 되고 싶습니다.”

박 전 대법관의 유튜브 영상 ‘진실을 밝히기 위한 비밀 녹음 정당한가?(조회수 3만7,000건)’, ‘농담으로 한 회사 그만 둘래 발언 후 퇴직 발령?(3만5,000건)’, ‘부모의 빚(2만4,000건)’, ‘부동산 매매계약 후 해지 시 알아둬야 할 점(1만1,000건)’ 등은 꾸준한 인기를 끌고 있다.

강은영 기자 kis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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