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한 해를 단어나 글자로 뭉뚱그려 돌아보는 풍습에는 동서가 따로 없다. 해마다 ‘올해의 단어’를 선정하는 영국 옥스퍼드 사전은 2019년을 상징하는 단어로 ‘기후 비상(climate emergency)’을 꼽았다. 기후변화가 ‘지구온난화’ ‘기후위기’를 넘어 비상조치가 필요한 심각한 사태에 이르렀다는 점을 부각시킨다. 미국 온라인사전 딕셔너리닷컴이 선정한 ‘실존적인(existential)’ 역시 기후변화와 무관치 않다. 잇따른 자연재해로 인간 존재 자체가 위협받는 사정을 반영한 것이다.
□ 한자문화권에서는 10년쯤 전부터 ‘올해의 한자’가 유행이다. 한중일, 대만, 홍콩은 물론 중국계가 많은 싱가포르, 말레이시아에도 같은 풍습이 있다. 일본한자능력검정협회가 뽑은 ‘올해의 한자’는 ‘령(令)’이다. 새 일왕 연호 글자인 데다 소비세법 개정이나 재난 경보 발령이 잦았던 사실과 무관치 않다. 말레이시아에서 중국계 단체가 고른 한자는 ‘편(騙)’이다. 총리직 이양 말바꾸기 등 정권이 국민을 속였다는 민심이 담겼다.
□ 대만 유력지 연합보는 ‘란(亂)’을, 싱가포르 연합조보는 ‘항(港)’을 올해의 한자로 골랐다. 대만의 경우 국내 혼란도 많았지만 홍콩 시위까지 감안한 것이고, 싱가포르는 글자 그대로 홍콩 사태를 키워드로 봤다. 홍콩의 아주주간은 ‘파(破)’를 고르며 “일국양제가 약해지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홍콩 사태의 당사자인 중국의 국가언어자원관측연구센터 등이 고른 글자는 ‘온(穩)’이었다. 어떤 외풍에도 당황하지 않고 안정 속에 전진했다는 의미라니 낯설기 짝이 없다.
□ 국내에서는 교수신문이 고른 사자성어가 ‘올해의 한자’를 대신한다. 2019년은 사회 갈등을 상징하는 ‘공명지조(共命之鳥ㆍ머리가 둘인 새)’다. 사자성어는 의미는 또렷하지만 잘 쓰지 않는 말이어서 대중성이 떨어진다. 올 한 해 우리 사회를 표현할 한 글자는 어떤 것이 좋을까. 긍정적 의미를 담아 돌아보면 ‘혁(革)’도 어울릴 듯하다. 금석문에서 혁은 두 손으로 동물 가죽을 벗겨내는 형상이다. 선거법 등 패스트트랙 법안 통과의 기운을 이어받아 사회를 더 환골탈태시키는 새로운 한 해가 되기를 기원해 본다.
김범수 논설위원 bskim@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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