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정치는 건국 초기에 연방주의와 공화주의가 날카롭게 대립했다. 1800년 대선, 연방주의자인 애덤스 대통령과 공화주의자 제퍼슨의 경쟁에서 그들은 상대를 정치에서 완전히 배제하고자 했다. 양 진영이 영구적 승리를 추구하는 살벌한 분위기가 사라지기까지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르면서 배제의 정치에 대한 우려가 높아지고 새로운 세대의 정치인들이 등장하면서 정쟁의 위험이 낮아지기 시작했다. 시기적으로는 독립전쟁 이후 경쟁자가 반드시 적이 아니라는 생각이 미국정치를 지배했다. 그러나 노예제를 둘러싼 정치 양극화는 아직 완전히 성숙지 못한 상호 관용의 싹을 짓밟았고, 남북전쟁 세대가 점차 역사 속으로 사라지면서 민주당과 공화당은 공생하는 방법을 깨닫기 시작했다. 미국에서는 인종차별이라는 거대한 장벽이 적대적 정치를 강화했으나 이 논의가 사라지면서 관용이 정치 규범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어떻게 민주주의는 무너지는가’). 미국정치를 다소 장황하게 언급한 것은 미국도 처음부터 관용과 상호 배려의 정치가 자리 잡은 것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정부 수립 후 70여년이 흘렀다. 짧지 않은 세월이지만 미국 건국의 아버지들이 수정헌법을 제정한 이후 100년 가까이 걸려서 상호적대의 정치가 해소된 것에 비하면 그리 실망할 것도 아니다. 그러나 박근혜 탄핵 이후 문재인 정권이 출범하고 기회의 평등과 공정한 과정, 정의로운 결과에 대한 시민들의 기대는 무너졌다.
1980년대 무자비한 군사독재에 저항했던 세대가 집권세력이 되어 실질적으로 개혁을 펼칠 수 있는 자리에 있는 현재 그들은 국민의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다. 권력을 차지했다는 자만감과 도덕적 우월감에서 비롯된 무리한 행태가 그들을 옥죄고 있다. 아직 예단할 수는 없지만 이른바 하명수사 의혹과 지난 지방선거 개입 의혹, 유재수 감찰 무마 의혹 등은 권력 핵심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한 의구심을 증폭시키고 있다. 이에 더해 여전히 탄핵 반대에 반성하지 않고, 극단적인 주장과 구호를 쏟아내는 수구ㆍ극우 세력과 선을 긋지 못하는 제1야당의 강경 일변도의 투쟁이 한국 의회주의의 발목을 잡고 있다.
한국정치의 현주소는 강 대 강의 구조다. 적대적 공생의 구도로만도 설명되지 않는 배제와 극단의 진영정치가 한국정치를 지배하고 있다. 이러한 구성인자를 벗겨내려면 선거 때마다 등장하는 진부한 ‘물갈이’로는 되지 않는다. 정치가 정상으로 작동되기 위해선 국회의원의 특권을 없애기 위한 제도개혁부터 서둘러야 한다.
국민의 대표로서 일한다는 당당함과 국민의 대의기구라는 소명의식으로 무장된 이들이 국회에 진출한다면 지금의 극단의 정치는 사라질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국회의원이 ‘권력이 아닌 정당한 권한’을 가진 기구이어야 한다. 유럽의 일부 국가처럼 시민의 대표로서 일한다는 자존감이 필요하다. 국회의원에 당선되면 이를 유지하기 위해 수단ㆍ방법을 가리지 않고 집착하는 구조에서 ‘정치’를 기대할 순 없다. 준연동형 비례대표제 도입이 한국정치를 바꿀 수 없다. 연동형 비례대표 제도의 취지와 거리가 멀 뿐만 아니라, 비례대표 후보 공천에서부터 정당성을 담보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미국도 오랜 세월이 걸렸다.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을 것이다. 적어도 정치의 경쟁자를 적으로 인식하지 않는 인식의 변화가 필요하다. 적대적 언어와 상식을 벗어나는 정치적 수사가 인지도를 높이는 정치 커뮤니케이션의 구조도 바꿀 필요가 있다. 언론이 정치개혁에 동참해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기득권 구조를 바꾸지 않으면 국회의원의 특권과 각종 지원에 대한 미련 때문에 사생결단의 정치가 될 수밖에 없다. 국회의원이 특권을 누리는 자리가 아니라는 인식이 생긴다면 소명의식을 가진 이들이 정치를 할 것이고, 제도개혁의 단초가 열릴 것이다. 그런 후에야 관용과 협치를 논할 수 있다.
최창렬 용인대 통일대학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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