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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그게 무슨 혁신이냐?

입력
2019.12.31 04:40
29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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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법한 고리 사채를 양성화하여 중금리 금융으로 끌어안을 수 있다면, 많은 기업에 유동성의 활로를 열어주는 동시에 다수 경제범죄를 예방하거나 추적 적발할 수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위법한 고리 사채를 양성화하여 중금리 금융으로 끌어안을 수 있다면, 많은 기업에 유동성의 활로를 열어주는 동시에 다수 경제범죄를 예방하거나 추적 적발할 수 있다. ©게티이미지뱅크

중소기업과 자영업자 대출이 최대치 기록을 갈아치우고 있다. 정작 대출이 필요한 기업일수록 1, 2금융권에서 대출받기 힘드니 사채의 늪으로 빠져든다. 요즘 사채시장에서 주식담보대출의 담보비율은 300%에 이른다. 10억원 대출받으려면 30억원어치 주식을 맡겨야 하고 그러고도 금리는 월 10%를 넘나든다. 다 죽어가던 사채시장이 때 아닌 큰 장을 맞아 잔치 분위기라는 이야기가 파다하다.

우리나라 사채시장은 몇 년 새 급속히 쇠락해 왔다. ‘명동사채’라는 아성은 진작 무너졌고, 강남으로 옮겨와 코스닥 기업들을 대상으로 재기를 노렸으나 날로 쪼그라들었다. 지하금융을 대부분 양성화할 수 있겠다는 기대도 생겨났다.

사채의 몰락은 그 자체의 위법성에서 비롯됐다. 이자제한법을 비웃는 살인적 금리는 정상적 시장 기능을 마비시켰다. 잔고증명용 급전의 경우 하루 금리가 5%까지 뛰었다고 한다. 기업사냥꾼이 되기로 작정하고 덫을 놓는 사채업자도 많았다. 돈을 빌려주면서 경영권 포기각서와 이사 사임계부터 요구하거나, 지참채무를 조건으로 걸어 채무불이행의 수렁으로 밀어 넣는 것이 그런 예다.

하지만 사채가 위법이어도 수요와 공급은 사라지지 않았고, 처벌이 엄해도 사채를 뿌리뽑진 못했다. 정작 사채를 고사시킨 것은 사채업자가 하던 대출을 몇몇 2금융권 저축은행들이 대신 하면서부터다. 제도권 금융 안에서, 합법적으로.

제도권 금융기관이 사채시장을 대체하면서 많은 경제적, 사회적 가치를 낳았다. 우선, 기업들이 불법 고리사채가 아닌 중금리 자금을 쓸 수 있었다. 채무를 빌미로 삼은 불법 M&A의 위험도 줄었다. 금융기관은 담보물을 직접 자신의 소유로 돌릴 수 없기 때문이다. 대주주 주식을 담보로 대출 받거나 반대매매로 인해 대주주 지분이 변동하면 공시해야 한다는 점에서 소액 투자자 보호 장치도 있었다. 궁극적으로 이 모든 행위들이 금융감독 및 과세 당국의 관리 시스템 안으로 들어와 양성화된 셈이다.

위법한 고리 사채를 양성화하여 중금리 금융으로 끌어안을 수 있다면, 많은 기업에 유동성의 활로를 열어주는 동시에 다수 경제범죄를 예방하거나 추적 적발할 수 있다. 제도권 금융기관이 지하금융을 양성화하여 경제적, 사회적 가치를 창출하는 한편 대손충당금도 쌓고 위기관리도 하면서 이익을 낸다면 혁신이라 불러야 마땅하다. 금융기관이 부동산 담보와 가계대출에 안주해서 “편하게 돈장사 한다”는 원망을 듣는 현실에선 이런 혁신의 싹이 소중하다.

명이 다한 듯하던 사채시장이 되살아나는 현상은 사채를 대체하던 저축은행들의 기업대출이 최근 몇 달 새 얼어붙었기 때문이다. 이런 대출을 주도해온 한 저축은행에 대한 검찰 수사가 그 발단이 됐다. 느닷없이 시국사건처럼 수사선상에 오른 이 저축은행은 “CB(전환사채) 담보대출이 무자본 M&A에 이용될 여지가 있다는 우려를 없애기 위해 경영권이 바뀐 뒤 1년 이내 M&A 기업에 대한 CB 담보대출을 중단한다”고 발표해 몸을 낮췄고, 다른 금융기관들도 앞다퉈 발을 뺐다. 보수적인 금융행태에서 모처럼 자라난 혁신의 싹을 자르는 결과가 되지 않기를 바란다.

김영현 전 혜인이엔씨 대표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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