읽는 재미의 발견

새로워진 한국일보로그인/회원가입

  • 관심과 취향에 맞게 내맘대로 메인 뉴스 설정
  • 구독한 콘텐츠는 마이페이지에서 한번에 모아보기
  • 속보, 단독은 물론 관심기사와 활동내역까지 알림
자세히보기 닫기

알림

학세권 대치동 떠받치는 대전족 “대입까지 7, 8년만 비싼 전세살이 감수”

입력
2020.01.02 14:00
2면
0 0

 [학벌의 탄생, 대치동 리포트] <1>빗장도시에 갇힌 아이들 

 대치동 전세족, 강북 50평 집 두고 대치동서 23평 전세 살아 

 신학기前 전월세 씨 말라… 학원들, 지방학생에 원룸 소개도 

새해를 앞둔 지난달 28일 서울 강남구 대치동 학원가 거리에서 한 초등학생이 엄마 손을 잡고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배우한 기자
새해를 앞둔 지난달 28일 서울 강남구 대치동 학원가 거리에서 한 초등학생이 엄마 손을 잡고 발걸음을 옮기고 있다. 배우한 기자

 

“여긴 정말 특별한 곳이에요. 물건이 이렇게 귀할 수 있나 싶어요. 한 번 둥지를 틀면 웬만해선 떠나지 않는 곳이니까. 10평(약 33㎡)짜리 월세 오피스텔부터 20억짜리 아파트까지 똑같이 귀해요.”

서울 강남구 대치동에서 약 30년째 부동산 중개업소를 운영해 온 박윤택 대표는 ‘대한민국 사교육 1번지’라고 불리는 대치동을 이렇게 설명했다. 2020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수능)이 끝난 직후인 지난해 11월말 박 대표의 부동산이 보유한 인근 아파트 물량(매매와 전∙월세 포함)은 ‘0개’. 얼마 전 수능이 끝난 탓에 대치4동 학원가 주변에 밀집한 원룸 몇 곳만이 비어 있을 뿐이라고 했다. 그나마도 대학입시가 마무리되는 1, 2월 사이가 되면 다시 장ㆍ단기 세입자들이 몰려들어 대기자 명단에 이름을 올려놔야 한 단다. 박 대표는 “2019학년도(2018년 11월) 수능이 어렵긴 어려웠나 보더라”며 “작년 겨울에 재수생들이 워낙 많이 들어와 이 동네 원룸 씨가 말랐었다”고 했다.

이른바 명문 학군과 각종 입시학원이 밀집한 ‘학세권’이란 위치는 대치동의 정체성이나 다름없다. 어느 도시보다 발달된 사교육 인프라는 수십 년 동안 대치동의 ‘부동산 불패’를 떠받쳐 온 강력한 무기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자녀 교육을 위해, 더 정확히 말하면 자녀의 대학 입시를 위해 세입자가 되는 것을 마다하지 않는 수요자들이 넘치는 탓에 대치동엔 늘 돈이 몰린다.

 ◇내 집 두고 ‘대전족’ 자처 “길어야 7, 8년이니까” 

서울 은평구의 50평(약 165㎡)대 자신의 아파트에서 살던 자영업자 박병민(50)씨. 지난해 초 이 집을 전세(7억원)로 돌린 뒤 대치동의 23평(전용 78.71㎡) 아파트 전세를 약 10억원에 구했다. 하나밖에 없는 아들(12)을 대치동의 D중학교에 보내기 위해서였다. 4개이던 방은 3개로 줄었고 아들이 몇 년 간 뛰어놀던 널찍한 거실은 반 토막이 났다. 하지만 후회는 없다. 그나마도 “아내와 발 품 팔아 겨우 구한 집”이었다. 박씨는 “아이가 대학에 들어가기까지 길어야 7, 8년이다. 전세살이를 감수할 만한 기간”이라며 “더 어렸을 때 왔다면 좋았겠지만 지금도 많이 늦은 건 아니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박씨처럼 자녀 교육을 위해 대치동에 전세를 얻는 사람들은 흔히 ‘대전족’이라 불린다. 대치동에 전세를 얻는 사람들이란 뜻이다. 분당 등 수도권 지역 고교평준화가 시작된 뒤 학부모들이 ‘강남8학군’으로 몰려들던 2000년대 초반부터 언론 등에 오르내리던 용어지만 20여 년이 흐른 지금도 여전히 대전족은 대치동 주택시장의 한 주축을 담당하고 있었다. 이 동네 M중개업소 관계자는 “아파트는 전세뿐 아니라 월세 물량도 시장에 나오기 무섭게 학교 입학을 앞둔 학부모들이 낚아채 간다”고 했다. 단대부고, 숙명여고 등 8학군 인근의 한 아파트(2015년형∙34평) 월세 보증금은 약 10억원. 월세만 200만원대를 웃돈다.

과거엔 박씨처럼 자녀의 중ㆍ고교 입학을 앞두고 대치동 행(行)을 노리는 학부모들이 많았다면 최근엔 아예 초등학교 입학 전후로 ‘대치동 입성’을 꿈꾸는 경우가 크게 늘고 있다. “한 살이라도 어릴 때부터 강남 아이들과 어울리고 경쟁해야 한다”는 인식이 강해지고 있는 탓이다. 실제로 2018년 3월부터 1년 동안 이른바 교육특구로 불리는 서초∙강남∙송파구 등 ‘강남3구’로 전입한 초등학생 수는 4,693명으로 이 기간 서울로 전학 온 전체 학생(1만8,321명)의 약 4분의 1에 달한다. 대치동이 속한 강남구 초등학교로 전입한 학생수는 1,974명으로 전체 25개 자치구 중 가장 많다.

중ㆍ고교생 대상 입시학원뿐 아니라 영어유치원으로 불리는 유아대상 영어학원까지 대치동 사교육 시장을 점령한 것도 비교적 젊은 학부모들이 대치동을 찾는 이유다. P중개업소 관계자는 “10년 전만해도 드물었던 30대 엄마 아빠들이 전세 문의를 많이 해 온다. 부동산 사장들끼리 ‘대치동이 어려지고 있다’는 말을 농담처럼 할 정도”라며 “물론 전문직이거나 고소득 부부들이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2018학년도 서울 자치구별 초등학교 전입·전출 현황. 강준구 기자
2018학년도 서울 자치구별 초등학교 전입·전출 현황. 강준구 기자

 ◇부동산과 학원은 ‘대치동 운명공동체’ 

대치사거리 등에 즐비한 학원을 이용하기 위해 인근 빌라나 오피스텔 원룸에 사는 ‘대원(대치동+원룸)족’들도 대치동을 상징해 온지 오래다. 재수를 선택했거나 방학을 이용해 지방에서 대치동을 찾는 학생들이 여기에 해당한다. 대치동 학원가 인근의 한 중개업소에서 일하는 이선아 실장은 “10평 정도 원룸도 최소 2달 이상 계약에 보증금 130만원 월세 130만원이 가장 저렴한 매물”이라며 “책상, 세탁기, 냉장고까지 구비된 풀옵션 오피스텔은 보증금이 300만원대로 뛰지만 이마저도 물량이 늘 부족하다”고 말했다. 또 다른 중개업소 관계자는 “건물 엘리베이터 유무에 따라서도 월세가 30만원 이상씩 차이 난다”면서 “공부를 목적으로 사는 집이라 학부모들이 신경을 써서 그런지 비싼 원룸이 더 빨리 빠지는 편”이라고 말했다.

지방 학생들은 물론 해외 유학생들까지 문의가 빗발치는 방학은 말 할 것도 없다. ‘부르는 게 값’이란 시장경제의 잔인한 단면이 이 시기만큼은 ‘대치동 공식’이 된 지 오래다. 박 대표는 “부모가 중국이나 미국, 캐나다 주재원으로 가 있거나 혼자 유학간 학생들이 방학 때 단기 임대를 많이 한다”며 “남들보다 몇 분만 늦어도 (대치동 학원가에서 도보 20분이 넘게 걸리는) 선릉역까지 나가서 오피스텔을 잡아야 한다”고 말했다.

대치동 학원 중에는 중개업소와 연계해 학생들에게 원룸 등을 소개하는 경우도 있다. 방학 때 수능학원 특강이나 미국 대학입학자격시험(SAT) 준비 등을 위해 대치동을 찾는 지방 또는 해외 유학생들 때문이다. 학원들 입장에선 학부모들을 끌어들이는 영업 전략인 셈이고 중개업소로서도 특정 기간 고객을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다. 학부모들로서도 낯선 지역에서 일일이 발품을 팔지 않아도 되니 편리하다. E중개업소 대표는 “중개업소 대표 중에 방학 때 학생들이 많이 몰리는 학원 원장들과 네트워크가 형성돼 있는 사람들이 많다”며 “학원가 때문에 먹고 사는 입장에서 서로 돕고 사는 건 당연하다는 분위기”라고 귀띔했다.

학생들을 대상으로 장기숙박 시스템을 운영하는 호텔이 있는 것도 대치동을 둘러싼 강남만의 특징이다. 대치동 학원과 계약을 맺고 학생들에게 숙박을 제공하는 호텔도 있다. 대치동 학원가와 약 10분 거리에 있는 한 호텔은 방학 기간에 한해 독서실과 학원셔틀 차량까지 제공한다. 숙박비는 하루 기준 약 8만원 선이다. 방학 때만 대치동을 찾는 학생들로선 월 단위 계약보다는 호텔 숙박을 더 선호한다. 지난 12월 초 이 호텔 관계자는 “11월과 12월은 일찌감치 예약이 끝난 상황”이라고 전했다.

조아름 기자 archo1206@hankookilbo.com

조소진 기자 sojin@hankookilbo.com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세상을 보는 균형, 한국일보Copyright ⓒ Hankookilbo 신문 구독신청

LIVE ISSUE

댓글0

0 / 250
중복 선택 불가 안내

이미 공감 표현을 선택하신
기사입니다. 변경을 원하시면 취소
후 다시 선택해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