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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아리] 나였어도 복지부동했겠다

입력
2019.12.27 18:00
수정
2019.12.27 18:40
2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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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무원 사회에 번진 직권남용 공포

정권도 검찰도 국회도 공무원 겁주기

공직사회 얼어붙으며 혁신 실용도 실종

비 내리는 세종청사에서 공무원들이 출근길을 서두르고 있다. 연합뉴스
비 내리는 세종청사에서 공무원들이 출근길을 서두르고 있다. 연합뉴스

# 고위공직자 출신 A가 송년 모임에서 “축하할 일이 있으니 내년 2월 말쯤 다시 모이자”고 했다. 좌중은 몹시 궁금했다. 자녀 혼사? 고액 연봉CEO로 이직? 그럼 홀인원? 다 아닌 것 같았다. 혹시 입각이냐고 물었더니 A는 웃으며 “오히려 공직과 남은 인연을 완전히 끊는 기념”이라고 말했다. 직권남용 공소시효 얘기였다. MB정부 폐막(2013년 2월)과 함께 옷을 벗었으니까 내년 2월 말이면 그는 정부를 떠난 지 꼭 7년이 되고, 이로써 공무원 직권남용 공소시효(7년)도 끝나게 된다. 재임 중 내렸던 결정에 대해 혹시라도 져야 할지 모를 법적 책임에서 완전히 벗어나게 됐으니 그걸 기념하자는 거였다. 물론 켕기는 일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정권이 바뀌고 검찰도 바뀌고 부메랑이 난무하면서 직권남용으로 수사받고 재판받는 공무원들이 하도 많다 보니, 자조반 농담반으로 한 얘기였다. 통상 공무원들은 퇴임을 해도 취업 제한기간 3년이 끝나야 진정 자유로워진다고 하는데, 이젠 공소시효 7년이 지나야 비로소 완전한 해방감을 느낄 것 같다고 했다.

# 인사 발령이 나면 젊은 공무원들은 PC에 보관된 파일부터 지운다는 보도(서울경제 12월 22일)가 있었다. 과거엔 업무 인계를 위해 없던 자료까지 만들었지만, 지금은 나중에 문제라도 될까 싶어 있는 서류마저 파기하고 삭제한다는 것이다. 또 상사의 지시를 녹음하고 캡처하는 건 당연하고, 보고 내용이 바뀌면 과수(과장님 수정 사항) 국수(국장님 수정 사항)식으로 표시까지 해 놓는다고 한다. 현직에 있는 친한 공무원들에게 실상을 물어 봤다. “글쎄 파일까지 싹 지우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런 분위기가 있는 건 확실해. 나도 어떤 결정을 내릴 때 직권남용에 대한 공포 같은 게 늘 따라다녀. 젊은 직원들에게 지시를 할 때면 녹음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편하게 얘기도 못하지. 그냥 무탈한 선택만 하게 되는 거야.”

# 늘 정치 바람을 타는 관료사회지만 그래도 불문율은 있었다. 정권이 바뀌면 1급 이상 고위직은 대부분 옷을 벗어도 국ㆍ과장급 이하 간부들은 건드리지 않는다거나, 국회의원들이 행정부 공무원들을 향해 고함치고 갑질을 해도 어느 선 이상으로 몰아붙이지는 않는다는 식의 묵시적 룰 같은 게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 깨져 버렸다. 현 정부 출범 후 적폐청산 과정에서 국정교과서(교육부) 블랙리스트(문화체육관광부) 노동개혁(고용노동부) 등 박근혜 정부 정책에 참여했던 공무원들은 국ㆍ과장급까지 문책 좌천당하거나 조사를 받았다. 자유한국당은 국회 대치 국면에서 내년도 예산안 저지에 실패하자 예산 당국 공무원들을 직권남용 권리행사방해 혐의로 검찰에 고발했는데, 아무리 화풀이라고 해도 이런 식의 고발은 전례 없는 일이었다.

왕정이나 군부독재를 무너뜨린 혁명정부가 아닌 담에야, 구 정권 정책 참여자들을 적폐로 낙인찍고 직권남용으로 몰고 간 나라가 또 있나 싶다. 적폐 해소를 위해 동원했던 검찰이 더 이상 도구가 아닌 스스로 심판자가 되고, 정무 외교 사법 영역까지 무차별적으로 칼날을 들이대는 나라가 어디 또 있을까 싶다. 트럼프 대통령에겐 오바마케어가 꼴도 보기 싫은 적폐였을 것이고 이를 되돌리기 위해 부단히 애를 썼지만, 지난 정부에서 간여했던 공무원들을 문책하거나 고발했다는 얘기는 들어보지 못했다.

지금 공무원들이 움직이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나라도 그랬을 것이다. 직장을 잃고 수갑을 찰지도 모르는데, 이들을 향해 누군들 복지부동이고 보신주의라고 돌을 던질 수 있겠나. 타다가 불허된 것, 설악산 케이블카가 무산된 것, 좀 더 써도 되는 원전을 몇 년도 못 참고 굳이 닫아버린 것, 혁신과 실용의 자리를 무사와 무탈이 자리 잡게 된 게 다 지금 공직사회 분위기와 무관치 않다고 본다. 아마 부처마다, 지자체마다 크고 작은 숱한 민원들이 공무원 서랍 속에서 그냥 잠자고 있을 터. 공직 사회가 멈춰 서고, 그렇게 한국사회, 한국경제도 멈춰 서고 있다.

이성철 콘텐츠본부장 sclee@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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