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치=소련’ 유럽 결의안에 분노
“폴란드도 공범” 물고 늘어지기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이 폴란드에 단단히 뿔이 났다. 최근 일주일 새 자리를 가리지 않고 폴란드를 향해 원색적 비난을 퍼붓고 있다. 러시아가 정통성을 이어받은 과거 소련을 건드렸기 때문인데, 폴란드에 책임을 떠넘겨 푸틴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넓히려는 의도가 숨어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26일(현지시간) 영국 BBC방송에 따르면 푸틴 대통령은 24일 러시아 국방부 회의에서 나치시절 주독폴란드 대사를 ‘반유대주의 인간쓰레기’라고 격하게 비난했다. 그는 두 시간 후 국가두마(의회) 지도자들과 만난 자리에서도 같은 문제를 거론하며 제2차세계대전 당시 폴란드의 역할을 깎아 내렸다. 강경 발언은 이튿날 주요 재계 인사들과의 회동까지 이어졌다. BBC는 “푸틴은 최근 일주일 동안 역사는 물론, 외교 문제와도 상관 없는 주요 회의 석상에서 다섯 번 이상 폴란드를 언급했다”고 전했다.
언론은 푸틴의 폴란드 비판이 9월 유럽의회가 발표한 결의안 때문으로 보고 있다. 유럽의회는 결의안에서 2차대전 발발과 관련, 구소련과 나치 독일 모두에 책임을 물었다. 2차대전 발발 직전인 1939년 8월 소련과 나치는 ‘독소 불가침’ 조약으로 불리는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을 맺었다. 동유럽권을 양국이 분할하는 내용이 담긴 이 조약은 그 해 9월 독일이 폴란드를 전격 침공하면서 2차대전이 시작되자 소련이 폴란드 동부지역을 점령하게 된 단초가 됐다.
그러나 전범 나치와 소련을 동일선상에 놓는 것은 푸틴에게 치욕이나 다름 없다. 그는 러시아가 2차대전 승전국인 소련을 계승하고 있다는 자부심이 가득하다. ‘제국의 영화’를 되찾겠다는 일념 하에 줄곧 팽창주의적 대외정책을 펼쳐온 것도 이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나치=소련’ 등식은 70년 넘게 유지된 국가 이데올로기의 근간을 허무는 것이고, 나아가 집권 정당성을 공격했다고 푸틴은 본 것이다. 한 마디로 ‘역린’을 건드렸다는 얘기다. 방송은 “푸틴은 ‘위대한 승리’로 여기는 소련에 쏟아지는 어떤 비판도 용납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푸틴은 왜 피해자인 폴란드를 물고 늘어지는 걸까. 언론은 이를 전형적인 푸틴식 ‘말돌리기’라고 진단한다. 자신에게 비난이 쏟아지고 논리적 대응이 어려울 때 오히려 상대에게 비난의 화살을 돌리는 수법이다. 이를테면 “전쟁 당시 폴란드 너희는 대체 뭘 했느냐”면서 논쟁 방향을 바꿔 버리는 것이다. 러시아가 공범이면 폴란드도 공범이라는 물귀신 작전이다.
물론 폴란드는 푸틴의 공격을 ‘날조’라고 일축한다. 폴란드 정부는 지난해 나치 전쟁범죄 공범으로 비난하는 행위를 금지하는 법안을 만드는 등 이 문제를 매우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손성원 기자 sohnsw@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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