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이 트기 전에 깨어났다. 일 년에 서너 번 있을까 말까 한 이례적인 상황이었다. 전날 오후부터 몸살 기운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바이러스의 공습에 호락호락 당하지 않겠다는 결의로 저녁밥을 푸지게 먹은 뒤 홍삼 달인 물까지 한 사발 마시고는 밤 9시가 되기 전에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 새벽 6시 조금 넘은 시각에 개운하게 눈이 떠진 것은, 순전히 홍삼 발이었다. 이불을 박차고 나와 여러 겹 옷을 껴입었다. 2019년 한 해도 며칠 남지 않았다는 생각이 들면서 새벽 산행을 하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인왕산으로 이어지는 성곽 길로 접어들다 고개 들어 산꼭대기를 바라보았다. 30대의 어느 한 시절에는 매일같이 저 산을 오르내렸다. 돌아보면 한없이 분주하고 불안하던 그 시절, 저 산으로 나를 이끌었던 감정의 파장들은 오래된 흑백판화처럼 건조한 기억으로 남았다. 그렇더라도 저 산을 마주할 때 떠오르는 어떤 풍경들은 묘한 감정으로 나를 요동치게 한다.
경사가 가파른 길을 10여 분 걷고 나니 온몸에 열이 올랐다. 사직공원 쪽으로 이어진 길과 수성동 계곡 쪽 길이 만나 본격적인 인왕산 등산로가 시작되는 초입이었다. 산 정상을 흘낏 올려다보며 등산로를 향해 걸음을 옮기는데 어디선가 내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어둠이 가시지 않은 저쪽 길에서 누군가 나를 향해 걸어왔다. 목소리를 듣는 순간 ‘설마, 잘못 들었겠지’ 했다. 어스름 속에서 나타난 사람은 틀림없는 그 친구였다. 새벽 등산로에 우뚝 서 있는 친구를 보자니, 눈물이 날 만큼 반가웠다.
우리는 10대 중반, 문학동아리에서 만났다. 하지만 그 친구는 예술인의 삶을 선망하던 동아리 내 멤버들과 여러 면에서 달랐다. 불과 열일곱 나이에 ‘단순하고 속되게’ 살고 싶다는 삶의 모토를 표명하는 것으로 나를 당혹스럽게 만들었던 그 아이는, 세상 살아가는 법을 제대로 배우고 싶다며 경영학을 전공했다. 그러고는 대학 4학년 때부터 대기업 인턴으로 출근하더니, 결국 자기가 원하던 계열사로 발령받아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그렇게 서로 다른 길을 분주하게 달려가면서도 그와 나는 용케 끊이지 않는 우정을 이어왔다. 그게 종종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얼마 전 이삿짐을 정리하다가 비로소 깨달았다. 그 시절 만난 친구들 중 예술의 효용가치를 가장 예민하게 포착하며 나에게 영향력을 행사한 사람이 바로 그 친구였다는 사실을. 책장 한 귀퉁이에 꽂힌 오래된 책들을 꺼내 펼치자 한동안 잊었던 저편의 시간이 뭉텅이로 다가왔다. 20대와 30대를 거치는 동안 나에게 가장 많이, 그리고 가장 오랫동안 시집과 예술 서적을 선물한 사람이 그 친구였다. 잉게보르크 바하만을 맨 처음 알려준 사람도, 바윗돌처럼 껄끄럽게 느껴지던 옥타비오 빠스의 시집을 장문의 편지와 함께 보내준 사람도, 브레히트 희곡을 먼저 읽고 책 앞 면지에 독후감을 적어 나에게 보낸 사람도 그였다. 말하자면 청년 시절 동안 줄곧, 그는 나에게 문화적 감수성의 앞잡이 노릇을 해온 셈이었다.
바로 그 친구를 신 새벽 등산로 초입에서 만난 것이다. 예정에 없던 동행이 되어 우리는 함께 산행을 했다. 그가 26년간 다니던 회사를 지난주에 그만뒀다고 알렸다. 그러니까 친구는 중대한 두어 가지 선택지를 앞에 두고 오늘 산행에 나선 참이었다. 한 시간가량 인왕산을 오르내리며, 설레는 마음으로 친구의 이야기를 들었다. 신중하게 인생 2막을 구상하는 친구를 응원하고 싶은 마음도 절실해졌다. 집으로 돌아온 나는 오랜 시간에 걸쳐 친구가 내게 선물했던 책들을 꺼낸 후, 새로 산 책 몇 권과 함께 박스에 담아서 우체국으로 갔다. 그 시절 그가 나에게 건네던 격려를 되새기는 것만으로도, 친구에게는 각별한 응원이 될 것 같아서였다.
지평님 황소자리 출판사 대표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