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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좋은 책인데… ” 서점가 달구는 '통곡의 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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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좋은 책인데… ” 서점가 달구는 '통곡의 리스트'

입력
2019.12.26 04:40
수정
2019.12.26 10:03
2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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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보문고 ‘아까운 책’ 100권 손글씨 추천사

베스트셀러 진입에 매출 ‘쑥’

‘통곡의 리스트’에 오른 책이라 해서 매장에서 단번에 찾아내긴 어려웠다. 서가를 한참이나 뒤적여야 했다. ‘통곡의 리스트’를 기획한 이익재 MD가 지난 23일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못 팔아 천추의 한이 된 책’을 골라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 MD가 보기에 스테디셀러가 되고도 남음이 있는 책들이다. 홍인기 기자
‘통곡의 리스트’에 오른 책이라 해서 매장에서 단번에 찾아내긴 어려웠다. 서가를 한참이나 뒤적여야 했다. ‘통곡의 리스트’를 기획한 이익재 MD가 지난 23일 서울 광화문 교보문고에서 ‘못 팔아 천추의 한이 된 책’을 골라 포즈를 취하고 있다. 이 MD가 보기에 스테디셀러가 되고도 남음이 있는 책들이다. 홍인기 기자

한 해 출간되는 신간은 분야를 막론하고 7만여권. 그중 독자로부터 ‘픽’을 받아 베스트셀러가 되는 책은 극소수다. 나머지는 세상에 나온지도 모르게 스르르 잊히고 만다. 책이 별 볼 일 없어서가 아니다. 우리가 몰라봤을 뿐이다.

잘 나가는 책은 탄탄대로를 달리고 못 나가는 책은 표지 한 번 노출되지 못하고 사장되는 가혹한 운명은 연말이 되면 더 잔인해진다. 베스트셀러 책은 ‘올해의 책’으로 또 한 번 조명받으며 스테디셀러 자리를 넘보지만, 못 나가는 책은 눈물을 삼키며 매대 뒤에 꽂혀 있는 서가로 방출 수순을 밟는다.

그런데 올해 출판계에 산타클로스가 나타났다. “반드시 팔아야 했던 좋은 책을 못 팔아 죄송하다”며 베스트셀러 역주행 도모에 나선 교보문고의 이익재 인문 MD다. 올 한 해 출간된 인문 도서 중 “너무 좋은데, 너무 안 팔려 천추의 한이 됐다”는 책 100권을 추려 12월 한 달 간 독자에게 소개하는 이벤트를 진행 중이다. 이름마저 처절한 ‘통곡의 리스트’다.

◇시작은 ‘쪼임’이었으나 끝은 ‘훈훈’하리라

시작은 ‘쪼임’ 때문이었다. “작년 11월에는 유발 하라리, 미셸 오바마, 정혜신 박사 같은 분들이 낸 대형 신간들이 많아서 매출 걱정 없이 지냈거든요. 그런데 올 연말엔 그런 책이 없다 보니 매출액이 전년 대비 마이너스로 떨어지더라고요. 없는 책을 만들어 낼 수도 없고 스트레스로 끙끙 앓았습니다.”

그러다 아예 생각을 바꿨다. ‘새로 팔 책이 없으면, 이미 나온 책들을 새로 팔아 보자. 진짜 좋은 책이었지만, 대진 운이 나빠서, 출판사가 작아서, 광고비가 없어서 그리고 담당 MD가 미련하고 아둔해서 억울하게 빛을 보지 못한 책들을 살려 보자.’

경력 14년 차로 ‘MD계의 시조새’라고 불리는 그에게도 전무후무한 도전이었다. 목표는 매출액 4,000만원 달성. 장삿속이 아예 없어도 안 되겠지만, 장삿속에만 매몰돼도 안 된다는 게 핵심이었다.

이 MD는 곧바로 작업에 착수했다. 일단 선정 기준. △온라인 판매 기준 근로자 1인 평균 임금 3,500만원에 못 미치는 매출을 기록한 출판사가 낸 인문서적 가운데 △1,000권도 채 팔리지 못했으나 △내용도 만듦새도 너무 좋은 책으로 한정했다. 여력 있는 대형 출판사, 의미 있어도 만듦새가 너무 조악한 책은 탈락시켰다.

교보문고 이익재 MD는 ‘통곡의 리스트’에 올린 책을 소개하기 위해 추천사를 쓰면서 정성 들여 손 편지 형식을 취했다. 교보문고 제공
교보문고 이익재 MD는 ‘통곡의 리스트’에 올린 책을 소개하기 위해 추천사를 쓰면서 정성 들여 손 편지 형식을 취했다. 교보문고 제공

◇MD가 일일이 손편지 추천사 쓰다

그 다음, 정성을 다해 읍소했다. 인문 서적 100권은 너무 많은 게 아닌가 싶은데, 이 MD의 대답은 단호했다. “이 세상, 이렇게 좋은 책이, 이만큼이나 있다는 걸 보여 주는 게 목표였기 때문에 100권도 모자랄 지경”이라고 말했다. ‘좋은 책이 이리 많은데 잘못 판 내가 잘못’이란 마음을 담아 책 추천사를, 손편지 형식으로 직접 썼다. 1권 당 80자씩, 총 8,000자에 달한다.

홍보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꼬박 한달 동안 이 ‘짠내 나는’ 모든 과정을 한 포털사이트에 연재했다. ‘통곡의 리스트’는 오픈 전부터 화제를 모았다.

박수와 환호성이 쏟아졌다. 고객들은 “이런 책이 있는 줄 미처 모르고 지나갈 뻔했다”는 반응이었다. ‘통곡의 리스트’에 이름을 올린 출판사 관계자들은 “이게 영광인지, 굴욕인지 모르겠다”고 하면서도 “우리 책을 알아봐줘서 고맙다” “애썼다”는 얘기들을 쏟아냈다. 이 MD도 가슴을 쓸어내렸다. “출판사나 저자 입장에선, 책이 잘 안 팔렸다고 공개적으로 광고하는 거니까 사실 기분 나쁠 수도 있잖아요. 쿨하게 받아 주셔서 너무 감사했죠.”

◇ ‘통곡’ 아닌 ‘역주행’ 리스트

호의적인 반응은 판매량으로도 이어졌다. 100권 전체 매출액은 이전보다 180%나 올라갔다. 25일 기준 1,800여명이 책을 사서 3,000만원도 돌파했다. 베스트셀러에 진입한 책도 있다. ‘나무의 시간’(브레드), ‘한국 괴물 백과’(워크룸프레스), ‘공부의 미래’(한겨레출판), ‘한나 아렌트, 세 번의 탈출’(더숲), ‘무라카미 하루키의 100곡’(내친구의 서재), ‘책이었고 책이며 책이 될 무엇에 관한 책’(마티) 등 7종은 주간 베스트 150위권에 들어갔다.

이 가운데 ‘한국 괴물 백과’는 최고 성적인 50위까지 찍었다. 기적 같은 역주행의 시동이 켜진 것이다. 이 MD는 “독자들이 ‘작은 책의 가치’를 발견했다는 게 가장 뿌듯하다”고 말했다.

물론 현실은 아직 멀었다. ‘통곡’이라도 하지 않으면 꽤 괜찮은 신간도 묻히기 마련이다. 이 MD는 대형 서점의 신간 매대, 온라인 서점의 홈페이지 신간 소개가 지나치게 빨리 바뀌는 게 문제라고 봤다.

도서정가제 도입 이후 신간 종수도, 출판사도 꾸준히 늘고 있는데, 서점은 책을 멀리하는 독자들을 불러 모은다는 명분으로 카페 등 부대시설을 늘리고 있다. 오프라인 서점은 서가 공간을 줄이고, 온라인 서점 또한 광고성 책을 매주 소개하느라 바쁘다. 신간은 늘어나는데 책 소개 공간은 줄어드니, 당장 눈에 띄는 성과를 못 내는 책은 곧장 퇴출 수준을 밟는 구조가 심화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교보문고 ‘통곡의 리스트’가 화제를 모으자 경쟁업체인 예스24가 나서서 ‘통곡의 리스트에 답하다’라는 이름의 이벤트를 시작했다. 교보문고 YES24 홈페이지 캡처
교보문고 ‘통곡의 리스트’가 화제를 모으자 경쟁업체인 예스24가 나서서 ‘통곡의 리스트에 답하다’라는 이름의 이벤트를 시작했다. 교보문고 YES24 홈페이지 캡처

◇교보는 ‘확대’, 예스24는 ‘동참’ … 번지는 열기

‘통곡의 리스트’는 이 흐름에서 발생한 작지만 큰 변화다. ‘통곡의 리스트’가 인기를 끌자, 교보문고는 내년부터 인문뿐 아니라 문학 등 다른 분야에까지 ‘통곡의 리스트’ 접근법을 확대해 나갈 계획을 세웠다. 오프라인 매장에도 ‘통곡의 리스트’를 별도 매대로 꾸리는 방안을 고민 중이다.

교보문고의 이런 움직임에 다른 서점들도 동참하는 분위기다. 치열한 영업 경쟁을 벌이지만, 동시에 책의 가치를 높여야 한다는 목표는 똑같아서다. 예스24의 손민규 MD는 ‘통곡의 리스트에 답하다’라는 이벤트로 ‘(통곡의 리스트보다) 더 팔린 책, 더 알리고픈 책’ 44권을 추려 냈다. 손 MD는 “좋은 기획이라 빠르게 숟가락을 얹었다”며 “교보와 함께 소개한 책들의 판매량 증가는 더욱 두드러진다”고 말했다. 손 MD는 다른 회사들의 동참이 필요하다고 역설하기까지 했다. “알라딘이나 인터파크 같은 다른 온라인 서점들도 함께하면 베스트셀러 아닌 책들을 ‘발견’하는 문화가 더 널리 퍼지지 않을까요.”

마지막으로 눈 밝은 독자가 되려면 어찌 해야 하는지 이 MD에게 물었다. “무엇보다 큰 정보에 현혹되지 않으셨으며 해요. 대형 서점 매장에 진열됐다고, 방송에 나왔다고 해도 내가 재미 없으면 좋은 책이 아닌 거잖아요. 자기 내면의 검색을 통해 책을 골라 보면 성공 확률이 확 올라가더라고요. 목적 없이, 이름 모를 책들을 거닐다가 우연히 발견하는 책이 가장 좋은 책일 수 있습니다.”

2019 연말 출판계를 한바탕 웃고 울린 그의 통곡, 2020년에는 멈출 수 있을까.

강윤주 기자 kkang@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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