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문’서 재회한 최민식ㆍ한석규
동국대 연극영화과 82학번과 83학번. 배우 최민식(57)과 한석규(55)는 1년 선후배로 만났다. 성격, 성향, 체질, 무엇 하나 닮지 않았지만, 꿈이 신기하리만치 똑같았다. 그렇게 같은 곳을 바라보며 발 맞춰 걸어 온 시간이 어느덧 40년. 그 길 어딘가에서 함께 꿈을 이루는 기적 같은 순간을 맞이했었다. 첫 만남인 MBC 드라마 ‘서울의 달’(1994)로 세상에 나란히 이름을 알렸고, 영화 ‘넘버3’(1997)와 ‘쉬리’(1999)로 2000년대 한국 영화 르네상스를 열었다. 두 배우는 서로를 이렇게 부른다. “당신은 나의 영원한 파트너!”
그런 인연이었건만, 또 한번 만나기까지는 ‘쉬리’ 이후 무려 20년을 기다려야 했다. 몇 차례 기회가 있었지만 인연이 닿지 않았다. ‘천문: 하늘에 묻는다’(26일 개봉)가 기획 단계부터 뜨거운 관심과 화제를 모은 이유다. 성군 세종과 천재 과학자 장영실의 우정과 신의를 그린 팩션 사극. 허진호 감독은 시나리오를 건네고는 “누가 어떤 역을 맡을지 정해서 알려 달라”며 역할 분담을 두 배우에게 아예 맡겨 버렸다. 그 결과가 한석규의 세종, 최민식의 장영실이다.
“솔직히 이 영화가 아니었어도 (한)석규와 함께라면 출연했을 겁니다. 역할을 따지는 건 아무 의미 없어요.”(최민식) “세종과 장영실의 모습이 꼭 (최민식)형님과 저의 관계를 보는 것 같았어요. 그래서 더 깊이 몰입했나 봅니다.”(한석규) 최근 서울 삼청동 카페에서 각각 마주한 두 배우는 상대에 대해 말할 때 웃음부터 머금었다.
영화 속 세종과 장영실의 관계를 두고 ‘브로맨스가 아니라 로맨스 같다’는 평이 나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눈빛에서 꿀이 뚝뚝 떨어진다’는 얘기다. 영국이었으면 기사 작위쯤은 이미 받고도 남았을 두 배우의 명연기가 빚어낸 뜻밖의 부작용(!)인 셈이다. 최민식은 살짝 어리둥절해하면서도 “세종은 큰 목표를 세운 사람이고 장영실은 그를 돕는 조력자인데, 그 목표를 이뤄 가는 과정에서 파생되는 감정을 아주 세밀하게 표현하고 싶었다”고 말했다.
세종은 천부적 재능을 지닌 장영실을 발탁해 관노 신분에서 면천시켜 주고 아낌없이 지원했다. 장영실은 자격루, 간의 등 천문 기기를 만들어 조선에 새로운 시간을 열었다. 신분을 뛰어넘은 특별한 관계는 24년간 이어졌지만, 왕이 타는 가마인 안여가 부서지는 사건으로 장영실이 곤장 80대형에 처해졌다는 기록 이후 장영실은 역사에서 사라졌다. 그토록 단단했던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영화는 이 같은 의문에서 출발해 상상의 나래를 펼친다.
한석규는 2011년 SBS 드라마 ‘뿌리깊은 나무’에서도 세종을 연기했다. 그는 “드라마엔 장영실이 나오지 않지만 당시에도 세종에게 친구가 있었다면 장영실이 아닐까 생각했다”며 “그 궁금증을 이번에 풀어내 기쁘다”고 했다. 고민의 깊이만큼 8년 전 세종과 지금의 세종도 달라졌다. “‘뿌리깊은 나무’에선 이방원(태종)을 아버지로 둔 이도(세종)라는 사람에 대해 생각했어요. 왕권을 위해 무수한 피를 묻힌 아버지에게서 영향을 받았을 거라고 말이죠. 세월이 흘러 50대가 되니 오히려 어머니(민경왕후 민씨)를 떠올리게 돼요. 어머니는 죽음과 반대 개념으로서의 ‘삶’을 아들에게 물려줬을 겁니다. 그래서 세종이 어떻게든 장영실을 살리려 했던 것 아닐까요.”
장영실은 요즘 말로 ‘오타쿠’다. 오로지 과학적 열망과 세종에 대한 존경심만이 그를 움직이게 한다. “로봇 과학자 데니스 홍과 이정모 서울시립과학관 관장의 강연을 TV로 본 적이 있어요. 꼭 꿈 속에 사는 사람처럼 천진난만하더군요. 장영실도 저렇게 순수하지 않았을까 생각했죠. 그래서 가끔은 어린아이처럼 세종을 질투하기도 했을 거예요. 세종이 훈민정음 활자를 보여주자 장영실이 ‘나를 그 동안 멀리한 이유가 이것이었냐’며 토라지는 이유죠.”
최민식과 한석규는 숨결과 눈빛만으로 시나리오에 담긴 것 너머의 이야기까지 품는다. 세종과 장영실이 나란히 누워 밤하늘 별을 보는 장면, 검은 먹을 칠한 창호지에 구멍을 뚫고 불빛을 비춰 별자리를 헤아려보는 장면 등 눈에 새겨진 명장면도 여럿이다. 두 배우는 “얘기를 나누지 않아도 서로 어떤 생각을 하는지 다 알겠더라”고 입을 모았다. 허 감독은 “최민식은 불 같은 배우, 한석규는 물 같은 배우”라며 “서로 연기 스타일이 다른데도 촬영에 들어가면 소름끼치는 호흡이 나오더라”고 감탄했다.
최민식과 한석규의 다섯 번째 만남이 벌써 기다려진다. “당연히 해야죠. 한국 영화 르네상스 때처럼 선택권이 있는 우리가 먼저 과감하게 도전해서 새로운 흐름을 만들어 보자는 이야기도 종종 나눠요. 시사회 뒤풀이에 온 다른 감독들에게도 얘기해 뒀어요. 우리가 한 세트로 캐스팅 시장에 나왔으니 새 영화 만들어 달라고요.”(최민식) “형님이 ‘연기는 죽어야 끝나는 공부’라고 하신 적이 있어요. 무슨 뜻인지 저는 너무나도 잘 압니다. 나와 같은 종류의 사람이구나, 다시 한 번 느꼈죠. 형님과 최소 서너 작품은 더 해야 성이 찰 것 같아요.”(한석규)
김표향 기자 suzak@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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