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하장 시즌이다. 며칠쯤 지나면 휴대폰이 요란하게 울려댈 것이다. 새해 아침에는 모바일 메신저가 불통될 정도다. 대공습이다. 그런데 그게 정말 가슴 따뜻한 진정한 의례일까. 내가 삐딱한지는 몰라도 나는 우편이든 모바일 연하장이든, 장엄한 일출이나 복주머니나 매화 사진에다 수십 년째 닳고 닳아 입에 붙은 그런 문안이 인쇄된, 그렇고 그런 연하장 하나도 안 반갑다.
내가 그대에게 특별한 존재여서가 아니라, 그냥 사회 생활의 인맥 관리나 자기만족 차원이라는 걸 서로 잘 알고 있지 않을까. 돈도 안 드는데 밑져봐야 본전이라는 심리다. 모바일 연하장이 말해 주는 확실한 사실은 그 양반 휴대폰에 아직 내 전화번호가 남아 있구나, 하는 것뿐이다. 디지털 시대에 사는 우리는 불필요하게 넓고 얕은 인간관계를 알게 모르게 기계에 강요당하고 있다.
내 폰에 번호가 저장돼 있지 않으면 누가 보냈는지조차 알 수 없다. 언젠가 명함 한 장 교환한 적이 있을지는 몰라도 내겐 별 볼일 없는 사람이었던 거다. 국회의원이나 금배지를 꿈꾸는 자들은 악수 한 번 나눈 적 없고 그의 지역구에 살지도 않는데도 필사적으로 보낸다. 그게 한 표로 돌아온다고 믿는 것일까. 어떻게 내 번호를 아는지 궁금하다. 비서들 손가락만 부르텄을 게다.
우편 연하장을 보내는 사람들은 주로 직장이나 기관, 단체의 수장이거나 비즈니스 관계가 많다. 격식을 차리겠다는 거지만 궁서체만큼이나 문안은 권위적이고 천편일률적이다. 손글씨까지 기대하진 않지만 발신인 이름과 서명조차도 인쇄돼 있다. 이런 걸 정말 왜 보낼까. 바로 휴지통 직행이다. 공공기관장이 보냈다면 공금 유용에 해당하지 않을까.
잘 아는 지인이나 친구, 선후배, 전ㆍ현직 동료가 보내는 연하장은 그래도 한번 들여다보게 된다. 그런데 인터넷에 돌아다니는 움짤을 복사했거나 앱이나 카톡에서 무료로 다운받은 연하장이 대부분이다. 수신인 이름이나 글을 써넣을 수 없다. 최소한의 성의 표시로 인정은 한다. 대신 ‘복붙’에는 ‘읽씹’으로 대응한다.
똑같은 복사품을 대량 발송하지 말고 범위를 좁혀 특별한 마음을 전하는 게 훨씬 더 좋지 않을까. 나는 안부 인사나 감사를 표하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그냥 문자로만 한다. 인터넷에 지천으로 돌아다니는 그런 뻔한 이미지 장식이 뭐 필요하겠는가. 신세 진 정도나 공적ㆍ사적 관계의 성격, 연륜의 차이, 친소의 정도가 다 다르기 때문에 당연히 하나밖에 없는 맞춤형이다. 시간이 좀 걸리지만, 그 사람 얼굴을 떠올리며 둘만의 사연이나 좋았던 순간을 추억하고 올해는 우리가 좀 더 어쩌고저쩌고 하는 문장을 쓰는 그 시간을 나는 사랑한다.
좀 더 내 마음을 보여주고 싶은 사람에게는 종이에 손글씨로 길게 써서 사진으로 찍어 보낸다. 백 퍼센트 답장이 온다. 나는 당신에게, 그대는 나에게 ‘원 오브 뎀’이 아니라 ‘스페셜 원’임을 확인하는 거다.
어린왕자는 지구 정원에 만발한 5,000송이 장미꽃 앞에서 비로소 자신의 별에 두고 온 성질 까탈스러운 한 송이 장미꽃이 더 소중했다는 걸 여우한테 깨달았다.
“그건 네가 물을 주고, 벌레를 잡아주고, 바람을 막아주며 공들인 시간 때문이야. 자신이 공들여 가꾼 것과만 진정한 관계를 맺을 수 있지. 관계란 서로를 길들이는 거야. 그래야만 서로에게 단 하나뿐인 존재가 되는 거야.”
십수 년을 이어온 이 식상하고 상투적인 모범 답안을 이제는 그만 보고 싶다. “지난 한 해 동안 보여주신 관심과 보살펴 드린 후의에 감사드리며… 다가오는 ○○년 새해에는… 하길 기원합니다.” 사람들은 왜 이런 체온과 감정 없는 문장이 격식 있고 좋다고 생각하는 걸까. 이보세요. 나는 단 한 번도 댁에게 관심이나 후의를 가진 적이 없습니다.
한기봉 한국신문윤리위원회 윤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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