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째 크리스마스의 기분이 나지 않았다. 그저 캐럴을 듣기 어렵다거나 눈이 내리지 않았기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그 특별한 ‘탄생의 의미’가 자꾸만 퇴색되는 세태 탓도 있을 것이다. 작은 마을 베들레헴에 변변한 여관조차 없었을 것이다. 그저 어쩌다 오가는 이들을 위한 작은 주막쯤이었을 것이다. 갑자기 내려진 로마 점령군의 정책 때문에 제 고향에 가야 하는 이들이 몰려 들어 그 옹색한 주막 겸 여관도 덩달아 바빴을 것이다. 메뚜기도 한 철이라는데 평소 묵어 가는 이들 많지 않았으니 방은 부족했을 것이다. 다행히 몇 사람이 해지기 전 찾아와 여장을 풀었다. 여관 주인은 흐뭇했고 투숙객들은 안도했을 것이다. 식사 후 피곤하기도 하고 지루하기도 한 손님과 갑자기 바빠진 주인은 이런저런 이야기로 시간을 때우기도 했을 것이다.
어둑어둑한 시간 더 이상 손님이 찾을 것 같지 않다. 그때 갑자기 문 두드리는 소리에 주인이 나가보니 곧 출산할 것만 같은 여인과 어쩔 줄 모르는 남자가 빈 방이 있느냐 묻는다. 아마도 그 소리를 들었을 방 안의 손님들도 문 살짝 열고 고개 내밀며 호기심 어린 눈으로 훑어봤을 것이다. 그러나 셈속은 금세 끝났다. 못 본 걸로 하는 게 편할 듯하다. 옆방 손님이 방을 내준다면 고마운 일이겠지만 그걸 내가 떠맡을 이유도 없고 그럴 마음도 없다. 얼른 문을 닫는다. 아예 그 장면을 보지 않은 것처럼. 그건 옆방 손님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그들은 합의라도 한 것처럼 조용히 눈길을 거뒀다. 여관 주인이 보니 그 부부가 딱했다. 그러나 방은 없다. 미리 온 손님에게 방을 내주면 어떻겠느냐고 물어보고 싶지만 그건 자기가 해야 할 의무도 없는 노릇이고 딱히 이익이 더 생기는 것도 아니다. 돈 될 일이 아니다. 그러니 안타깝지만 자기가 손해 볼 까닭은 없으니까 ‘적법하게’ 늦게 온 그 부부에게 선심이라도 쓰듯 마구간이라도 쓰겠냐고 물었다. 아마 헐값이라도 받았을지 모른다. 달리 방법이 없는 그 가련한 부부는 감지덕지 받았다. 아무도 잘못한 사람 없다. 하지만 주인도, 먼저 온 손님들도 모두 뭔가 찝찝하고 마음 한 편이 불편했을 것이다. 그저 애써 나름의 정당성과 합법성을 내세우면서 합리화하는 것으로 때웠을 것이다.
결국 일이 터졌다. 제발 그런 일이 없기를 바랐건만 하필 그곳에서 그녀가 아이를 낳은 것이다! 아무리 신의 아들이라지만 어차피 사람의 아들로 태어나기로 한 것이니 사람의 삶과 고통을 그대로 지닌 출산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초산이 아닌가. 산모의 신음 소리에 잠자던 손님들과 주인도 잠을 깼을 것이다. 마구간에서 아이가 태어나고 있다니! 마음 같아서는 얼른 방으로 들여서 조금이라도 나은 곳에서 아이를 낳게 하고 싶었을 것이다. 자연스러운 인지상정이다. 그런데 자기 방을 내주면 어디에서 자야 할 것인가? 셈속이 발목을 잡았다. 그래서 모두 못 들은 척했다. 결국 아이는 마구간에서 태어났다.
지난주 성탄 분위기 가득한 하노이에 다녀왔다. 눈 구경도 못하는 곳에서의 성탄 분위기가 어색했지만 사실 그 아이가 태어난 곳도 눈이 내리지 않는 곳이니 어쩌면 그게 더 어울릴지 모른다. 기독교 문화를 키운 서양의 나라들에서는 눈 내리는 계절이어서 ‘화이트 크리스마스’에 익숙해졌기 때문에 그 상하(常夏)의 나라에서 맞는 성탄 분위기가 낯설 뿐이다. 하노이 상공에 미군의 B52 폭격기가 나타났을 때 시민들은 어떤 느낌이었을까? 공포와 분노,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그들은 그저 살아남을 수 있기만 빌고 또 빌었을 것이다. 이제 전쟁은 끝났고 통일하여 활기차게 도약하고 있다. 그 폭격에서 다행히 살아남은 하노이의 성 요한대성당에서 무릎 꿇고 기도하면서 그들의 평화와 행복을 빌었다. 그러나 그들도 이제 그때의 긴박함을 세월에 따라 조금씩 잊을 것이다. 경제적 성장과 자부심은 각 개인의 부에 대한 갈망을 더 강하게 만들면서. 어쩔 수 없이 빈부의 격차에 대해 절망하는 이들이 많아질 것이다. 그들이 그 성당에서 무엇을 기원할 것인가.
성 요한대성당 앞에도 구유가 마련되었다. 사람들은 그 구유를 찾은 동방박사와 목동을 보면서 자신도 그 사람들 가운데 하나인 듯 느낀다. 그러나 정작 나는 ‘거기’에 없었다. 나는 마구간에서의 출산을 목격했으면서도 내 잇속을 위해 방을 내주지 않았던 손님이었고 용감하게 나서서 산모와 아이를 방으로 보내지 않았던 여관 주인일 뿐이다. 나는 그 아이를 외면했던 사람이다. 그런데도 부끄러워하기는커녕 동방박사나 목동인 듯 착각하며 그 아이의 탄생을 외친다. 내가 묵었던 화려한 호텔이 아니라 가장 천하고 낮은 곳에서 태어난 아이는 정작 못 본 척하면서. 내가 한 것은 고작 10달러를 헌금통에 넣는 일뿐이었다. 돈의 보속이 아니라 내 무디고 탐욕스러운 마음을 속죄하는 뜻으로, 엊그제 나를 따라다니며 ‘원 달러’를 외치던 꼬질꼬질한 그 아이에게 따뜻한 끼니들이 마련되기를 바라면서. 부끄러움을 덜기 위해. 이 시대의 마구간은 어디인가? 메리 크리스마스!
김경집 인문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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