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포퓰리즘
분열의 정치로 민주주의 위협 우려… 대선 즈음 한국사회 전면 부상 가능성
뉴욕타임스 칼럼니스트 데이빗 브룩스는 미국 현대사를 ‘진보의 시대’(1930~1960년대)와 ‘보수의 시대’(1980~2008년 금융위기)로 구분한 바 있다. 이 역사인식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서유럽에도 적용할 수 있다. 진보의 시대가 ‘복지국가 시대’였다면, 보수의 시대는 ‘신자유주의 시대’였다.
그렇다면 2010년대는 어떻게 명명할 수 있을까. 정치적 측면에서 주목할 경향은 단연 포퓰리즘(populism)이다. 미국의 ‘트럼프 현상’과 ‘샌더스 현상’에서 프랑스의 ‘국민전선’, 독일의 ‘독일을 위한 대안’, 영국의 ‘독립당’, 이탈리아의 ‘오성운동’, 그리스의 ‘급진좌파연합(시리자)’, 스페인의 ‘포데모스’까지 포퓰리즘이 서구 정치사회는 물론 시민사회를 뒤흔들어 왔다.
포퓰리즘의 기원은 19세기 후반 러시아 나로드니키와 미국 인민당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특히 인민당은 산업 및 기업 규제, 불평등 해소를 위한 누진세를 주장해 포퓰리즘 성장에 큰 영향을 미쳤다. 포퓰리즘은 1940~50년대 ‘페론주의’에서 볼 수 있듯 라틴아메리카에서 새로운 힘을 얻었다. 그리고 1990년대 프랑스 ‘국민전선’과 이탈리아 ‘북부동맹’에서 볼 수 있듯 서유럽에서, 2000년대 베네수엘라 차베스 정부에서 볼 수 있듯 라틴아메리카에서 부활했다.
◇포퓰리즘 시대의 개막
21세기 포퓰리즘을 특징짓는 현상은 세 가지다. 첫째, 이념 구도를 망라해 존재한다. 트럼프 현상이 우파 버전이라면, 포데모스는 좌파 버전이다. 둘째, ‘엘리트 대 국민’의 대립을 부각시킨다. 포퓰리스트들에게 엘리트란 기득권의 다른 이름이다. 정치의 일차적 목표가 엘리트 기득권에 맞서서 국민주권을 회복하는 데 있다고 포퓰리스트들은 역설한다. 셋째, 포퓰리즘은, 정치학자 얀 베르너 뮐러가 ‘누가 포퓰리스트인가’에서 강조하듯, 정치적 다원주의를 반대한다. 포퓰리스트들은 자신을 지지하는 이들만을 ‘진정한 국민’으로 여긴다.
포퓰리즘은 우리 사회에서 흔히 ‘인기영합주의’ 또는 ‘민중주의’로 옮겨진다. 전자는 부정적 의미를, 후자는 긍정적 의미를 담고 있다. 대중에 대한 영향력을 획득하기 위해 논리보다 감성에 의존하고, 민중이 정치의 주인이라는 국민주권을 내세우는 게 포퓰리즘의 핵심이다. 정치학자 서병훈의 말대로 국민주권과 감성정치는 포퓰리즘의 숙명적인 두 구성 요소다.
최근 서구 포퓰리즘의 대표적인 두 형태는 ‘우파 포퓰리즘’과 ‘좌파 포퓰리즘’이다. 저널리스트 존 주디스의 ‘포퓰리즘의 세계화’에 따르면, 이 두 포퓰리즘은 엘리트 대 국민이라는 대립 또는 적대를 정치의 핵심으로 삼는 공통점을 갖는다. 하지만 우파 포퓰리즘은 이러한 적대에 국민 안에서의 ‘내집단 대 외집단’의 적대를 더한다. 여기서 외집단이란 이민자ㆍ난민ㆍ이슬람교도 등을 지칭한다.
포퓰리즘이 급부상한 데에는 세 가지 요인이 중요하다. 첫째, 불평등의 구조화다. 1980년대 신자유주의 시대가 열린 이후 불평등은 점차 강화됐다. 21세기에 들어와선 경제학자 토마 피케티가 말한 세습자본주의 경향마저 나타났다. 국민들은 불평등을 완화시킬 정치가 작동하기를 요구했지만, 기성 정치는 우파든 좌파든 대체로 무능했다.
둘째, 세계화의 증대다. 1970년대 이후 세계화가 본격화되면서 서구사회로의 이민의 물결이 거세졌다. 최근 서유럽에는 이슬람 난민의 유입이 급격하게 이뤄졌다. 호황의 시기에는 외국인 노동자에 대한 사회적 관용이 높았지만, 2008년 금융위기 이후 이민과 난민 정책은 예민한 정치 쟁점으로 부상했다.
셋째, 정보사회의 진전이다. 인터넷ㆍ스마트폰이 사회운동의 대중 동원에서 접착제의 기능을 맡았다면, 페이스북ㆍ트위터 등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는 국민과 정치사회 간 직접소통의 길을 열었다. 적잖은 국민들은 신문ㆍ방송의 기성 공론장을 기득권 권력의 하나로 인식했고, 그 결과 기성 공론장을 건너 뛰어 정치사회와의 직거래를 활성화시켰다.
요컨대, 불평등ㆍ세계화ㆍ정보사회가 가져온 전환기의 불확실성은 문제 해결에 무력한 기성 정치사회에 대한 실망과 거부를 낳았고, 이 실망과 거부의 공간에 포퓰리즘은 서식하고 성장했다. 포퓰리즘 시대는 이렇게 열린 셈이었다.
◇2020년대와 포퓰리즘의 미래
2020년대 포퓰리즘의 미래는 어떻게 볼 수 있을까. 이를 위해선 먼저 포퓰리즘의 특징을 다시 숙고할 필요가 있다. 정치학자 카스 무데와 크리스토발 칼트바서는 ‘포퓰리즘’에서 그 특징을 세 가지로 요약한다. 포퓰리즘은 사회를 ‘부패한 엘리트’와 ‘순수한 민중’으로 나누고, 정치를 ‘민중의 일반의지’의 표현으로 이해하며, 자유주의나 사회주의와 결합할 수 있는 그 중심이 얕은 이데올로기라는 것이다. 오늘날 사회와 정치의 현실을 위와 같이 파악한다면, 포퓰리즘은 좌파와 우파를 넘어서는 제3의 정치 대안으로 지지 받을 여지가 결코 작지 않다.
지난 2010년대 후반 포퓰리즘은 국가권력을 획득하는 데까지 나아갔다. 그리스 시리자 정부(2015), 미국 트럼프 정부(2017), 오성운동이 주도하는 이탈리아 연립정부(2018)는 대표적인 사례였다. 존 주디스는 포퓰리즘의 등장이 지배적 정치 이념의 수리를 요구하는 신호라고 분석했지만, 포퓰리즘은 이미 기성 정치를 대체하고 있다.
포퓰리즘을 연구하는 이들은 포퓰리즘에 내재한 반다원주의가 민주주의를 위협할 것이라고 경고한다. 포퓰리즘은 통합의 정치라기보다 분열의 정치다. 국민주권을 표방함에도 엘리트 대 국민의 이분법은 국민을 둘로 나누는 ‘두 국민 국가’의 그늘을 강화하고 있다. 물론 포퓰리즘이 부정적인 영향만을 미치는 것은 아니다. 포퓰리즘은 기성 정치에 긴장감을 불어넣어 새로운 개혁을 촉구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
전체적으로 조망할 때, 2020년대에 포퓰리즘을 내건 정치세력이 집권에 성공할 가능성은 열려 있다. 경제적 불평등과 사회적 격차가 완화되지 않는다면, 기성 정치사회의 역량에 대한 국민들의 신뢰가 계속해서 낮다면, 어느 나라든 포퓰리즘 세력을 선택할 수 있다. 정치의 재생산 방식이 변화된 것도 눈여겨봐야 한다. 포퓰리즘이 각광 받는 이유 중 하나는 포퓰리즘이 민주주의 제도보다 정치적 카리스마에 의존하는 ‘인물의 정치’라는 점에 있다. 인물의 정치에선 ‘권력의 인격화’가 진행되고, 미디어가 결정적 영향을 미친다. 우리 인류는 이미 이런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고 봐야 한다.
새롭게 열리는 2020년대에 대의민주주의가 기득권 정치라는 한계를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을지는 예견하기 어렵다. 기성 정치가 엘리트주의를 벗어나지 못할 때, 바로 그 자리에 국민주권을 앞세우는 포퓰리즘이 번성하며, 그 결과 포퓰리즘 시대가 계속 진행될 가능성이 높다고 나는 생각한다.
◇포퓰리즘과 한국사회
우리 사회 포퓰리즘 어법은 서구사회 어법과 사뭇 다르다. 우리 사회에서 포퓰리즘은 국가 재정을 고려하지 않은 채 추진되는 진보적 정치세력의 복지정책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쓰였다. 오늘날 지구적 차원에서 사용하는 포퓰리즘은 인기영합주의라기보다 국민주권주의에 가깝다. 서구 사회에서 포퓰리즘을 주도한 이들이 주로 우파라면 우리 사회에서 포퓰리즘을 주로 비판한 이들 역시 우파라는 점도 흥미롭다.
최근 정치학자 최장집은 현재 우리 민주주의가 처한 상황을 ‘정치의 양극화, 대의민주주의에 대한 공격, 직접민주주의를 선호하는 급진주의적 포퓰리즘의 등장’으로 분석해 관심을 끌었다. 촛불집회와 태극기집회, 그리고 국민청원을 위시한 직접민주주의에 포퓰리즘 요소들이 담겨 있다는 것은 부정하기 어렵다. 그러나 왜 이런 포퓰리즘 현상들이 현재 강화되고 있는지를 주목해야 한다. 문제의 핵심은 기성 정치의 무능에 대한 불만과 불신에 있다고 봐야 한다.
2020년대 우리 사회에서도 포퓰리즘의 영향력은 갈수록 커질 것으로 보인다. 정치사회에 대한 신뢰가 낮고 불평등과 격차가 해소되지 않는다면, 2022년 대통령선거를 즈음해 기성 정치세력이든 신흥 정치세력이든 포퓰리즘을 전면에 앞세울 가능성이 결코 작지 않다.
포퓰리즘은 국민주권의 회복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의 영원한 식솔이다. 그러나 제도정치를 무력화시킨다는 점에서 민주주의의 불편한 친구다. 민주주의와 포퓰리즘이 공생하는 시대가 우리 사회에서도 열리고 있다고 나는 전망한다.
김호기(연세대 사회학과 교수)
‘김호기의 굿모닝 2020s’는 2020년대 지구적 사회변동의 탐색을 통해 세계와 한국의 미래를 생각하는 한국일보의 연재입니다. 매주 화요일에 찾아옵니다. 다음주에는 ‘제4차 산업혁명’이 소개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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