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방곡곡 노포기행] 무엇이든 뚝딱… 공구골목 맥가이버 “만들면 고장 없으니 단골도 없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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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방곡곡 노포기행] 무엇이든 뚝딱… 공구골목 맥가이버 “만들면 고장 없으니 단골도 없죠”

입력
2019.12.28 04: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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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 대구 북성로 대길기업사 

대구 북구 대길기업사 차장오 대표가 만물상으로 불리던 철공소의 수 십년 일화를 얘기하며 웃고 있다. 1957년 장인의 길을 걷기 시작해 1969년 독립했다. 전준호 기자

오지 말라고 했다. 언제 문 닫을지도 모르는데 보여 줄 것도, 말할 것도 없다는 것이었다. 한때 무엇이든 주문만 하면 뚝딱 만들어 내는 ‘만물상’에 ‘맥가이버’였지만 세월 앞에 장사가 없었다.

사라질지도 모른다는 소리가 오히려 발길을 이끌었다. 지난 20일 내비게이션을 켜고 대구 북구 서성로 88의 18 대길기업사를 찾았다. 도로명 주소로 바뀌기 전에는 북성로 2가였던 이곳은 우리나라 최대 공구골목인 북성로 한쪽 구석에 터를 잡고 있다. 빛바랜 간판이 세월을 말해주고 있었다.

60여㎡ 규모의 대길기업사에는 기계를 만드는 선반과 연장통, 칼날, 망치, 절삭공구인 바이트, 드라이버, 돌림대, 쇠를 주로 뚫는 드릴링 머신, 작업할 가공품을 고정하는 바이스, 공작물을 연마하는 그라인더, 동력을 전달하는 막대 모양의 샤프트, 발동기, 용접기 등 온갖 구닥다리 기계와 자재가 널려 있었다.

대구 북구 대길기업사 차장오 대표가 대표적인 기계인 선반작업을 하고 있다. 전준호 기자

이곳 구석방에서 난로를 마주한 차장오(78) 대표는 여전히 말을 아꼈다. 옛날 화려했던 북성로 공구골목 얘기로 말문을 열었다. 북성로는 1905년 건설된 대구역과 멀지 않아 대한제국 말기부터 일본 자본이 몰려온 곳이다. 1906년 대구읍성이 허물어지고 만들어진 길이 북성로다.

1911년 발행된 조선총독부 관보에 따르면 당시 북성로에는 백화점과 철물점, 양복점, 곡물 상회 등 상점이 100개가 넘었다. 조선인이 운영하는 곳은 3곳에 불과했다.

광복 후에도 명성은 그대로 이어 갔다. 일본인이 빠진 곳에는 기계와 금속, 철물을 취급하는 상점이 들어섰다. 6ㆍ25 한국전쟁 이후 미군부대 폐공구 수집 상인이 이 일대에 터를 잡으면서 북성로는 군수물자 천국이 됐다. “북성로는 탱크도 만들어 낸다”는 말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1970, 80년대 들어서는 식품기계 상점도 들어오면서 북성로는 국내 최고의 기술자가 붐비는 최대 공구골목의 명성을 이어 왔다. 하지만 새로운 공단과 유통단지가 조성되면서 수작업에 의존한 장인들은 세월의 뒤안길로 묻히고 있었다.

대구 북구 속칭 '북성로 공구골목'에 철공 관련 업체들이 줄 지어 영업 중이다. 이곳도 1970, 80년대가 전성기였다. 전준호 기자

차 대표가 기억을 더듬었다. 경남 합천 태생인 차 대표는 16세였던 1957년 대구 대동철공소에서 장인의 첫발을 내디뎠다. 학교라고는 초등학교를 겨우 졸업했던 그에게 “공부시켜 주겠다”는 자형의 말이 결정적이었다. 공부 약속이 지켜지진 않았지만 그는 공장에서 쪽잠을 자며 열심히 일했다.

1965년 결혼한 그는 28세인 1969년 12년 만에 드디어 꿈에 그리던 독립을 했다. 비록 남의 공장 한편 10㎡ 정도 공간에 더부살이는 했지만 ‘문화철공소’라는 이름의 사장이 된 것이다.

그가 만드는 물건은 일정한 형태가 없었다. 만들어 달라는 대로 만들어 줬다. 일본에서 찍은 사진 한 장을 들고와 양계장 철망 짜는 기계를 주문하는 손님도 있었고, 건설 경기가 좋을 때는 벽돌을 실어 고층으로 올리는 기계도 만들어 줘야 했다. 높이 조절이 자유로운 폐쇄회로(CC)TV 선반도 제작했다.

도면도 없이 눈대중으로 만드는데도 정확했다. 연마기에 사용하는 ‘바베트 메탈’은 북성로에서 그만 만들 수 있는 있는 제품이다. 기계에 힘을 전달하는 부위가 잘 돌아가도록 유연제 역할을 하는 부품인데 보편화된 베어링보다 성능이 좋다.

심지어 공구의 기본 중 기본인 바이트도 직접 만들었다. 선반에 깎을 부품을 고정시킨 후 공정을 하려면 날카로운 바이트가 필수였는데, 당시만 해도 이 절삭공구가 대량공급되기 전이었다. 그는 부품의 종류에 따라 평면과 내ㆍ외부를 깎는 바이트를 직접 만들어 사용했다. 필요한 것은 무엇이든 자급자족했다.

대구 북구 대길기업사 차장오 대표가 불꽃을 튀기며 용접을 하고 있다. 전준호 기자

1970, 80년대는 집에서도 밀린 작업을 해야할 정도로 호황이었다. 직원도 3명이나 뒀다. 쌀 한 가마니가 1,500원, 5급 공무원 월급이 4,000원일 때 하루 버는 돈이 사무관 월급과 같았다. 농기계 수리 하나 잘 맡으면 7만원의 목돈도 만질 수 있었다.

성실한 데다 실력도 좋았다. 1970년 6월쯤 경남 합천군 낙동강 나루터 제방에 수해 방지 펌프를 설치할 때였다. 당시 사업자가 구입한 엔진과 양수기 펌프에 문제가 생겼다. 비가 퍼붓던 때라 철야작업도 마다하지 않았다. 다음 날 현장으로 가니 낙동강 물이 범람해 벌써 물바다가 되어 있었다. 500㎜ 펌프로 2시간 반 정도 작업하니 물이 빠졌다.

1971년 10월쯤에는 경북 영천 육군3사관학교의 대위가 찾아와 아파트에 연탄 올리는 기계를 만들어 달라고 했다. 4층짜리 아파트 2개동인데 집마다 연탄 100장씩 들여야 했다. 기계가 설치되고 연탄이 올라가자 군인들이 손뼉을 쳤다. 그는 발동기, 펌프, 양수기, 엔진, 연마기 등을 고치는 것이 주특기였지만 무엇이든 주문만 하면 안 되는 것이 없었다.

“호황기에는 가게를 비우는 것을 상상도 할 수 없었고, 1982년 1월 통행금지가 없어지기 전에는 집에 가지도 못할 정도로 일에 파묻혀 살았다”는 그는 “지금도 기계 부속이면 무엇이든 만들 수 있다”고 자신했다.

대구 북구 대길기업사 차장오 대표가 자재에 구멍을 뚫는 드릴링 머신을 조작하고 있다. 1957년부터 철공업을 시작한 그는 '단골 없는 장인'이다. 전준호 기자

그런데도 대길기업사에는 단골이 없다고 했다. 이곳에서 기계를 하나 만들어 가거나 수리해 가면 30년은 족히 고장 없이 사용하니 단골이 있을 턱이 없었다. 요즘 나오는 기계는 부품만 교체하면 되는 경우가 많아 더더욱 단골이 생길 일이 없다.

아찔한 순간도 있었다. 1975년 4월 5일 식목일에 경북 예천군 풍양면의 대형 양수장 소장이 찾아와 직경 900㎜ 펌프를 가공해달라고 주문했다. 생각보다 컸다. 그 후에도 몇 번 찾아온 소장은 양수기에 물이 새지 않도록 패킹을 하나 주문했다. 현장을 찾아 직접 설치한 후 전기 스위치를 올리는 순간 폭발음이 울렸다. 4㎝ 두께의 주철이 수압을 견디지 못해 터져 버린 것이다. 죽을 뻔했지만 다행히 발을 조금 다치는 것으로 끝났다.

정작 그를 괴롭힌 사건은 그 전에 발생했다. 1972년 철봉을 가공하던 중 끼고 있던 장갑이 기계로 말려 들어갔다. 순식간이었다. 오른손 중지와 약지를 잃었고 새끼손가락도 구부러졌다. 아침마다 세수할 때 느껴지는 자괴감이 그를 짓눌렀다. 망치를 잡아도 자꾸 손아귀에서 겉돌았다. 이를 악물었다. 지금은 세월이 흘러 너털웃음 한 번으로 지나가지만 무려 20여년간 트라우마가 그를 짓눌렀다.

대구 북구 대길기업사 내부에는 선반과 드릴링머신 등 공구 제작 기계와 부품들로 가득 차 있다. 전준호 기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1년 후에는 직원 한 명 때문에 사람에 대한 믿음도 잃을 뻔했다. 17세 직원이 망치질을 하다 이물질이 눈에 튀었다. 치료비를 주고 열흘 정도 병원에 보냈다. 그런데 이 직원이 나중에 “눈이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알아보니 치료비로 쌀과 연탄을 사고 만화방을 다닌 것이었다. 여기다 이 직원은 그를 상대로 1억5,000만원의 손해배상청구소송까지 제기했다. 당시로서는 천문학적인 소송에 기가 막혔다. 잘못이 없었던 터라 소송은 기각됐지만 가족처럼 여겼던 직원을 믿지 못하게 된 것은 두고두고 가슴 아픈 일이었다.

가족들은 여전히 그에게 큰 힘이 되고 있다. 아내와 딸 둘, 아들 둘은 항상 그의 든든한 지원군이다. 2003년 심장대동맥치환수술, 2015년에는 위암 수술을 받고도 멀쩡하게 버텨온 것도 가족 덕분이다.

“자식들이 기계에 관심이 없어 천만다행”이라는 그는 “모두 다 결혼해 대구에서 잘 살고 있다”고 말했다.

지금 대길기업사를 찾는 고객은 가장 돈이 안 되고 골치 아픈 물건만 맡기고 있다. 기계부품 한두 개만 주문하는데 이를 선뜻 해줄 곳이 없는 것이다. 이달 초에도 기계부품 하나를 맡긴 손님이 “차 한잔 하시라”며 1만원을 더 주고 갔다. “받을 이유가 없다”고 하니 “부품 고치려고 열 집도 더 헤맸다”며 손에다 쥐어줬다.

대구 북구 대길기업사 차장오 대표가 구석방에서 최근 주문받은 도로 표지판 받침대를 들어보고 있다. 그의 사무실에는 옛날 징을 만들던 기계를 제작한 후 시험용으로 제작한 징도 남아있다. 전준호 기자

이날도 그는 도로 표지판 받침대에 도색을 하고 있었다. 60개 주문을 받았다고 했다. 하지만 단골이 없는 대길기업사의 손익계산서는 위태로웠다. 집세와 전기세를 내지 못할 정도가 되면 문을 닫아야 하는 것이다.

일감이 크게 없다 보니 출퇴근 시간도 따로 없다. 오전 10시쯤 오토바이를 타고 와 문을 열고는 저녁까지 손님 한 명 없이 혼자 보낸 적도 있다. 그와 같이 북성로를 누볐던 기술자와 사장들도 모두 세상을 등졌거나 문을 닫은 지 오래다.

가족들은 그에게 일을 그만두라고 입을 모으고 있다. 그도 말로는 “문을 닫겠다”고 눈만 뜨면 다짐하고 있지만 수십 년 손때 묻은 노포를 접는 것이 그렇게 쉽지는 않다.

“북성로에서 가장 싼 집세를 내고 있지만 이마저 부담된다”는 차 대표는 “기계도 사람만큼 나이가 들어 움직이기 힘들다”면서도 ‘애마’인 오토바이를 몰며 북성로를 누비고 있다.

대구=전준호 기자 jhjun@hankookilbo.com

대구 북구 대길기업사 약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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