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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일본, 다른 일본] 억눌림 감추는 일본 젊은이... 그들도 '82년생 김지영'에는 공감

입력
2019.12.18 04:40
16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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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함’의 문화적 연대를 생각하다

일본에서도 주목 받고 있는 한국 소설 ‘82년생 김지영’을 통해 한국과 일본 젊은이들 사이의 문화적 연대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도쿄대 캠퍼스 사진 김경화・일러스트 김일영】
일본에서도 주목 받고 있는 한국 소설 ‘82년생 김지영’을 통해 한국과 일본 젊은이들 사이의 문화적 연대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도쿄대 캠퍼스 사진 김경화・일러스트 김일영】

돌이켜보니 일본의 대학에서 교편을 잡은 지 8년이 넘었다. 젊은 층이 주도하는 인터넷 문화를 연구하는 필자에게 대학은 더할 나위없이 좋은 연구의 장이다. 좋든 싫든 학생들과 아옹다옹하는 사이에, 일본의 젊은이들이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 때문에 고민하는지, 또 변화하는 세상은 그들에게 어떤 의미인지 전해지기 때문이다.

얼마 전, 한 졸업생으로부터 이메일을 받았다. 발군의 유머감각을 지닌 그녀는 한때 ‘오와라이 (お笑い)’ 라고 불리우는 대중적 코미디언이 되기를 꿈꾸었지만, 취미를 직업으로 삼고 싶지 않다는 나름의 생각으로 꿈을 접고 벤처 기업에 취직했다. 지난해에는 승진이 빠른 신생 기업답게 입사 1년차에 매니저 직급을 달았다는 신나는 소식도 전해주었다. 그런데 이번에 받은 녀석의 이메일은 뜻밖에도 소설 “82년생 김지영”을 읽고 많은 생각이 들었다는, 다소 진지한 내용이었다. 졸업 전이었다면 책에 대해 함께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는 아쉬운 마음도 담겨져 있었다.

일본에서 이 소설이 베스트셀러라는 말은 익히 들었지만, 의외였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회원국의 양성 평등 지표에서 일본은 한국과 나란히 최하위로 평가된다. 실제로 일본에서 체감하는 바, 성 역할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크게 기울어져 있다. 대기업 등 조직에서 여성은 남성의 보조 역할을 맡는 것이 일반적이다. 한국처럼 부모가 헌신적으로 양육을 돕는 일은 기대하기 어려우므로, 많은 여성이 출산과 함께 직장을 그만둔다. 일본의 많은 대중매체도 “여자가 결혼을 잘 하려면 요리 솜씨가 필요하다”, “좋은 여자는 세 발자국 뒤에서 남자를 응원할 줄 안다”는 등 ‘문제성 발언’을 쏟아낸다. 어떻게 보자면, 한국보다도 심각한 불균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젊은이들이 양성 평등이나 남녀 차별에 대한 강한 문제 의식을 표명하는 경우는 드물다. 몇 년 전 일본에서 지방 의회 여성 의원이 육아 공간이 없는 것에 대한 항의의 의미로 젖먹이 아기를 안고 의회 본회의장에 들어 가려다 출입을 금지 당했던 일이 화제가 되었다. 수업에서 이 일에 대해 토론했는데, 여학생을 포함해 학생의 70% 이상이 “회의장에 출석할 자격이 있는 것은 의원 뿐이라는 법을 어긴 이상, 금지는 타당하다”는 보수적인 의견이어서 낙담한 적도 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82년생 김지영”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싶다는 졸업생의 말은 신선한 충격이었다. 그녀는 소설을 어떤 관점에서 읽은 것일까. 한국 사회를 대변하는 이야기라는 점에서 흥미를 느낀 걸까. 아니면, 직장인이 된 뒤에 비로소 불균형적인 성 역할을 인식하게 된 것일까. 내친 김에 하루 날을 잡아서 독서 토론회를 열기로 했다. 그녀와 함께 이 책을 읽은 졸업생 몇 명, 졸업 논문을 지도 중인 재학생 몇 명과 함께 조촐한 세미나를 가졌다. 의도했던 것은 아니지만 참가자는 모두 여성이었다.

독서 토론회는 의외로 진지했다. 졸업생들은 “지방 근무를 희망했지만 여자라는 이유로 상사에게 거절당했다” 라든가, “여성을 위한 근무 환경은 좋은 편이지만, 관리직은 전원 남성이라 의아하다”라는 등 초보 직장인이 느낄만한 차별이나 불안에 대해 이야기했다. 재학생들도 어릴 적 경험이라면 풀어놓을 이야기가 얼마든지 있었다. 고교 시절 남학생에게 스토킹 피해를 당한 여자 동급생이 ‘네가 꼬신 것 아니냐’는 억울한 취조를 받은 끝에 학교를 그만두었다든가, 남동생에게는 설거지도 시키지 않으면서 부모님으로부터 여자니까 ‘가사일을 도우라’고 늘 꾸지람을 들었다든가.

한편으로는, “여성이라서 생기는 일을 늘 부정적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을까. 여성이라 좋은 점도 많지 않은가”, “엄마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다. 엄마는 어떤 마음으로 살아왔던 것일까” 라는 이야기도 나왔다. 엄마에게는 이 책을 권하고 싶지 않다는 솔직한 의견도 있었다. 자칫 남편과 자식을 위해 최선을 다해 봉사하며 살아온 엄마의 삶을 부정하는 것처럼 비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독서 토론회는 “세상의 부당함에 대해서는 당당하게 의견을 밝히자”는 애매한 다짐으로 마무리 되었지만, 모처럼 속 이야기를 털어놓은 듯 다들 후련한 표정들이었다.

무엇보다 인상적이었던 장면은 “82년생 김지영”을 읽었다고 처음으로 이메일을 보냈던 그 졸업생이 “정말 오랜만에 마음 속 솔직한 생각을 다 토해냈다”고 환하게 웃었던 순간이었다. 여성으로서 느끼는 차별에 대한 답답함도 있겠지만, 수직적인 기업 문화 속에서 넘치는 유머 감각과 개성을 애써 억눌러야 하는 초보 직장인의 입장 역시 그녀에게는 녹녹치 않은 질곡일 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한국에서 말이 나오는 족족 큰 화제를 불러 일으키는 이 소설에 대해서는 굳이 비평을 더할 필요가 없을 것 같다. 솔직히 말하자면, 그럴 정도로 매력이나 비범함을 느끼지는 못했다. 소설은 집에서 밥을 먹고, 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연애를 하는, 육아를 하는 평범한 에피소드들로 이루어져 있다. 오래 전부터 그래왔기 때문에 문제라고 의식하기 조차 어려운 문제를 드러낸다. 집요하게 일상을 파헤쳐 왜곡된 인식을 바로잡고자 하는 소설의 의도를 과소평가할 뜻은 없다. 다만, 이 이야기가 일본의 젊은 여성들에게 왜 공감을 불러 일으키는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남아 선호로 아이들의 성비가 현저하게 다르다든가, 명절마다 며느리가 시댁에서 허드렛일을 한다든가 하는 상황은, 지금의 일본 사회와는 거리가 멀다. 여성에 대한 공공연한 혐오가 사회 문제로 불거지는 일도 드물다. 한국의 독자들에게 가장 와 닿는 이런 내용에 대해 일본의 독자들이 진심으로 공감하기는 어려울 것 같다. 일본의 젊은 여성들은 그보다도 오히려 일상 생활 속에서 느끼는 크고 작은 부담감과 이질감을 당당하게 ‘억압’이라고 솔직하게 선언하는 것에 후련함을 느끼는 듯했다.

그것이 남성 중심 사회이든, 기업의 수직적 질서이든, 정해진 답변과 성실성을 요구하는 학교이든, 혹은 소셜 네트워크에서 ‘좋아요’를 누르지 않으면 안 된다는 무언의 압력이든, 사회는 다양하고 기발한 방법으로 개인을 틀에 가둔다. 일상 생활을 끊임없이 조이는 이런 억압에 분노할 기회는 별로 없다. 예전부터 그래 왔으므로, 혹은 모두 그렇기 때문에, 라는 이유로 순응할 것을 요구받기 때문이다. 일본에는 “공기를 읽는다(空気を読む)”는 표현이 있는데, 집단의 전체적인 방향성과 분위기를 파악하는 것이 사회인의 성숙한 매너로서 요구되는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생활 속에서 느끼는 작은 부조리에 일일이 분노를 표명하는 것은 부담스럽다. 어른스럽지 못하다는 평가를 감내하거나, 원치 않게 괴짜나 주변인으로 살아가는 선택을 하는 결과가 되기 때문이다. ‘82년생 김지영’은, 여성이니까 겪는 차별적 상황에 대한 공분에 더해, “공기를 읽는다”는 미덕의 무게에 짓눌려온 불편함을 사회 문제로 정의하는 해방감을 준다. 바로 그 점이 한국 사회와는 다른 문화적 배경, 다른 젠더 감수성을 가진 일본의 젊은이들에게 공감을 불러일으켰던 것이 아닐까.

‘여자 김지영’에 대해 공감하지 않는 이도 많다고 한다. 같은 여자이지만 자신은 겪어 본 적이 없다고 하는 이도 있고, 남자로서의 괴로움을 알아달라는 이도 있다. 하지만, 그들도 ‘인간 김지영’이 가정에서, 직장에서, 아니면 거리에서 조우했던 작은 폭력과 이질감에는 공감할 것이다. 일상 생활 속에서 눈치를 보고 자기를 억누르는 불편함은 평범한, 보편적인 경험인 것이다. 한국 사람 뿐 아니라, 일본 사람도. 여자 뿐 아니라 남자도. 평범함, 그 속에 숨어있는 문화적 연대의 가능성을 엿보았다.

김경화ㆍ칸다외국어대 준교수

김경화 교수
김경화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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