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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의 운명적 만남은 악몽처럼 시작됐다. 때는 지난 7일 토요일 오전 10시쯤. ‘양준일이 화제인데 기사 하나 쓰는 게 어떨까요’. 주말 온라인 기사 대응을 위해 모인 부별 당직자 카톡방에 이런 글이 올라왔다. 이날 당직을 총괄한 A부장이 문화부 당직자였던 내게 한 지시였다.
누구나 편히 넘어갔으면 하는 게 주말이다. 허나 피해갈 길은 보이지 않았다. 온라인은 양준일 얘기로 들썩이고 있었다. 전날 방송된 JTBC 예능프로그램 ‘투유 프로젝트-슈가맨3(‘슈가맨3’)’에서 양준일이 깜짝 귀환해 입소문을 탄 것이다.
1991년 노래 ‘리베카’로 데뷔한 양준일은 1980~90년대 지상파 음악 방송 재생으로 사람들이 몰리는 유튜브 채널, 일명 ‘온라인 탑골 공원’에서 가장 주목받고 있었다. 대중문화와는 담을 쌓고 지낼 것 같던 A부장까지 관심을 보인 인물, 손 놓고 있을 수만은 없는 일이었다. 커피 한 잔을 내리며 머리에 일던 꾀를 다스린 것도 잠시, TV를 켜자 주말 노동에 대한 반감은 난로 위에 떨어진 눈 녹듯 순식간에 사라졌다. ‘리베카’의 쟁쟁거리는 기타 소리에 맞춰 양준일이 리듬을 타는 몸짓은 눈을 단숨에 사로 잡았다. “오!”. 올해 지천명(知天命ㆍ50세)의 나이가 된 중년의 가수는 후렴에 맞춰 소리를 지른 뒤 깡충깡충 무대를 뛰었다. 그는 무대에서 여유롭고 자유로웠다. K팝 아이돌그룹의 자로 잰 듯 규격화된 군무에 길들어 있던 터라 해방감마저 들 정도였다.
양준일은 시대의 분위기를 거슬러 산전수전을 겪었다. 신승훈과 이승환의 발라드가 유행하던 시절에 그는 힙합풍의 댄스곡(‘리베카’)을 들고나와 외면받았다. 1991년은 서태지와 아이들과 듀스도 데뷔하기 전. 그의 파격에 동료 음악인들도 등을 돌렸다. 양준일은 작사 제의를 번번이 거절당했다. 한국계 미국인인 그는 결국 서툰 한국어 실력으로 가사를 써야 했다. ‘나의 사랑 리베카’ 등 그의 낯선 노랫말에 돌아온 건 조롱이었다. 그런 그가 서울 대학로 인근 야외무대에 오르자 어디선가 돌이 날아왔다. 누군가의 일탈을 받아들이지 못해 퍼부은 폭력이었다.
양준일은 ‘슈가맨3’에서 “(출입국 사무소 직원에게) 너 같은 사람이 한국에 있는 것이 싫다며 내가 이 자리에 있는 동안 네게 (비자 갱신) 도장을 찍어주지 않을 것”이란 말을 들었다고 했다. 사실이라면 개인을 향한 공권력의 횡포다. 고향에서 존재를 철저히 부정당한 심정은 어땠을까. 그는 출국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 양준일은 1집을 내고 1년 뒤인 1992년에 미국으로 떠났다. 그가 한국에 머문 1년 동안 낸 두 장의 앨범은 자연스럽게 묻혔다. 그는 남들과 달라 혐오의 대상이 됐고, 내쫓김까지 당했다. 양준일은 2000년까지 8년 동안 한국을 찾지 않았다. 양준일을 향한 현재의 환호는 ‘못난’ 과거에 대한 반작용일지 모른다. 우리가 무엇인가를 잘 알고 있다고 말할 때 그건 우리가 무엇을 잘못 알고 있다는 뜻. 양준일은 우리가 28년 전 쓴 폭력의 역사다. 그에 대한 뒤늦은 환호를 아파해야 하는 이유다.
양준일은 미국 플로리다주의 음식점에서 서빙을 하고 있었다. 양준일이 올여름부터 ‘탑골공원 GD(빅뱅 멤버)’라 불리며 다양한 세대의 관심을 받고 있었지만 쉬 한국 땅을 밟지 못한 것은 생계 문제 때문이었다고 ‘슈가맨’ 책임프로듀서가 기자와의 통화에서 말했다. 우리가 ‘밖’으로 내몬 게 비단 양준일 뿐이었을까. 세상은 달라지지 않았다. ‘마녀사냥’은 28년째 이어지고 있다. 아일랜드 록밴드는 지난 8일 첫 내한 공연에서 스크린에 설리 사진을 띄웠다. 한글로 ‘우리 모두가 평등해질 때까진 우리 중 누구도 평등하지 않다’는 메시지도 전했다. 배척의 흉터를 빠트림 없이 기억하기, 우리가 다양성의 시대를 꽃피울 수 있는 유일한 길일 게다.
양승준 문화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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