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와인만큼 역사와 문화가 깊이 깃든 술이 있을까요. 역사 속 와인, 와인 속 역사 이야기가 매주 수요일 <한국일보>에 찾아옵니다. 2018년 한국소믈리에대회 어드바이저 부문 우승자인 시대의창 출판사 김성실 대표가 글을 씁니다.
향연이 열리는 남자만의 방, 안드론. 천장과 벽이 화려한 그림으로 장식되어 있고, 긴 의자가 6~12개쯤 놓여 있다. akg 제공 ⓒPeter Connolly

연말이다. 거리 곳곳에서 구세군의 종소리가 들리는 크리스마스 즈음이면 측은지심이 동하면서 마음이 가난해진다. 그런데 올해는 상위 1%라는 사람들이 합법적으로 아무렇지 않게 누리는 특권의 일각을 본 탓일까, 다른 이유로 마음이 가난(불편)했던 한 해였다.

고대 그리스에도 상류층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 있었다. 바로 심포지엄, 즉 향연이다. 이 모임은 아테네 시민이자 상류층인 성인 남성만의 모임이었다. 이들은 흡사 미국 주류를 칭하는 와스프(WASPㆍ백인 앵글로색슨 프로테스탄트)를 떠오르게 한다.

향연은 안드론(Andron)이라는 남자만의 방에서 열렸다. 당연히 이민자, 미성년자, 여성, 노예는 향연에 참여할 수 없었다. 물론 시중을 들거나 광대 노릇을 할 경우는 제외하고 말이다. 말하자면, 향연은 귀족의 집에서 열리는 일종의 홈파티였다.

향연에 초대된 사람들은 몸을 깨끗이 씻은 뒤 좋은 옷을 입고 참석한다. 먼저 식사를 한 다음 남자만의 방으로 자리를 옮긴다. 천장과 벽에 화려한 그림이 장식된 안드론에는 침대 비슷한 의자가 6~12개쯤 놓여 있다. 의자 하나당 두 명씩 쿠션을 베고 비스듬히 눕듯 앉는다. 그러면 노예가 참석자들의 발을 씻기고 몸에 기름도 발라준다.

참석자들은 곧 심포시아르크(향연 주재자)를 뽑는데, 제비를 뽑아 정하거나 호스트가 이 역할을 맡는다. 심포시아르크는 마실 와인의 종류는 물론, 물과 와인의 희석 비율과 마실 양을 결정하고, 토론 주제를 정하는 등 향연을 전반적으로 이끈다.

와인과 물을 혼합하는 용기인 크라테르(숫자 순서대로), 물병인 히드리아, 헤라클레스와 네메아의 사자가 그려진 오이노코에, 개인 잔인 킬릭스. 월터스아트뮤지엄ㆍ위키미디어ㆍ대영박물관ㆍ대영박물관 제공

먼저 심포시아르크가 와인 첫 잔을 스트레이트로 마신 뒤 ‘크라테르’라 불리는 혼주기에 물과 와인을 섞게 한다. ‘히드리아’라는 물동이에 담긴 물을 크라테르에 따른 후 와인을 섞는데, 비율은 3:1, 5:3, 3:2로 늘 물을 더 많이 넣었다고 한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와인에 물을 타지 않고 스트레이트로 마시는 것을 야만적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희석한 와인을 고수레하듯 뿌리면서 신에게 기도와 찬양을 한다. 이 헌주식은 향연을 진행하는 동안 세 번 정도 한다. 이윽고 심포시아르크의 시작 신호에 따라 노예나 미소년이 ‘오이노코에’라는 저그(Jugㆍ주전자)에다 와인을 담아 ‘킬릭스’라는 손잡이가 두 개 달린 넓고 얕은 잔에 와인을 따른 뒤 참석자에게 바친다.

가끔은 안드론에 귀족 청소년들도 참석했다. 추천을 받아 참석한 이들은 주류 사회에 진입하기 전에 향연의 분위기를 미리 익혔다고 한다. 다만 이들은 어른들처럼 누워서는 안 되며 와인을 마시지도 못했다고 한다.

향연에서 코타보스 게임을 하고 있는 사람(왼쪽)과 절제하지 못하고 와인을 너무 많이 마셔 토하는 사람. 고대 그리스에서는 와인에 물을 타지 않고 마시거나, 무절제하게 마시는 사람을 야만인으로 취급했다. 위키미디어 제공

사실 향연에서는 (크세노폰이 쓴 ‘향연’에서처럼) 일상 대화를 나눌 때가 더 많았지만, (플라톤이 쓴 ‘향연’에서처럼) 진지한 토론도 꽤 나눈 듯하다. 그래서인지 소크라테스나 플라톤 같은 철학자는 자주 초대받았다. 참석자들이 대화를 나눌 때면 악기 연주자, 무용수, 재담꾼이 분위기를 띄웠다. 또 정식 순서의 하나로 ‘코타보스’, 즉 와인으로 하는 놀이를 하기도 했다. 번외로 어떤 이들은 미소년이나 매춘부와 함께 잠자리도 가졌다.

이처럼 향연은 와인으로 시작해 와인으로 끝나는 와인 파티였다. 당시 그리스와 로마에서는 와인 산업이 발달해 누구나 와인을 마실 수 있었다. 지중해 연안에 위치한 그리스와 로마는 기후와 토양이 와인 생산에 적합한 덕에 와인은 올리브, 곡물과 함께 경제를 떠받치는 주요 품목이었다.

물론, 모두가 같은 등급의 와인을 마시지는 못했다. 병사들은 식초가 되기 직전의 시큼한 와인을 보급받았고, 노예나 가난한 사람은 양조하고 남은 포도줄기, 포도씨, 포도껍질에 물을 넣어 발효한 와인을 마셨다. 로마에서는 반식초 와인을 ‘포스카’, 찌꺼기 와인을 ‘로라’라고 이름했다. 예나 지금이나 최고급 와인은 특권층만의 몫인가 보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에게 (쓸개를 탄) 신 포도주를 적신 해면을 갈대에 달아 그의 입술을 적셔주려 하는 로마병사의 모습. 마태복음에는 해당 병사가 무리 중의 '한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브루클린박물관 제공

문득,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마지막이 떠오른다. 누군가가 ‘신 포도주’를 묻힌 해면을 갈대(지팡이)에 달아 예수의 마른 입술을 적셔주려 했다. 아마 그 포도주는 포스카 혹은 로라로 짐작된다. 그는 마지막 외침을 끝으로 인간의 생을 끝냈다. 신의 아들이기에 앞서, 그는 분명 기층민들이 마시던 포도주를 마시며 모든 사람의 입술을 좋은 포도주로 적셔 주고픈 혁명가였으리라.

이 글을 쓰고 있자니, ‘여성, 몽골로이드, 안 돌아간 탕자’인 필자는 무료 와인 시음 행사를 손꼽아 기다리는 와인 애호가로서 마음이 가난해지는 이유가 하나 더 생겨버렸다. “마음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정녕 이 말씀이 (가급적이면 와인으로) 이루어지기를!

시대의창 대표ㆍ와인 어드바이저

공감은 비로그인 상태에서도 가능합니다

web_cdn 저작권자 © 한국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라이프 최신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