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년 말 튀니지 혁명과 이듬해 이집트, 리비아 등지로 확산된 이른바 ‘아랍의 봄(아랍 민주화 운동)’이 2010년 12월 17일, 한 노점상 청년의 분신으로 시작됐다. 튀니지 수도 튀니스에서 남쪽으로 300km 거리에 있는 도시 시디부지드(Sidi Bouzid)에서 리어카로 과일과 야채를 팔던 26세 청년 모하메드 부아지지(Mohamed Bouazizi, 1984~2011)였다.
그는 하루 전 200달러어치의 물건을 외상으로 받아 그날 아침 8시 무렵 장사를 시작했다. 2시간여 뒤 단속반원이 들이닥쳤다. 처음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그는 뇌물을 줄 형편이 아니었다. 그는 한 달 장사로 140달러 가량 벌었고, 그 돈으로 가족을 부양하고 여동생 대학 학비를 댔다. 그의 꿈은 작은 트럭을 사서 장사를 하는 거였지만, 거의 저축을 못하는 판이었다. 단속반원들에게 그는 늘 만만한 표적이었다.
알려진 바 45세의 여성 단속 공무원(Faida Hamdi)은 그의 뺨을 때리고 침을 뱉으며 모욕했고, 전자 저울을 몰수하고, 수레의 과일들을 땅에 쏟았다. 동료 남성 단속반원도 그를 구타했다. 현장을 정리한 뒤 저울이라도 돌려받으려고 찾아갔지만 담당자는 아예 만나주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는 분신 직전 “이제 어떻게 살라는 말이냐”고 절규했다.
그는 세 살에 건설노동자 아버지를 여의었다. 어머니는 시동생과 재혼했지만 가난을 벗어나진 못했고, 얼마 안되는 토지조차 은행 빚에 넘어갔다. 부아지지는 10세 무렵부터 일을 해야 했지만 고교 중퇴 학력으로 제대로 된 일자리를 찾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다. 벤 알리(Zine El Abidine Bern Ali)의 23년 장기독재 체제 하의 당시 튀니지 청년 실업률은 30%에 육박했다. 부아지지의 분신은 그 청년들의 분노에 불을 당겼고, ‘재스민 혁명’이라고도 불리는 튀니지 혁명이 그렇게 시작됐다. 전신 중화상을 입은 부아지지는 이듬해 1월 4일 숨졌고, 벤 알리는 1월 14일 하야 후 사우디아라비아로 망명했다.
부아지지는 중동 민주화의 순교자로 불린다. 2012년 4월 튀니지 새 정부는 부아지지 추모 우표를 발간하기도 했다. 하지만 고물가와 실업률 등 경제 여건은 이후로도 표나게 나아지지 않았다. 외신은 지난 11월 29일 생활고에 시달리던 25세의 일용 노동자 압델와헤브 하블라니가 분신했고, 청년들의 시위가 다시 격화하고 있다고 전했다. 최윤필 선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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