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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든 달려가 배워라”… ‘글로벌 LG’ 일군 구자경 명예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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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든 달려가 배워라”… ‘글로벌 LG’ 일군 구자경 명예회장

입력
2019.12.15 17:11
수정
2019.12.15 20:39
8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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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범대 졸업 후 모교서 교편 잡다 ‘공장 지킴이’로 현장 경영 익혀

70여개 연구소 설립 R&D 힘써… 재임 기간 매출 1150배 성장

구자경 명예회장 말말말. 그래픽=강준구 기자
구자경 명예회장 말말말. 그래픽=강준구 기자

“차분하게 고인을 애도하려는 유족의 뜻에 따라 조문과 조화를 정중히 사양하오니 너른 양해를 바랍니다.”

15일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의 빈소가 차려진 서울시내 한 대형병원 장례식장. 가족장으로 치러진 만큼, 빈소는 조용하고 차분했다. 유명인이나 대기업 총수일가의 장례식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취재진 카메라는 물론이고 각계 인사들의 조문 행렬과 줄줄이 늘어선 조화도 찾아볼 수 없었다. 문재인 대통령과 문희상 국회의장, 이낙연 국무총리, LG 임직원 일동, GS 임직원 일동 등이 보낸 조화만이 소박하게 빈소를 지켰다.

조문객도 사돈 지간인 LG, GS 총수 일가와 전ㆍ현직 LG그룹 임원들이 대부분이었다. 허창수 GS 명예회장과 김쌍수 전 LG전자 부회장, 노기호 전 LG화학 사장 등이 이날 빈소를 찾았다. 다만 김상조 청와대 정책실장과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 박용만 대한상공회의소 회장, 황각규 롯데지주 부회장, 정몽준 아산재단 이사장, 정기선 현대중공업 부사장, 이명희 신세계 회장, 정용진 신세계 부회장, 박정원 두산그룹 회장, 김윤 삼양홀딩스 회장, 이웅렬 전 코오롱그룹 회장, 박삼구 전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 등도 장례식장을 방문, 재계 ‘큰 어른’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허창수 회장은 “산업화의 기틀을 만든 선도적인 기업가였다”고, 이낙연 총리는 “소박한 풍모로 국민의 사랑을 받는 기업을 키웠다”고 추모했다.

향년 94세로, 14일 별세한 구 명예회장은 25년 재임기간 동안 LG의 매출을 260억원에서 30조원대로 약 1,150배 성장시킨 입지적인 인물이다. 국토가 좁고 천연자원이 부족한 한국은 기술 경쟁력으로 승부를 봐야 한다는 ‘강토소국(疆土小國) 기술대국(技術大國)’ 경영신념은 현재 LG그룹의 주력사업인 화학과 전자 부분의 기틀을 마련하는 토대가 됐다. 1987∼89년에 고인이 회장을 지냈던 전국경제인연합회는 “대한민국 화학 산업을 일궜고 전자산업을 챙기며 기술입국의 견인차 역할을 했다”고 추도했다.

구 명예회장은 1925년 4월 경남 진주에서 부친인 구인회와 모친 허을수의 6남4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진주사범학교 졸업 후 모교였던 지수초교와 부산사범대 부속 초교에서 5년을 보냈는데, 학교 규율을 강조해 ‘호랑이 선생님’이라고 불렸다. 당시에도 그는 “나라가 힘이 강해지려면 기술이 발전해야 하고, 훌륭한 기술자가 많이 나와야 한다”고 기술의 중요성을 강조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LG 창업주인 부친의 부름으로 1950년 락희화학에 입사한 뒤엔 ‘공장 지킴이’로 나섰다. “고생을 모르는 사람은 칼날 없는 칼이나 다름없다”는 선친의 뜻에 따라 공장에서 숙직하고, 직접 제품 포장을 하며 십 수 년 넘게 ‘현장 경영’을 익혔다. 그러다 구인회 선대 회장이 62세로 1969년 12월31일 타계하자, 장남 승계 원칙에 따라 45세에 LG그룹 2대 회장에 취임했다.

1970년 1월 취임 당시의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 LG그룹 제공
1970년 1월 취임 당시의 구자경 LG그룹 명예회장. LG그룹 제공

구 명예회장은 회사를 글로벌 기업으로 키우기 위해 핵심 기술 확보를 최우선 목표로 삼았다. “세계 최고가 있는 곳이면 어디든지 달려가서 배우고, 거기에 우리의 지식과 지혜를 결합해 철저하게 우리 것으로 만들어야 한다”고 거듭 강조를 하면서 기술 연구개발(R&D)에 승부를 걸었다. ‘연구개발의 해’, ‘기술선전’, ‘연구개발 체제 강화’ 등 표현만 달라졌을 뿐 구 명예회장 재임 기간 동안 기술은 LG그룹의 주요 경영가치에서 자리를 밀려난 적이 없다.

실제 그는 1976년 국내 민간기업 최초로 금성사(현 LG전자)에 전사적 차원의 중앙연구소를 설립토록 했고, 1979년에는 대덕연구단지 내 민간연구소 1호인 럭키중앙연구소를 출범시켰다. 1985년에 국내에선 처음으로 제품시험연구소를 개설하는 등 재임기간 동안 국내외에서 70여개 연구소를 만들었다. 그의 ‘기술경영’은 당시 금성사에서 19인치 컬러TV, 전자식 비디오카세트 녹화기(VCR), CD플레이어, 슬림형 냉장고 등 수많은 제품을 국내 최초로 개발하는 원동력으로 자리했다.

당시만 해도 생소했던 혁신적인 경영방식을 재계에 도입하기도 했다. 구 명예회장은 1988년 회장에게 의존하던 의사결정 구조를 전문경영인 중심의 자율과 책임 경영체제로 바꿨다. 1990년에는 고객의 만족을 핵심으로 여기는 고객가치 경영이념인 ‘고객을 위한 가치창조’와 자본ㆍ기술ㆍ설비보다 사람을 중히 여기는 ‘인간존중의 경영’도 선포했다. 그룹 문서 결재란에 고객결재 공간을 회장 결재 자리 위에 만들고 회의실마다 고객의 자리를 별도로 마련하기도 했다.

글로벌 LG의 기틀을 마련한 구 명예회장은 1995년 2월 스스로 경영 일선에서 물러났다. 이는 국내 최초의 대기업 ‘무고(無故)’ 승계로 기록됐다. 그는 퇴임에 앞서 사장단에게 “그간 혁신을 성공시킬 수 있는 기반을 다지는 노력을 충실히 해왔고 그것으로 나의 소임을 다했다”며 “이제부턴 젊은 세대가 그룹을 맡아서 이끌어야 한다고 결론을 내렸다”고 말했다. 그는 은퇴 이후엔 버섯 연구 등 취미활동에 열성을 쏟으면서 철저하게 ‘자연인’으로 여생을 보냈다.

변태섭기자 libertas@hankookilbo.com

류종은기자 rje312@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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