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대학가에서 노예제에 연루된 과거를 속죄하고 후손들에게 배상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명문 조지타운대 학생회가 올해 4월 노예제에 얽힌 학교의 과거사를 반성하며 ‘화해비용(reconciliation fee)’을 납부하자는 안을 투표에 부쳐 통과시킨 후 다른 대학들에서도 관련 논의가 번지는 모습이다.
버지니아대학이 이끄는 ‘노예제 연구 대학 모임’에 56개 이상의 대학들이 참여해 자신들의 학교가 노예제와 어떻게 연루됐는지를 조사하면서 관련 대응책을 공유하고 있다고 AP통신이 최근 전했다. 특히 노예제와 관련된 기념물이나 건물 이름을 변경해왔던 대학들이 이제는 배상 문제를 공론화하는 단계로 나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배상 논의의 기폭제가 된 것은 조지타운대 학생회의 역사 반성이었다. 학생회는 지난 4월 한 학기마다 27.2달러(약 3만2,000원)를 화해비용으로 납부할 것을 제안하는 총투표를 시행했다. 학생회의 제안은 총투표 참여자 3,845명 가운데 66%의 찬성으로 가결됐다. 화해비용으로 책정된 27.2달러는 조지타운대를 설립한 메릴랜드 예수회가 1838년 학교의 재정적 어려움을 타개하기 위해 팔아 넘긴 272명의 노예를 상징하는 것으로, 기금을 모아 그 후손들을 지원하겠다는 게 학생들의 생각이다. 일단 대학당국은 지난 10월 학생들의 취지를 존중한다면서도 학생들의 납부 대신 학교측이 주도해 40만달러의 기금을 모으겠다고 발표했다.
버지니아신학교는 지난 9월 자신들의 학교에서 일했던 노예들에 대한 사죄로 170만달러의 기금을 조성해 흑인 성직자들을 지원하는 데 할당하겠다고 발표했다. 2년간의 조사를 통해 학교 설립자나 기부자들이 노예제와 연관된 사실을 밝혀낸 프린스턴신학교는 지난 10월 과거 노예경제로부터 혜택을 누렸음을 반성하면서 2,760만달러의 기금을 모아 흑인 학생들의 장학금 등에 사용하겠다고 밝혔다.
이들 학교에 이어 버팔로대, 알라바마대, 시카고대 등에서도 교수나 학생회를 중심으로 배상 논의가 진행되고 있다고 AP통신은 전했다. 버팔로대의 제프리 클린턴 교수는 “학교가 우선 노예제에 연루된 잘못을 인정해야 하지만 연방정부가 배상 이슈를 주도할 필요도 있다”면서 “배상비용으로 천문학적인 돈을 들일 필요는 없겠지만 인종적 빈부격차와 불평등을 개선하는 데 기여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연방정부 차원에서 노예제에 대해 배상해야 한다는 미 국민들의 여론은 지난 10월의 한 조사에 따르면 29%에 불과할 정도로 미미한 수준이다. 케이스 그리플러 버팔로대 교수는 “공립학교에 비해 재정적으로 여유가 있는 사립학교들이 먼저 조치를 취할 수 있을 것”이라며 “우선은 노예제 배상의 필요성을 인식시키는 공론화만으로도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워싱턴=송용창 특파원 hermeet@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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