딸, 후배들과 함께한 4박5일 라오스 여행기
라오스도 가기 싫을 땐 라오스로 가야 한다. 삶의 에너지가 모조리 소진되어 쉬는 것조차 귀찮아졌다는 뜻이니까. 물론, 라오스를 아는 사람에 국한된 말이다.
온전히 쉬기 위해 떠난 여행이라는 의미에서, 10년 만의 휴가였다. 직원들 휴가 보내고 나면 휴가 기간이 끝나있기 일쑤였다. 업무 성격과도 연관이 있을 것이다. 여성 CEO는 대게 회사에서 재정을 비롯해 직원 관리 등을 책임지는 만큼 이것저것 신경 써야 할 일이 많다. 해외박람회 같은 업무가 아니면 선뜻 회사를 비우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이번 여행에는 딸 유정이와 후배들이 함께했다. 과일이 쏟아지는 철이 아니어서 아쉬웠지만, 그 대신 날씨가 선선해서 좋았다. 마지막 날을 제외하면 우리나라 초가을 날씨나 다름없었다.
아침 시간이 가장 행복했다. 눈을 뜨면 숙소 1층에 있는 식당에서 토스트에 과일, 계란후라이를 곁들인 아침을 먹고 사방이 뻥 뚫린 ‘툭툭이’를 타고 라오스의 바람 맛을 느끼며 머리를 감으러 갔다. 2달러 남짓이면 30분 동안 머리를 감겨주고 정성스레 드라이도 해주는 곳이었다.
아침마다 황홀한 해방감이 나를 감쌌다. 중소기업을 이끄는 CEO라 할지라도 집에 돌아가면 엄마가 되고 주부가 된다. 한국을 떠나온 것이 아니라 아내로부터, 주부로부터 떠나온 기분이었다. 업무 부담도 없이 완벽하게 나에게로 떠난 여행이었다.
아침을 귀부인처럼 보낸 후 버스를 타고 국경을 넘어 태국에서 점심을 먹기도 하고, 아침시장이라는 뜻의 ‘달랏사오’ 쇼핑몰에서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가방 쇼핑에 빠지기도 했다. 여고생들처럼 웃고 즐기는 사이 뇌리에 포스트잇처럼 덕지덕지 붙어 있던 업무메뉴얼과 걱정거리들이 하나씩 떨어져 나갔다.
삶의 보풀을 제거하는 법
“멀미 난다.”
비행기에 몸을 싣기 전날, 버스를 타고 1시간 남짓 시골길을 달려 탕원유원지에 도착했다. 남릉강의 선상식당이었다. 의자에 앉자마자 사업하는 후배인 유진씨가 머리가 어지럽다고 했다. 하긴, 나무 갑판 아래로 강이 흐르고 있었다. 물살이 강바닥에 박은 기둥을 미세하게 진동시키면서 가끔 갑판 아래를 슬금슬금 핥고 있는 게 느껴졌다. 유진씨의 말 한마디에 강물한 은밀한 도발이 더 또렷하게 감지된 거였다.
메뉴에 국물 요리가 없어 아쉬웠지만 라오스에서 이름난 식당답게 입맛을 당기는 음식들이 많았다. 감각이 혀로 몰리면서 유진씨의 멀미는 말끔하게 사라진 듯했다.
폭풍 같은 식사가 끝난 후 유정이가 스케치북을 꺼내 들었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이마를 찌푸렸다. 20년 지기이자 후배인 희정씨가 그 모습을 보고 나에게 말했다.
“언니도 이젠 유정이를 놔줘야 해. 그건 엄마 욕심이야.”
유정이는 게임 시나리오에 캐릭터를 그리는 일을 좋아한다. 나는 조금 더 평범한 일을 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희정씨는 그런 내 바람을 욕심이라고 했다. 한국에서였다면 입을 꾹 다물고 말았겠지만, 시원스레 강물 위를 내닫는 바람 때문이었을까, 나는 “그건 그래”하고 수긍했다.
생각해보면, 거리낌 없이 말해주는 희정씨는 고마운 사람이다. 수다로 스트레스를 푼다고는 해도 변죽만 울리는 수다는 답답증만 키운다. 스카치 테이프로 털옷의 보풀을 떼어낼 때처럼 말이 실체에 닿지 않으면 마음의 체증도 말끔히 씻기지 않는다. 잡담에도 나름의 용기가 필요한 것이다.
나는 남자가 되고 싶어
“나는 나를 놓아주는 게 너무 힘들었어. 다들 잘 알겠지만, 난 그 일이 있기 전까지는 하루에 3시간밖에 안 잤어.”
깊은 이야기를 제일 먼저 끄집어낸 것도 희정씨였다. 희정씨가 언급한 ‘그 일’이란 갑자기 병원에 실려 간 사건이었다. 갑상선 항진증이었다. 병원에 누워 있는 동안 “내가 미친 듯이 살았구나”하는 생각이 들더라고 했다. 희정씨는 퇴원한 뒤부터 일주일에 아무 일도 안 하고 보내는 하루를 정해서 푹 쉬고 있다. 병원 신세를 진 이후 ‘일주일에 하루 쉬기’를 시작으로 ‘집착의 희정’으로부터 조금씩 도망가고 있다고 했다.
“나는 남자가 되고 싶었어요.”
사업을 하는 유진씨의 뜬금없는 한 마디에 와하하, 웃음이 터졌다. 배를 잡으며 몸을 흔들어댄 통에 나무 갑판이 울렁대는 느낌이 들었다.
“여자라서 안 된다는 일이 너무 많았어요. 용접도 마라, 기계도 만지지 마라, 지붕에도 올라가지 마라. 내가 남자였다면 공장에서 자동차도 만들었을 거예요.”
나는 절반의 동의만 했다. 남자가 되고 싶은 게 단순히 여자이어서가 아니라 ‘여자 CEO’이기 때문일 거란 생각이 들었던 거였다. 애당초 사업을 하지 않았다면 여자라서 답답한 일이 그리 없었을 것이다. 여자라는 껍질보다는 CEO라는 갑옷이 몇 배는 더 무겁고 힘들지 않았을까. 내가 그랬던 것처럼.
유진씨는 몇 년 전 의사의 권고를 받아들여 낯선 이들과 유럽 패키지 여행을 떠났다. 아무도 유진씨가 누군지, 뭐 하는 사람인지 모르는 상황에서 너무도 자유스러웠다고 고백했다.
“다 벗어놓고 보니까 CEO, 엄마, 아내의 무게가 얼마나 무거운 건지 실감이 나더군요. 열흘 동안 날개 없이도 훨훨 날아다니는 기분이었어요. ”
CEO를 그만둘 수 없다면 일하는 것보다 더 열심히 비워야 한다. 떠나지 못하면, 비우지 못하면 무너진다. 수도승이 아니라 해도, 오히려 수도승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는 더 열심히 떠나고 비워야 한다.
딸이 그린 툭툭이 삽화
말뚝에 몸이 묶인 채 쉼 없는 강물의 유혹에 시달리고 있는 나무판자 위에서 이제는 멀리 떠나가 버린 20대의 ‘이창은’ 혹은 ‘경리부 이양’을 떠올렸다.
9만원 월급을 받으면 7만5,000원은 어머니에게 드렸다. 회사 ‘아저씨’들이 350원짜리 자장면을 먹을 동안 이양은 어머니가 싸준 김치 도시락을 먹었다. 한푼 한푼이 아쉬운 시절이었다. 남에게 신세 지는 게 죽기보다 싫었고, 갚을 자신이 없으면 빌리지도 않았다.
그 수줍음 많았던 이양이 어느덧 공장을 몇 개나 돌리는 사장님이 됐다. 부도 통보를 받고 양수를 쏟으며 둘째를 낳고, 남편과 안동댐에 올라가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길을 떠나려 했던 고비를 겪으면서 이양은 어느새 이 대표가 되었다. 그 사이 나는 많이 대범해졌다.
“어릴 땐 작은 일에도 안절부절못했는데 점점 덤덤해지더라고. 직원들이 ‘죽어도 못 하겠다’는 일이 있으면 ‘나한테 맡겨’하고 나설 만큼 강단이 세졌고. 사업이 고행이라고는 하지만, 어느 세월에 내가 이렇게 변했나 몰라.”
내 말에 다들 고개를 끄덕였다. 사업해 본 여자들의 공감대일 것이다.
한쪽에 앉아서 스케치에 열중하던 유정이가 이윽고 스케치북을 내밀었다. 툭툭이가 그려져 있었다. 아침마다 해방감을 극대화시켜준 동남아시아의 명물 오토바이 택시.
“툭툭이가 제일 인상 깊었던 모양이구나.”
이 양에서 떠나 이 대표가 된 나처럼, 유진이도 바람을 맞으며 자신만의 세상으로 나아가고 싶은 건지도 모른다. 자식이라도 삶을 대신 살아줄 수는 없다. 그러니 응원하고 격려하는 수밖에.
볼수록 잘 그렸다 싶었다. 다시 한번 시원한 바람 속으로 질주하고 싶어졌다. 그래, 이만큼 떠나왔지만, 아직 갈 길이 멀다.
“그래, 라오스는 바람 맛이다.”
이창은 사업가
기사 URL이 복사되었습니다.
댓글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