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한말 한반도와 만주, 사할린을 두루 여행한 주일 독일대사관 무관 헤르만 산더가 촬영한 사진. 죄인들이 목에 칼을 차고 있다. 국립민속박물관 제공

“전여횡을 살인자로 고소합니다. 4년 전 신묘년(1771년)에 마을 사람 전여횡이 밥을 구걸하러 온 박응삼을 붙잡아 가혹하게 구타하고 묶어 22일 동안 가뒀습니다. 박응삼이 사망하자 서둘러 매장도 했습니다.”

1775년 충북 옥천의 한 관청에 접수된 고소장 내용이다. 전여횡이 이전부터 감정이 좋지 않던 박응삼이 구걸하자 다짜고짜 잡아다 때렸다는 게 익명 고소인 측 주장. 매장에 전여횡 형제가 가담한 것을 목격한 이가 숱해 마을에서 알 사람은 다 알았다는데, 고발은 사건 발생 4년이 지난 뒤에야 이뤄졌다. 왜일까.

‘크리미널 조선’은 대중역사 저술가인 박영규가 조선왕조실록 등에 기록된 당시 범죄 이야기를 엮어낸 책이다. 조선의 법부터 살인, 성범죄, 무고 등 여러 사건 유형과 미제 사건 등을 다양한 읽을거리로 소화해냈다.

법의학서 '중수무원록언해' 속 신체도. 영조대 '신주무원록'의 내용을 증보하고 해석을 붙여 '증수무원록'을 편찬했고, 정조 대 언해본을 간행했다. 국립중앙도서관 제공

조선은 별도의 형법을 두진 않았지만 명나라 법률인 ‘대명률’을 적용했다. ‘공모해 같이 때리다 살인이 된 때는 치명상을 중요하게 봐 직접 손 쓴 자는 교형에 처하고, 주모한 자는 장 100대에 3,000리 밖으로 귀양 보내고, 나머지 사람은 각각 장 100대에 처한다’와 같이 범행 수법과 가담 정도 등에 따라 형량을 달리했다. 살인사건이 발생하면 반드시 검시도 실시했는데, 원나라 학자가 쓴 법의학서 ‘무원록’에 우리 실정에 맞는 주석을 단 ‘신주무원록’이 지침이 됐다.

다시 전여횡 사건으로 돌아가보자. 이 사건이 무려 4년 만에 관청에 접수된 배경엔 마을 사람들 나름의 절박한 상황이 있었다. 살인사건을 고발했을 때 겪게 되는 관청의 횡포 걱정이었다. 관청은 살인사건이 나면 일단 피의자나 피해자 이웃부터 잡아들여 죄다 죄인 다루듯 했다. 집집이 쑥대밭이 되니 주민들이 일찌감치 떠나 마을이 아예 사라지기도 했다. 저자에 따르면 이 때문에 조선 살인사건 중 80%는 암암리에 은폐됐다.

죄인이 태장 맞는 모습. 김준근의 풍속화 모사복원품이다. 국립민속박물관 제공

‘법 앞의 평등’도 없었다. 법률이 있다 해도 왕족과 양반은 중형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1406년 장군이었던 한을생은 노비 아내를 강간하고도 간통 사건으로 조작돼 군형을 받았다. 원래 ‘대명률’상 강간 범죄자는 교형 대상자였다. 심지어 선조는 치정문제로 고관대작 유희서를 죽인 큰아들 임해군의 살인교사 사건을 덮기 위해 포도청을 압박했다. 이는 결국 미제 사건이 됐다.

 크리미널 조선 
 박영규 지음 
 김영사 발행ㆍ328쪽ㆍ1만5,000원 

가부장제가 엄격한 조선에만 존재한 법률도 있다. 존장, 즉 웃어른을 고발하면 법에 저촉돼 형벌을 받는 ‘존장고발금지법’이 대표적이다. 조선의 기본법 ‘경국대전’에 따르면 아들과 손자, 아내와 첩은 물론 노비가 부모, 가장을 고발하는 건 교형 감이다. 향촌의 일반 백성이 수령을 고발하는 것 역시 처벌 대상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법이 명문화된 건 조선 최고 성군이던 세종 때였다.

신지후 기자 hoo@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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