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광주 거북이안경

[저작권 한국일보] 광주 동구 충장로5가에 위치한 안경 소매점 ‘거북이안경’ 출입문 앞 길바닥에 설치된 ‘오래된 가게’ 동판. 충장상인회가 노포(老鋪)로서의 가치를 보존하기 위해 베풀어 둔 것이다.

가게 문 앞 길바닥엔 ‘오래된 가게’라는 동판이 훈장처럼 박혀 있었다. 한때 호남 제1의 상권으로 불렸지만, 지금은 사람들이 옛 영화(榮華)를 떠올릴 때나 쓰던 단어로 더 익숙해진 광주 동구 충장로 바닥에 떡하니 달라붙은 동판은 이곳 상인들이 준 휘장이다. 쇠락의 기운이 퍼져 있는 충장로를 여태껏 지키며 생존해 준 데 대한 고마움이 담겼으리란 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다. 동판에 ‘Since 1976’이라는 업력(業歷)을 음각과 양각으로 새겨 넣은 것도 그 가게의 가치를 헤아리고, 이를 보존하기 위해서였다. 물론 업력이 고객의 마음을 움직인다는 장사꾼다운 마케팅 전략도 숨어 있을 터. 그렇게 충장로에서 세월을 이기고 살아 있는 ‘역사’가 된 가게는 5가(街) 입구에 위치한 안경 소매점 ‘거북이안경’이다.

[저작권 한국일보] 광주 동구 충장로5가에 위치한 안경 소매점 ‘거북이안경’.

“역사는 무슨…. 그냥 다른 데는 객지 같고, 나도 이젠 나이를 먹어서 이곳을 못 떠나는 것뿐이에요.” 이 가게 주인 여근수(69)씨가 입꼬리를 살짝 올리며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주위 사람들이 자신을 두고 전설이니, 터줏대감이니 하는 말이 영 부담스러운 눈치였다. 그는 “그저 하루 장사를 접고서 동료 상인들과 서로 얼마치 팔았는지 안부를 물으며 막걸리 한 잔씩 하는 맛으로 산다”고 했다. ‘장사가 안 돼 죽을 맛’이라는 장사꾼들의 속내를 에둘러 표현한 그의 화법에선 슬픈 감정마저 묻어났다. 살아 남은 자의 슬픔이랄까. “하루에 15만원? 아니, 10만원어치나 팔란가 몰라요.” 그의 입에선 숨기고 싶었던 영업비밀(하루 매출액)까지 넋두리처럼 흘러나왔다.

지금이야 매출 실적이 바닥을 찍고 있지만 1980년대만해도 그는 잘 나가던 안경집 사장이었다. “안경 팔아서 돈을 벌면 얼마나 벌겠냐”고 하겠지만 실상은 그렇지가 않다. 여씨는 “그때와 지금을 비교한다면 하늘과 땅 차이”라며 “그땐 월 매출액이 2,000만원에 달했다”고 했다. 지금 화폐 가치로 따지면 이 돈에 ‘0’을 하나 더 붙여야 할 정도다.

[저작권 한국일보] 여근수 거북이안경 사장은 “가난했던 시절 먹고 살기 위해 안경에 손을 댄 게 이젠 천직이 됐다”며 “죽을 때까지 안경(장사)을 할 것”이라고 웃었다.

여씨가 안경업계에 뛰어든 건 ‘거북이안경’ 가게를 열기 7년 전인 1969년이다. 고향인 전남 곡성에서 안경렌즈를 윤택하게 하는 연마공장을 운영하던 친형 밑에서 일을 배웠다. 이유는 간단했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어려웠던 시절, 먹고 살기 위해서”였다. 여씨는 군 전역 후 2년 만인 1976년 사업비 2,000만원으로 ‘로얄광학’이라는 주문안경렌즈제조회사를 세우고 소매점인 ‘거북이안경’도 함께 운영하기 시작했다. 안경렌즈 생산뿐만 아니라 직접 판매까지도 손을 댔다. 입에 풀칠이나 하려고 시작했던 게 어쩌다 천직이 됐다. 안경렌즈 주문제조와 유통, 판매까지 하다 보니 남들보다 싼값에, 그리고 신속하게 안경을 공급할 수 있었다. “고객이 만족하는 실속형 안경을 보급하자는 걸 경영방침으로 내세웠죠. 무엇보다 안경렌즈를 직접 생산하다 보니 합리적인 가격 책정이 가능했죠.”

그의 경영전략은 맞아떨어졌다. 실제 직접 공장 운영으로 물량을 충분히 확보한 탓에 다른 업체들에 비해 비교우위에 있는 가격 할인율 적용이 가능했고, 이는 고정 구매처(230곳) 보유로 이어지며 선순환 구조를 만들어냈다. 그러니 경영 안정은 당연지사였다. 그가 공장과 거북이안경에서 취급한 품목만 무려 36개에 달했다. 1980~90년대 거북이안경은 호남 최대 도매백화점으로 명성을 날렸다. 실제 여씨는 당시 광주지역 영화 개봉관과 재개봉관에서 영화 상영 직전 거북이안경을 홍보하는 극장 광고를 내기도 했다. 안경 소매점으로선 극히 드문 일이었다. 극장이야말로 관객들이 자연스레 광고에 집중할 수밖에 없는 시스템을 갖추고 있어 상당히 매력적인 광고 집행 장소라는 걸 여씨는 알아챘던 것이다. 그의 남다른 장사 수완을 보여주는 단적인 사례다.

그러나 이처럼 ‘잘 나갔던’ 여씨도 중국산 저가 물량 공세 앞에선 견뎌낼 재간이 없었다. 그는 안경사의 자존심인 안경렌즈만큼은 손에서 놓고 싶지 않았지만 밀려드는 저가 렌즈에 결국 무릎을 꿇고 2001년 공장 문을 닫았다. “당시 안경렌즈 한 벌(2개) 만드는데 비용이 7,000~8,000원 했어요. 그런데 중국산은 1,500~1,600원에 들어와 팔리더라구요. 아 이건 아니다 싶더라구요. 도통 경쟁이 안 되는데 어떻게 하겠어요. 처리(폐업)하는 수밖에 더 있겠습니까? 그때 2억원 정도 적자를 봤더라구요.”

그렇게 눈물을 머금고 안경렌즈 연마사업을 접었지만 그래도 미련이 남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공장 폐업 3년 뒤 같은 안경사인 큰아들 기만(44)씨에게 안경렌즈 도매업을 이어받게 했다. 여씨는 기만씨에게 공장 운영 당시 거래했던 소매상들 명단을 넘겨주고 2년간 직접 데리고 다니며 장사를 가르쳤다. 이를테면, 대를 이은 도제식 안경사업이었다. “거래처 사장들의 성격부터 그 집 숟가락이 몇 개인지, 또 수금은 어떻게 해야 하는지까지 알려줬죠. 내 물건을 팔아먹으려면 적어도 이 정도는 해야죠.” 여씨는 자신이 거래하던 업체들을 대금 결제 신용도에 따라 A~D등급으로 나눠놓은 관리대장도 기만씨에게 넘겨줬다. 영업 노하우가 고스란히 담긴 비밀장부를 물려준 셈이다. 그렇다고 여씨가 가게를 그냥 물려준 건 아니었다. 무릇 장사꾼들 사이에선 공짜란 없는 법. 아무리 부자지간이라고 하더라도 여기에 셈이 치러지지 않을 리 없다. 여씨는 아들에게 액수를 매겨 돈을 내라고 했다. 기만 씨는 “도매업체 법인 인수자금 명목으로 매달 일정 금액을 아버지께 드리고 있다. 사업을 물려받은 게 아니고 돈 주고 산 것이다. 아버지는 정확한 분이다”고 웃었다.

[저작권 한국일보] 여근수 사장과 큰아들 기만(왼쪽)씨. 아버지의 안경 도매업(業)을 물려받은 기만씨는 “아버지의 장사철학을 이어받아 경영방침도 (소매상들과)‘같이 가자’로 정했다”고 말했다.

여씨가 기만씨에게 대물림한 건 단순히 장사의 기술만은 아니었다. 손님을 대하는 ‘진심’과 ‘진실성’도 함께 물려줬다. 그는 “오래 살아 남는 성공 비결은 비용이나 마진 같은 경영이론으로 설명되지 않은 진실성에 있고, 진심이 통해야 고객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다”고 했다. 그는 상인들끼리 상부상조해야 한다는 신념을 갖고 있다. 그래서인지 기만씨의 경영 방침도 “같이 가자”다. 그 덕에 기만씨의 사업도 순항 중이다. 국내 안경렌즈 시장 규모가 갈수록 줄어들고 있는데도 고정 구매처를 300여곳으로 늘렸다. 구매처 수로만 보면 이미 아버지를 넘어 선 셈이다.

그렇지만 여씨는 “현재 상황이 녹록한 건 아니다”고 했다. 예전에 비해 안경사의 전문성과 안경렌즈의 마진율이 하락하는 등 안경시장의 미래가 어둡다는 점을 우려한 것이었다.

사실 199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시력을 개선하는 데는 안경만한 게 없었다. 여씨는 “그땐 고객들에게 안경 맞춰주느라 점심 먹을 시간이 없을 정도였다”고 회상했다. 그만큼 안경이 대세였다는 얘기였다.

그러나 해마다 인구 수가 줄어들고 라식이나 라섹 등 시력교정수술은 물론 노안교정 수술이 보편화하면서 안경렌즈 시장 규모는 갈수록 줄어드는 추세다. 설상가상으로 2010년대 중반부턴 누진렌즈 반값 할인 판매까지 등장했다. “요즘엔 안경 쓴 학생들이 많지 않아요. 웬만하면 안과에서 시력교정수술하기 때문이죠. 예전엔 안경을 맞춰주면 ‘이런 세상이 있었구나’하고 감사 인사를 건네는 고객들을 보면 안경사로서 무척 뿌듯했는데, 이젠 그런 모습을 찾아보기 힘들어졌어요.”

[저작권 한국일보] 여근수 사장이 가게를 찾은 손님에게 안경알을 도수에 맞춰주고 있다.

그런데도, 그가 안경원을 포기하지 못하는 건 옛 영광을 되찾으려는 작은 사명감에서다. 그도 그럴 게 거북이안경이 충장로와 성쇠를 함께 한 터라, 그는 더욱 애착이 간다고 했다. 거북이안경 인터넷 홈페이지를 만들어 영업의 ‘진화’를 꾀한 것도, 침체된 골목상권을 살려보겠다고 2014년부터 충장상인회장을 맡아 활동하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다.

“안경원은 국민들의 눈건강을 책임지는 곳이다. 그건 안경사에겐 자존심 같은 것”이라고 말하는 여씨의 목표는 거북이안경이 이름처럼 장수하는 것이다. 기만씨와 둘째아들 모두 안경사의 길을 걷고 있는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1997년 가게 이름이 촌스럽다는 주위의 의견을 반영해 ‘안경월드’로 개명했지만 2년 만에 다시 원래 이름으로 돌아왔다. 이름값을 못해서였다. “안경업계가 예전의 영광을 되찾으려면 무엇보다 안경사의 전문성을 강화하고 과당경쟁을 피해야 합니다. 그나마 유해광선을 차단하는 기능성렌즈시장이 커진 건 다행이죠. 장사는 크게, 그리고 멀리 보는 것입니다.” 그 역시 여느 노포 창업주들처럼 담대한 장사 내공을 풍기는 장사꾼이었다.

광주 거북이안경 위치. 그래픽=송정근 기자

광주=글ㆍ사진 안경호 기자 khan@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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