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희상 국회의장이 자유한국당의 거센 반발을 무릅쓰고 10일 밤 국회 본회의에 내년도 정부 예산안 수정안을 상정한 데에는 ‘기다릴 만큼 기다렸다’는 판단이 작용한 것으로 보인다. 입법 성적이 저조해 ‘식물 국회’ 오명을 쓴 20대 국회가 정기국회 마지막 날까지 정부 예산안 처리도 하지 못하는 사태는 피해야 한다는 당위도 영향을 미친 것으로 풀이된다.
문 의장은 이날 종일 본회의 개의와 속개 시간을 오전 10시, 오후 2시, 오후 4시, 오후 8시 등으로 변경해 가며 여야 원내대표 및 중진 의원들과 회동했다. 특히 오후 들어 문 의장이 주재한 국회 교섭단체 3당 원내대표ㆍ예결위 간사 7인 회동에서 예산안 합의를 시도하는 등 직접 중재에 나서기도 했다.
그러나 한국당이 “증액 4,000억원에 대한 구체 내역을 일일이 확인해야 한다” “당 내 의견을 모을 수 있게 1시간 만 더 기다려달라”는 등의 요구로 시간을 끌자, 문 의장은 결단을 내렸다. 여권은 한국당의 요구가 패스트트랙 법안 저지를 위한 예산안 지연 전략이라고 의심했고, 문 의장도 이에 동의한 것이다.
한국당이 요구한 ‘4,000억 내역 확인’에는 2, 3일이 소요되는 만큼, 한국당 요구를 수용했다면 정기국회 내 예산안 처리는 불가능해질 수밖에 없었다. ‘1시간만 더 기다려 달라’는 요구도 마찬가지라는 게 여권의 판단이었다. 여권은 한국당이 예산안 및 부수법안에 대한 수정안을 계속 제출해 예산안 처리를 지연시키고, 패스트트랙 법안 저지를 위해 시간을 벌려고 하는 것으로 봤다.
이에 민주당 의원들은 오후 내내 문 의장을 찾아 “국회는 기다릴 만큼 기다렸다” “한국당의 지연 전략에 끌려 다녀선 안 된다” “예산안의 정기국회 회기 내 처리는 국회의 의무다” 등의 논리를 펴며 10일 중 예산안 상정을 호소한 것으로 알려졌다.
20대 정기국회 회기 종료를 몇 시간 앞두고 정부 예산안 상정을 결행한 문 의장은 그러나 본회의장에서 30분 넘게 한국당 의원들로부터 “아들 공천!” “공천 대가!” 등 인신공격성 항의에 시달려야 했다.
국회 관계자는 “마지막 순간까지 기다려도 여야 합의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상황이었다”며 “다수 의석 확보한 의원 협의체의 요구가 존재하면 의장이 이를 완전히 외면하기 어려울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또 “예산안을 정기국회 내에 처리해야 한다는 의무감, 한국당 측에서 복수의 예산안 수정안을 제출하려는 기색이 감지된 것도 문 의장의 결단에 영향을 준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김혜영 기자 shine@hankookilbo.com
손현성 기자 hshs@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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