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지은의 ‘삶도’ 인터뷰] <46>국회의원 김세연
“15년 전 선친의 불출마 선언, 내 한마디 때문
아버지 돼보니 어떻게 그러셨나 싶어” 울컥
“한국당, 지루한 소멸보다 한번에 불타는 게 낫다”
3선을 끝으로 더 이상 총선에 출마하지 않겠다고 선언한 김세연 자유한국당 의원을 3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본회의장 앞 로텐더홀에서 만났다. 김 의원 뒤로 제헌의회 의원들을 새긴 청동 부조가 보인다. 오대근 기자

인공지능(AI)같은 로봇이 인간 노동의 대부분을 대체하게 된다면? 그 로봇에 기계세 같은 세금을 물려야 하지 않을까. 기계세를 낼 정도로 AI 이용이 보편화하면 과연 저출산이 문제가 될까.

3년 전 어느 국회의원을 만났을 때 이런 대화를 나눴다. 언젠가, 아니 곧 닥칠 미래의 일이었지만, 이를 논하는 의원은 처음이었다. 국회는 늘 현재가 절체절명이니 말이다. 오늘만 사는 것 같은 정치인들 속에서 그는 미래를 고민하는 몇 안 되는 의원이었다. “미드(미국드라마) ‘왕좌의 게임’은 단순한 역사 드라마가 아닌 인생이 녹아 든 작품”이라며 열변을 토하는 X세대(1960년대 후반~1970년대생)이기도 했다. “지금까지 의정 활동을 하면서 태도를 바꾼 사안이 두 가지인데”라며, 이를 기억하고 반성하는 대목에 이르러서는 ‘국회의원 300명 중에 이런 의원이 몇이나 될 것인가’ 손가락을 움직이게 된다.

김세연(47) 자유한국당 의원(부산 금정)의 불출마 선언문을 읽고 복잡한 생각이 든 건 그래서다. 남아야 할 사람은 떠나고 떠나야 할 사람은 기를 쓰고 생존하는 이 정치판은 분명 무언가 잘못됐다.

좀 엉뚱한 이유에서 선언문의 이런 대목에 눈길이 꽂혔다. 좀비, 절대 반지(‘반지의 제왕’), 비호감의 정도가 역대급 1위, 감수성, 공감능력 같은 단어들이다. 불출마를 결단하는 3선 의원의 비장함과는 어울리지 않는 감상일지 모르지만 그의 말은 정치인의 것이 아닌 세대의 언어였다.

“먹던 우물에 침 뱉었다”는 비난은 차치하고라도 그의 뜻에 동조하는 같은 당 의원들조차 “맞는 말이지만 표현이 과했다”고 반응했다. 하지만, 사석에서 말을 할 때도 고르고 걸러 적합한 표현을 찾는 버릇이 몸에 밴 그가 감정에 휘둘려 후회할 글을 쓰지는 않았을 것 같았다. 그는 “(지금도) 아무리 압축을 해도 당의 실체를 그보다 더 정확하게 묘사할 단어를 찾지 못하겠다”고 했다.

그러니 당 해체라는 그의 처방 역시 충격 요법으로 한 말이 아닌 스스로 면밀히 진단해 내린 처방일 테다. 그간 내부에서 일어난 일을 언급하며 그는 이렇게 말했다. “당의 운명은 이미 정해졌어요. 그렇다면 종말까지 지루한 소멸보다는 화끈한 소멸이 낫다는 거죠.” 록밴드 ‘너바나’의 커트 코베인이 유서에 남긴 “서서히 사라지는 것보다는 한번에 불타오르는 게 낫다”는 말이 생각났다.

11년 7개월여 여의도 생활이 궁금했다. 그의 조부는 부산의 중견기업 동일고무벨트를 창업한 고 김도근 전 회장이고, 부친은 부산에서 5선을 한 고 김진재 전 한나라당(현 한국당) 의원이다. 가만 있어도 꽃길이었을 인생인데 돌연 총선에는 왜 나섰을까. 국회의원 배지는 그에게 무슨 의미인가.

알고 보니 그의 인생 한가운데에 아들의 한마디로 불출마를 결심한 부친이 있었다. 그 아들은 아버지가 되고 나서야 깨닫게 된 인생의 진실을 고백하면서 끝내 눈물을 흘렸다.

김 의원을 만난 3일은 공교롭게도 단식을 마치고 당무에 복귀한 황교안 대표에게 쇄신의 힘을 실어준다며 당직자 일부인 35명이 일괄 사퇴를 한 다음날이었다. 사퇴 명단엔 당 싱크탱크인 여의도연구원(여연) 원장이었던 그도 포함됐다.

◇일괄 당직 사퇴했더니 그 자리엔 ‘친황’ 인사
김 의원의 불출마 선언문은 그가 정치를 시작할 때부터 지켜온 철학과 원칙의 집약체다. 그의 초심은 ‘정치인이 되지 않겠다’는 거였다. 오대근 기자
-당직 사퇴에 동의한 과정이 어떻게 되나요?

“어제(2일) 점심 식사를 하고 있는데 박맹우 (당시) 사무총장에게 전화가 왔어요. ‘지금 임명직 당직자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돌려서 의사를 확인 중이다. 황 대표가 새롭게 당을 이끌어가도록 우리가 일괄 사퇴를 하자는 논의를 하고 있다. 함께 할 의향이 있나’하는 내용이었죠. 물론 저의 처방은 차기 총선 전원 불출마와 당 해체라는 거였지만, 황 대표가 전면 쇄신의 예고편으로 당직자 전원 사퇴를 바라는 거라면 응하는 것이 맞다고 판단이 되더군요. 그래서 ‘일괄적으로 사퇴하는 거라면 그렇게 하겠다’고 답했어요. 몇 마디 더 나눈 뒤 다시 한번 못을 박으려고 ‘일괄적으로 하는 거면 동의한다는 겁니다’라고 하니까, 박 사무총장이 ‘예’하더니, 제가 묻지도 않았는데 이런 말을 했어요. 하도 인상적이어서 메모를 해놨죠.”

그는 휴대폰을 집어 들어 적어둔 걸 찾아 읽었다.

“박 사무총장이 ‘이거 다른 거(저의) 아무 것도 없심데이(없습니다)’ 하는 겁니다.”

다른 뜻이 정말 없는 사람이 할 말은 아니지 않나. 이 같은 일괄 사퇴 이후 임명된 당직은 대부분 옛 친박, 현 친황이라 불리는 의원들이 차지했다. 채용 비리 혐의로 재판이 진행 중인 의원도 포함됐다. 주위를 가장 놀라게 한 건 총선을 앞두고 공천 실무를 지휘할 사무총장에 초선 의원(박완수)을 앉힌 일이다. 사무총장은 통상 3선 의원이 맡는 당직이다. 그 자리의 독립성과 전문성 때문이다. 그렇기에 2011년 홍준표 당시 대표가 재선 의원을 사무총장에 임명하려 했을 때도 거센 비판에 맞닥뜨렸다. 그러나 김 의원은 후속 인선에 대해선 공개적으로 평가하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말했다. 굳이 듣지 않아도 될 것 같았다. 일각에선 이미 “여연 원장을 교체하려고 집단 사퇴쇼를 했다”는 촌평이 나왔다. 신임 여연 원장으로 임명된 성동규 중앙대 교수는 황 대표의 최측근으로 알려져 있다.

-불출마 선언을 하러 국회 정론관(기자회견장)에 들어설 때 기분이 어땠나요.

“선언문에 하고 싶던 말을 다 담았기 때문에 마음이 무거우면서도 가벼웠어요. 무거운 이유는 여전히 몸을 담고 있고, 당분간 더 담을 당에 고언을 해야 한다는 것 때문에, 가벼운 이유는 저한테 맞지 않는 옷을 이제 입지 않아도 된다는 차원에서 그랬죠.”

-반대일 줄 알았는데요.

“아마 탈당이었다면 그럴 수도 있었겠죠.”

-기업을 하는 유복한 집안의 외아들로 자라서 국내 최고 학부를 나왔고…

“맞습니다.”

-LG EDS(현 LG CNS)같은 기업에 입사해 근무하다가 부친의 회사에 들어가 아마도 정해진 길을 가던 중에 정치를 시작했죠. 일찍이 국회의원 아버지를 곁에서 봤을 텐데 어땠나요.

“제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아버지가 정치에 입문하셨어요. 그래서 ‘정치는 절대 하면 안되겠다’는 생각을 어릴 때부터 많이 했죠.”

김진재 전 의원은 1981년 당시 부산 동래를 지역구로 11대 총선에 출마해 처음 배지를 달았다.

-너무 바빠지셔서요?

“일단 아버지 얼굴 뵐 시간이 너무 없었으니까요. 아마 정치인 자녀들은 거의 비슷한 심정일 거예요. 또 12대 총선에서 아버지가 낙선하셨을 때 느낀 것들 때문이죠.”

◇불출마 선언문 속 인간군상은 어릴 때 경험
김 의원의 불출마 선언은 당 안팎에 큰 충격을 안겼다. 3선을 하는 동안 그는 지역구인 부산 금정에서 50~60% 지지율로 당선됐다. 지난달 17일 국회 기자회견장인 정론관에서 불출마 기자회견을 하러 들어서는 김 의원의 표정이 복잡해 보인다. 뉴시스
-당시 상황 기억이 나나요?

“그럼요. 제가 불출마 선언 회견문에 쓴 내용 중 그때 관찰과 경험이 녹아 있는 단락이 있어요.”

그건 ‘권력을 가졌을 때와 놓쳤을 때 눈빛과 어투와 자세가 180도 달라지는 인간 군상의 모습에서 결국 이제는 측은한 마음만 남게 되었습니다’라는 대목이었다.

“그 문장에 주어가 없거든요. 1인칭일 때, 3인칭일 때의 의미를 함께 담으려고 그랬어요. 뭔가 작은 거라도 권력을 가졌을 때 사람의 모습, 다른 사람이 그 사람을 대하는 모습, 또 내가 어떤 역할을 맡고 있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 같은 사람인데 대하는 모습이 완전히 달라지는 걸 알았으니까요. 나이가 들어서였으면 그런 모습을 보고 실망하거나 충격을 받았을 수도 있지만, 제가 중학교 1학년 때 낙선하셨으니 어릴 때였거든요. (자연스럽게) 면역이 생긴 거죠. (아버지는) 낙선하시고 나서도 지역 관리를 열심히 하셨죠. 그런데 당시 아버지의 지구당위원장(현 당협위원장) 자리에 갑작스럽게 ‘낙하산’이 내려와서 물러나시게 됐어요. 사전에 당에서 어떤 양해나 설명도 없었죠. 아버지도 어느 날 신문을 보고 아셨으니까요. 그 뒤에 저희 집에 매일같이 오던 분들이 갑자기 안 오는 거예요. 나중에 얘기를 들어보니 교체된 그 지구당위원장의 핵심 측근으로 갔다고 하더군요. 10대 중반에 가족 같던 분들이 등돌리는 모습을 본 거죠. 그래서 권력 유무에 따라서 행동이 달라지는 세태에 별로 놀라지는 않아요.”

-부친이 그럼에도 다시 도전을 했고 1988년 재선에 성공(동래에서 분구된 금정으로 출마)하셨죠. 일련의 과정을 보며 느낀 게 있나요.

“학교 다닐 때는 선거 유세 때 곁에 서서 보는 정도였죠. 선거란 완전히 전투 현장인데 그때 분위기를 익히는 환경에 일찍 노출이 되기는 했어요. 정치의 형이상학적 부분을 보기는 어려웠고요. 또 저는 정치를 절대 하면 안 된다는 생각이 확고했기 때문에 그 이상의 것을 알려고 하지 않았죠. 다만, 아버지가 하시는 일이다 보니 초등학교 때부터 신문의 정치면은 무슨 말인지 몰라도 열심히 봤어요.”

-자랄 때 꿈이 있었나요?

“뭐가 되고 싶다는 생각이 있긴 있었는데…(미소) 어릴 때 영화 ‘이티(E.T.)’를 보고 엄청 감동을 받아서 ‘내가 어른이 돼서 내가 지금 받은 감동을 어린이들한테 줄 수 있는 영화를 만든다면 얼마나 뜻 깊을까’하는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영화감독이 되고 싶어하던 시기가 몇 년 있었죠. 그런데 영화감독이 되려면 여러 공부와 준비를 해야 하는,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알고 그냥 나는 극장에서 감상하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생각을 고쳐먹었죠. 하하. 할아버지께서 창업을 하셨으니 막연히 기업에서 일을 해야 될 거다라는 생각만 했어요.”

-별로 어려움 없이 자랐겠지요.

“솔직히 고생을 해봤다고 할 수가 없죠.”

-그래도 살면서 알에서 깨어나는 시기는 있기 마련인데요.

“깨달음이 약간 늦게 오는 편이에요. 다만 아버지가 처음 당선됐을 때 저는 초등학교 3학년이라 국회의원이 뭐 하는 사람인지 잘 몰랐어요. 그런데 아버지가 의원이 되고 나선 거리에 제가 지나가면 사람들이 저를 가리키거나 눈짓을 하면서 수군수군하는 걸 알았죠. 어린 마음에 동물원의 원숭이 같다는 생각도 들고요. 그런 마음 고생을 한 게 있지만, 그건 고생이라고 할 수 없죠.”

-부친이 예순둘이란 이른 나이에 돌아가셨죠.

“아버님 10주기 추도식에서 추도객들께 드린 말씀 중에 이런 게 있어요. 이 얘기에 집사람은 좀 서운하게 생각을 하던데.”

그가 한참 생각에 잠겼다가 말을 이었다.

“아버지께서 하늘에 가셔야 될 때가 아닌데 갑자기 일찍 가시게 돼서 제가 자식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은 이거라고 생각해서 한 말이었죠. 보기에 따라선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는 말이지만.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시점 이후부터는 제 인생이 아니라 아버지 인생이라고 생각하고 살기로 약속했다’는 말이었죠. 17대 총선을 앞두고 당이 궤멸 수준으로 위기이니 아버지 같은 중진을 포함한 의원 25명이 (총선을 두 달 앞두고) 불출마 선언을 했어요.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 역풍이 불어닥칠 때였죠. 아버지는 공천이 (사실상) 확정되고 나서도 ‘이렇게 있어선 안 되겠다’고 고심을 하셨어요. 결정하시기 전 가족회의에서 제가 불출마하시는 게 맞다고 말씀을 드렸거든요. 나중에 어머니께 들으니까, 그때 제 의견에 영향을 많이 받으셨다고 해요. 그렇게 불출마 선언을 하시고 이듬해 10월에 돌아가셨죠.”

2004년 김진재 의원은 중앙당에서 공천 우세후보로 발표돼 사실상 공천이 결정된 2월 4일 불출마를 선언했다. 김진재 의원은 “이미 거대한 물줄기를 이룬 시대정신의 흐름은 개인의 공과를 훌쩍 뛰어넘는다는 점을 인식하게 됐다”며 “언제, 어떻게 아름답게 퇴장하는 것인가를 생각해 왔는데 지금이 바로 그 때라고 판단했다”는 말을 남겼다.

◇나는 절대 안 한다던 정치 속으로
어린 시절의 김세연 의원. 윗줄 사진 두 장은 부친 고 김진재 전 의원과 즐거운 한때를 보내는 모습이다. 김세연 의원 제공.
-정치를 하겠다고 마음먹은 데에 부친의 갑작스러운 죽음이 영향을 미쳤나요?

“여러 복합적인 이유들이 있었어요. 가장 사적으로는, 너무 일찍 타계하신 아버지의 이름이 저로 인해 한 번이라도 더 언급이 돼서 많은 분들에게 오래 기억이 되도록 하고 싶다는 거였죠. 공적인 영역에서 헌신적으로 활동하셨지만, 시간이 지나면 잊히기 마련이니까요. 생전에 못한 효도를 그렇게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있었죠. 그래서 제가 국회에 들어오고 나서 저를 두고 ‘금수저’니, ‘2세 정치인’이니, ‘세습 정치인’이니 하는 말이 나올 때 실은 반갑고 고마웠죠. 기자들도 초선 때 제게 그런 질문을 많이 했거든요. ‘아버지 후광에 힘입어서 쉽게 국회의원이 됐다는 비판 듣기 싫지 않으냐’고요. 사실이니 저는 거부감 없이 받아들였어요.”

-부친이 돌아가셨을 때 큰 충격이었겠죠.

“2005년 4월에 할아버지께서 별세하셨거든요. 그런데 그 해 10월에 아버님도 돌아가신 거예요. 한동안 ‘멘붕’이었죠. 심적으로 가장 어려웠던 시기라면 그때예요. 견디는 게 무척 힘들었죠. 저보다 더 어려운 환경에 계신 분들이 많은데 이렇게 말해도 될지 모르겠네요.”

왜 아닐까. 지위 고하, 남녀노소를 막론하고 가족의 죽음은 가장 큰 슬픔이다. 그런 아픔을 6개월 새 잇따라 겪었으니 충격이 이만저만 아니었을 거다. 형제도 없었던 그는 졸지에 가장이 됐다. 그때가 서른세 살이었다.

“6개월 전만해도 할아버지에, 아버지가 계시니 저는 제 몸 하나만 신경 쓰면서 걱정 없이 살면 되는 사람이었어요. 그런데 울타리가 순식간에 사라진 거였죠.”

-그리고 2년 뒤인 2008년 18대 총선을 앞두고 한나라당에 공천 신청을 했죠. 계기가 있나요.

“아버지가 불출마 선언을 한 뒤 금정 지역구에서 당선된 의원의 전횡이 심각했죠. 평화로운 지역이었는데 지방의원들을 상대로 공천헌금을 요구했다는 얘기가 나오고 실제 받았다는 말도 나오고요. 지역 신문에 대서특필됐죠.”

당시 부산 금정의 현역 의원은 이명박 전 대통령의 측근이었다. 그러나 임기 동안 지방선거를 앞두고 그 의원의 동생이 특정 후보에게 ‘충성서약서’와 함께 금품을 받았다는 의혹이 제기됐고 결국 동생은 구속됐다. 그런가 하면 그 동생에게 돈을 건넨 의혹을 받아 수사를 받던 금정구의 기초의원 출마자가 선거를 앞두고 잠적하기도 했다. 당선이 확정된 후 주검으로 발견돼 지역 정가에 큰 충격을 안긴 사건이다.

“어릴 때부터 신문 정치면 기사를 빼놓지 않고 보던 저도 아버님이 불출마하시고 나서는 정치 기사를 안 봤거든요. 그래서 지역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몰랐어요. 그런데 18대 총선이 다가오니까 이만큼 두껍게 만든 신문 스크랩을 갖고 저를 찾아오는 분들이 생겼어요. 이런데도 어떻게 가만히 있느냐고요. 당시 기업에서 일을 한 지 12년쯤 되던 때라 매너리즘이 생기기 시작할 때이기도 했거든요. 또 기업에 있다 보니, ‘더 큰 어젠다들이 자리 잡혀야 하는구나’ 하는 일반 시민으로서 느끼는 답답함도 있었고요. 고민이 깊어졌죠. 2007년 12월 31일에서 2008년 1월 1일 새해로 넘어가는 밤, 출마 결심을 했어요.”

-단순히 ‘정치를 해보고 싶다’를 넘어서 ‘정치를 잘 할 수 있겠다’는 생각도 있어야 가능한 결심인데요.

“지금 겪는 것처럼 생생하게야 짐작하지 못했지만, 인간군상의 민낯이 완전히 노출되는 환경이라는 건 알고 있었기 때문에 끌려 들어가고 싶지 않긴 했어요. 하지만 한 사람이라도 나쁜 국회의원보다는 그렇지 않은 의원이 있는 게 좋지 않을까, 최소한 그런 도움을 주는 역할은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어요.”

-그런데 공천을 못 받았죠?

“정권 초기이기 때문에 견제구가 세게 들어올 거란 걸 예상은 했었어요. 칼을 뽑았으니 계속 가자 해서 무소속 출마를 선언했죠.”

그는 당시 득표율 64.76%로 당선됐고 이후 한나라당에 입당했다.

-해본 사람만 아는 가장 힘든 일이 선거운동이라던데요.

“어릴 때 아버님 유세장에 갔던 정도의 경험 밖에 없었어요. 다만 지역구민을 대할 때 어떤 몸가짐과 마음가짐으로 해야 하는지 오랜 기간 아버지, 어머니를 보면서 배웠죠. 실제 해보니 육체적으로 힘든 게 가장 크더군요. 시장을 한번 돌면 거의 네 시간 동안 쉬지 않고 90도로 절을 하고 다니니 나중에는 허리가 끊어질 것 같더라고요. 하하.”

◇초선 때 결심 ‘정치인이 되지 않겠다’
돌이켜보면 김 의원의 화법은 관찰자의 것이었다. 사석에서 그는 종종 “현재 당에서 비활성화 상태인 의원들이 몇 명” 같은 표현을 쓰곤 했다. 스스로를 ‘파견 나온 건전한 시민’이라고 규정했기 때문이었다. 오대근 기자
-불출마 선언문에 적었듯 스스로를 ‘정치권에 파견 나와 있는 건전한 시민’이라고 규정한 건 언제부터인가요?

“처음 출마할 때부터예요. 몇 가지 저와 약속한 것 중 하나죠. 사석에서 기자들에게 ‘저는 정치인이 되지 않겠다는 약속을 저하고 했다’고 말하면 농담하는 줄 알고 웃는 분들이 많았는데, 진담이었어요. 언젠가는 다시 시민의 자격으로 돌아갈 거라고 생각했죠.”

-파견의 의미를 좀더 구체적으로 설명한다면요.

“저는 대한민국이 재벌ㆍ관료 복합체에 의해 지배당하는 사회ㆍ경제적 구조라고 생각하거든요. 그러니 정치권이 이들과 결탁해서 국민의 삶을 더 힘들게 하는 건 막아내자, 그런 감시자 역할을 해야겠다는 거였죠.”

의정 활동을 한 이래 그가 꾸준히 관심을 기울이고 목소리를 내온 경제민주화 역시 그 일환일 테다.

-건전한 시민이라는 말 속에는 어떤 뜻이 있을까요.

“거대 권력기관이나 단체에 대비되는 대척점에 있는 개인들의 총합이죠.”

-만 서른여섯 살에 국회에 입성해 18대 국회 당시 최연소 지역구 당선자였죠. 당시 한나라당은 X세대에게 어떤 곳이었나요?

“요즘엔 노털(늙은 남자를 일컫는 평안도 사투리이자 온라인 유행어)이 됐지만요. 가는 데마다 귀여움을 받았죠. 하하.”

-최근을 포함해 한국당은 전신 시절에도 나이 어린 의원을 무시하곤 하는 분위기가 강했잖아요.

“초선 때는 나이로도 선수로도 어디서나 막내니까 특별히 그런 걸 느끼지는 못했어요. 그런데 재선이 되니까 재선이 할 수 있는 당직이나 상임위 간사 같은 국회직을 두고 경합이 생길 수 있잖아요. 그러니 견제를 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죠. 본격적으로는 유승민 원내대표 당선을 전후로 당내에 편가르기 균열이 극심해졌어요. 그래도 새누리당 초기까지만 해도 이 당은 괜찮은 중도보수 정당이었죠.”

-3선이 되고 나서는 어땠나요?

“본격적으로 당직 경쟁도 시작되고 그 과정에서 마음이 상하면 아주 불편한 관계로 돌아서기도 하죠. 제가 제3자의 입장이라도 저를 그렇게 볼 것 같기는 해요. 아버지 덕분에 편하게 국회에 들어와서 의정 활동을 한다고. 하여튼 그 이후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국면에서 의원들 간에 입장 차이가 명확해졌죠. 19대 국회 후반에 생긴 그 균열이 지금은 건널 수 없는 절벽이 된 듯한 느낌이이에요.”

◇술자리서 서너 번 실려나가고 나서야
초등학교 3학년 때 정치에 입문한 부친 김진재 전 의원(왼쪽)을 보며 그는 정치는 절대 하지 않겠다고 마음먹으면서도 신문의 정치면은 꼼꼼하게 챙겨 봤다고 한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의원들은 뒤에서 농반 진반으로 그를 가리켜 ‘부잣집 도련님’이라고 부르곤 했다. 의원총회에서 감정이 격해져 “금수저가 뭘 아느냐” “나이도 어리면서” 같은 막말을 내뱉는 의원들도 있었다.

-비공개 의총에서 간혹 나이 가지고 공격하는 의원들도 있었는데 이 당은 왜 그렇게 나이가 중요한가요?

“다른 논리나 명분이 달리니까 ‘나이 갑질’을 하는 거죠. 당의 인적 구성상 시비가 붙으면 ‘너 나이 몇 살이야’로 대응하곤 하는 세대가 압도적으로 많으니까요. 지금 녹색당이나 정의당에 가서 ‘너 나이 몇 살이야’ 하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하하.”

그가 여연 원장으로 있을 때 주력한 의제 중 하나는 ‘청년의 정치 참여 확대’였다. 그런 그를 보며 당의 중진이 “여연 원장은 실험이나 하라고 만든 게 아니라 선거 승리 전략을 짜라고 있는 자리”라고 비아냥거렸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한국당이 내년 총선을 앞두고 꾸린 총선기획단에 2030세대가 단 한 명도 없는 게 다른 이유가 아니다.

-국회에 들어오고 나서 가장 뜨악한 문화는 뭐였나요?

“뜨악하기 보다 낯설었던 게 악수예요. 보는 사람마다 악수를 하더라고요. 악수는 사회 생활을 하면 하는 거지만, 여기선 사람을 볼 때마다 하더라고요. 같은 사람을 하루에 두 번, 세 번을 봐도 두 번, 세 번 악수를 해서 ‘아, 이 동네는 항상 악수를 해야 하는구나’ 했어요. 하하.”

-술도 잘 못하시잖아요.

“네, 맞아요. 그래서 처음에 한 2, 3년은 1년에 한두 번은 (술자리에서) 실려 나갔어요.”

-세상에. 못 마신다는 얘기를 못 꺼내는 분위기였나요?

“그때만 해도 ‘쌍끌이주’(둘씩 짝을 지어 원샷을 의무적으로 해야 하는 폭탄주의 일종) 이런 걸 마시고 할 때라 똑같이 마셔야 했죠. 실려나간 걸 보거나, 듣거나 한 분은 권하진 않더라고요.”

-지금은 달라졌겠죠?

“지금은 제가 반주 한두 잔 정도 하는 수준으로도 아무 문제가 없죠.”

◇좀비라는 단어 이해 못한다면…
김 의원은 의정 활동을 하면서 시종 개혁의 편에 섰다. 옛 한나라당 소장파 모임인 ‘민본21’이나 ‘경제민주화실천모임’이 대표적이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 이후 개혁보수를 지향하는 가치 정당을 만들고자 바른정당에 합류하기도 했다. 사진은 2012년 한나라당 시절 쇄신파 의원들과 국회 의원회관에 모여 당 개혁 방안을 논의하는 김 의원(맨 왼쪽). 왼쪽부터 김 의원을 비롯해 임해규, 남경필, 구상찬, 황영철 의원이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불출마 선언문에 세대의 표현이 있는 게 인상적이었어요. 절대 반지, 감수성, 좀비, 비호감의 정도가 역대급 1위 같은 것들이죠. 직접 쓰셨구나 싶었어요.

“100% 제가 썼죠. 아마 동시대인들은 바로 (어감을) 알 거예요. 그런 단어가 낯설게 느껴진다면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죠.”

-특히 당내에서 의원들이 좀비라는 단어에 민감하게 반응하던데요.

“그 단어에 격앙된 사람들이 많은데 문화를 관찰하고 공부하는 친구가 이런 말을 하더군요. 요즘 20대 사이에서는 좀비라는 말이 범람할 정도로 많이 쓰이고 좀비물(좀비가 나오는 콘텐츠)도 많기 때문에 다양한 의미로 받아들여진다고요. 인간이 아닌 멍청한 존재 정도로 해석도 가능하고요. 그런데 그런 이해가 부족한 사람은 사람 잡아먹는 귀신 정도로 생각할 거라고요. 그러니 당내에서 그 단어에 격한 감정을 보이는 분들이 있는 것 아니냐고 하길래 예리하다 싶었어요. 그래서 제가 (한국당이) 감수성 없고, 공감능력도 없고 따라서 소통능력도 없다고 하는 거죠. 그러니 문을 닫아야 한다니까요.”

-자격을 갖추지 못한 사람은 ‘절대 반지’를 끼는 순간 이성을 잃게 되는데, 내부인의 시선으로 볼 때 국회에서 주인이 아닌 사람이 이 반지를 끼고 있는 비율이 어느 정도나 될까요?

“(잠시 생각하더니) 음, 지금 같으면 한 80% 정도는 될 것 같아요.”

반대로 말하면, 60명 정도는 자격이 있다는 거다. 물론 내부자 1인의 사견이지만, 대부분의 국회의원이 당연히 나는 60명 안에 속한다고 생각하는 데서 불행이 시작되는 건 아닐까.

-한편으로는 그런 표현을 기자회견문에 쓸 수 있는, 한 세대를 대표하는 의원이 없어지는 게 안타깝다는 반응도 있죠.

“저로 인한 폭발로 생기는 공간에 세대 공감능력이 있는 많은 새로운 사람들이 들어오길 바라요. 저 하나만 있어서 될 일도 아니고 또 제가 그 역할을 제대로 못한 면도 있기 때문에요.”

-폭발로 이어질 기미가 보이질 않아요.

“그게 안돼도 어차피 소멸의 길로 가고 있죠. 당 해체가 궁극적 해법이지만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새로운 인재들이 들어올 충분한 공간이 만들어지면 좋겠어요.”

-여연 원장으로 있을 때 플랫폼 정당 연구도 했는데요. 디지털 정당도 포함되는 거겠지요?

“당연히요. 스페인의 포데모스(좌파), 시우다다노스(우파)나 프랑스의 앙마르슈처럼 실제 여러 나라에서 시도를 하고 있고요. 기존 정당들도 이런 진화에 동참하고 있죠.”

-우리나라도 태동할 법 한데요.

“시민성의 자각, 또는 회복이 절실해요. 정치적으로 큰 사건이 터지면 그에 많은 비판과 토론을 하다가도 그 문제가 수그러들면 일상 속의 정치, 생활 속의 정치에 다수 시민들이 무관심하거나 방관자 역할을 했죠. 그렇기 때문에 정당을 주도하는 극히 일부의 집단이 전체 공동체의 정치적 의사 형성의 과정과 결과를 왜곡하는 게 가능했어요. ‘왜 정치가 이 모양이냐’는 건 정당과 정치인의 탓이기도 하지만, 더 근원적으로는 나라의 주인인 국민이 주인 노릇을 제대로 하느냐의 문제죠. 주인이 주인 노릇을 안 하면 종이 주인 노릇을 하는 나라가 되니까요.”

◇지도부 ‘색출’ 반응에 ‘당 망했다’ 생각
그는 유승민 바른미래당 의원과 가깝다. 그래도 추종한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는 “존경하지만 맹종하지는 않았다”며 “판단하기에 잘못된 부분이 있으면 이견을 말할 테지만 다행히 (유 의원과) 생각이 다른 게 별로 없었다”고 말했다. 한국일보 자료사진
-정치란 것은 권력게임이기도 한데, 그런 것에는 흥미를 느끼지 못했나 봐요.

“제가 도와야겠다고 생각한 분이 있을 때는 열심히 도왔죠.”

그 중 하나가 유승민 전 새누리당 원내대표(현 바른미래당 의원)다. 그는 불출마 선언문에서도 유 원내대표를 언급했다. 유 원내대표가 박근혜 전 대통령에게 낙인 찍히고 친박 의원들에 의해 직에서 물러나야 했을 때 소극적인 반론을 펴는 데 그쳤다며 비겁했다고 반성했다.

-당시 유 원내대표가 “난도질을 당하고 물리고 뜯긴” 의총에서 그나마 반대 목소리를 낸 의원은 많지 않았어요. 그래도 연단에 섰는데, 후회가 되던가요.

“오죽 후회가 남았으면 불출마 선언문을 쓸 때 상당 비중을 할애해 썼겠어요. 그때의 비겁함을 반복하지 않기 위해서 침묵하지 않은 거예요. 동료 의원들과 관계가 불편해지는 걸 걱정해서 해야 될 말을 하지 않으면 또다시 엄청나게 후회를 할 테니까요.”

이후 그는 탄핵 국면에서 유승민 의원과 뜻을 같이하며 새누리당을 탈당해 바른정당 창당에 합류했다. 그러다가 지난해 지방선거를 앞두고 복당했다. 신념이 아니라 지역구의 출마자들을 살리기 위한 결정이었다고 그는 설명했다.

-유 의원과 관계는 어떤가요.

“여전히 제가 인간적으로, 정치적으로 현존하는 정치인 중에 가장 존경하는 분이죠. 현역은 아니나 김종인 전 대표, 조순형 전 의원도요.”

-자신이 중심이 돼 세를 모으거나 정치를 하는 일에는 관심이 없었나요.

“제가 할 역할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의정 활동을 시작할 때 스스로와 한 약속도 있었고요. 세 몰이나 패거리로 비칠 수 있는 건 하지 않았죠.”

-지난달 12일 30ㆍ40대 원외 당협위원장 6명이 ‘당을 해체하고 기득권을 내려놓자’며 위원장직을 사퇴했는데 지도부가 그 배후를 색출하라고 한 게 불출마 결심의 결정적 계기였다고요.

“아무런 ‘줄’도 ‘빽’도 없는 원외위원장들이 직을 걸고 쓴소리를 한 거예요. 그런데 지도부가 (주동자를) 색출하라는 반응을 보였다니, 당이 곧 망할 수밖에 없겠다고 생각했어요. 당의 운명은 그때 정해진 거예요. 그러니 해체를 주장한 거죠.”

색출은 과거 박근혜 전 대통령도 의원 시절부터 즐겨 했던 말이다. 자신이 의원들과의 모임에서 했던 말이 언론에 새어 나갔을 때조차 “흘린 의원을 색출하라”고 했다. 그 권위적인 모습에 실망해 등을 돌린 의원들이 여럿이다. 현재 한국당 모습이 국정농단으로 궤멸을 향해 가던 그 시기와 다른 게 뭔지 생각해 볼 일이라는 얘기다.

-불출마 선언문에서 ‘이 당으로는 무너지는 나라를 지킬 수 없다’고 했는데, 어떤 점에서 나라가 무너지고 있다고 생각하나요.

“박근혜 정부 때 국정농단의 실체는 기업들의 팔을 비틀어서 돈을 뜯어내고, 인사 농단하고, 정부 예산을 교묘하게 빼내서 개인 사업에 이용하고, 여당 공천에 개입한 것들이죠. 그런데 지금의 사태(김기현 전 울산시장 관련 ‘하명수사’ 의혹)가 확산돼서 직접적인 선거 조작에까지 이른다면, 어떻게 될까요. 소위 촛불혁명으로 탄생했다는 문재인 정부에서요. 이렇게까지 정부 여당이 폭주할 수 있는 건 한국당의 무능 때문이라고 밖에는 해석이 안 돼요. 야당이 눈을 시퍼렇게 뜨고 살아있으면 어떻게 감히 그럴 수 있겠습니까. 좀비 같은 존재라고 손가락질 받고 역사의 민폐가 되기 때문에 우리가 비켜나야 하는 거죠.”

◇“한국당은 가치 집단 아닌 이익 집단”
김 의원은 현재 자유한국당의 상태를 “박제한 동물에 수혈한다고 살아나겠느냐”는 말로 촌평했다. 자신의 불출마 선언과 당 해체 주장이 발전적인 폭발로 이어지기를 그는 기대했다. 오대근 기자
-모두 차기 총선에 불출마하고 당을 해체하자고 했는데 그 뒤에 나온 황 대표의 반응은 ‘총선에서 패배하면 물러나겠다’는 동문서답이었죠.

“그렇기 때문에 제 제안에 대한 답이 아니라고 생각해요. 회피했다고 볼 수 있지만 굳이 긍정적인 면을 보자면 (제 문제 의식에) 부정하지는 않은 거죠.”

-불출마 선언 이후 황 대표가 만나자고 하지는 않던가요?

“어제(2일) 전화는 왔어요. 2분 남짓 통화한 것 같아요. 이런 (당직 일괄 사퇴) 뜻에 동참해줘서 고맙고 그 동안 수고 많았다는 얘기였죠.”

-불출마 선언과 관련한 언급은 없었나요.

“없었어요.”

-그래서 황 대표한테 뭐라고 했나요.

“건강 잘 살피시라고 한 뒤에 끊었어요.”

-‘불출마 선언의 취지에 동감한다, 그래서 고민이다’라는 얘기를 하는 의원들은 없었나요?

“그건 말씀을 못 드리는 걸 이해해주세요. 저로 인해 다른 의원들에게 어떤 압박도 가선 안 된다고 생각해요. 오롯이 순수하게 본인의 결단이어야 하죠.”

그 뒤로 3선의 김영우 의원이 불출마 선언을 했다. 김영우 의원 역시 개혁 성향이다. 당 안팎에선 또다시 ‘정작 떠나야 할 사람들은 가만히 있다’는 씁쓸하고도 안타까운 반응이 나왔다.

-한국당이 이념이나 철학적인 뿌리가 없어서 근본 없는 정당으로 전락했다고 지적했는데, 내부인의 시선으로 보자면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요.

“가치 집단이 아니라 이익 집단이기 때문이죠. 입으로는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를 외치고 형식적으로 옹호하면서도 망가진 경제 생태계를 어떻게 건강하게 만들 건지, 기울어진 운동장을 어떻게 편평하게 맞출 건지, 대기업의 갑질이 하청업체를 어떻게 괴롭히고 있는지 들여다보고 시정 노력을 해야 하는데 그러지 않았죠. 권력을 쟁취하고 나눠 먹는 데에는 관심이 많으면서요.”

-실무형 국회의원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일단 과잉 의전을 혹독하게 제거해야 해요. (의원을 하다 보면) 사람을 보고 절하는지, 감투를 보고 절하는지 분간을 못하게 돼요. 과잉 의전에 취하면 권력 중독 현상이 일어나죠. 만인이 나를 깍듯하게 예우하니까 내 인격이 향상됐다고 착각하는데 실은 감투를 보고 절하는 거거든요. 그러니 고관대작의 대관이 아니라 야구 모자를 써야 한다는 거죠. 고위 관료를 지낸 뒤 승진의 개념으로 국회에 들어와서 또 다른 승진을 목표로 하는 이들이 아니라 우리 사회 곳곳에서 실질적인 문제 해결을 위해 몸으로 부딪히면서 활동해온 이들이 국회로 진입해야 해요. 사회에서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로 왕성하게 활동해온 30, 40대가 들어와서, 실무를 하던 자세로 나랏일을 일답게 해야 하죠.”

-의원을 하는 동안 선공후사(先公後私)였다고 했으니 가장 미안한 건 가족이겠죠.

“아이들한테 몹쓸 짓을 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아빠가 정말 필요할 때 옆에 있어주지 못해서….”

-의정 활동을 한 걸 후회하지는 않나요?

“인간이 완벽할 수 없기 때문에 늘 한계를 인식했지만, 후회하지는 않아요.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다고 자부하기 때문에. 돌이켜보면 12년 동안 기업에서 일하다가, 12년 간 정치를 했어요. 그 다음은 어떻게 될지 모르겠어요. 전혀 생각하고 있지 않아요. 그래서도 안 된다고 생각하고요.”

-인생에서 의정 활동 12년은 어떤 의미일까요?

“그 관점으로 생각해본 적이 없네요. 주민들에게 직접 선출이 돼 국록을 먹으면서 헌법기관으로서 의정 활동을 할 수 있었다는 건 대단한 영광이죠. 늘 감사해요. 또 그 이전의 경험만 가지고서는 세상이나 삶의 구석구석을 종합적으로 관찰하고 고민하고 이해하지 못했을 텐데, 의정 활동을 하면서 세상을 더 넓게 볼 수 있게 됐죠. 개인적으로도 내적 성장을 할 수 있어 역시 감사하고요.”

-정치를 하면서 행복했던 순간이 있었나요.

“아니요. 정치를 했기에 행복하다고 생각한 적은 한 순간도 없었어요. 보람을 느낀 찰나들은 있었죠. 국회선진화법이 통과됐을 때, 핵심은 빠졌을지라도 경제민주화 공약이 정책으로 시행됐을 때, ‘호스피스ㆍ완화의료 및 임종 과정에 있는 환자의 연명의료 결정에 관한 법률’이 통과됐을 때, 바른정당을 만들었을 때, 그 안에서 청년정치학교가 출범했을 때, 최근 우주개발 3법을 발의해 관련 이슈를 본격적으로 제기했을 때, 그리고 2016년 출범한 국회의원 연구단체 ‘어젠다 2050’의 활동이 떠오르네요.”

보람 있는 일을 그 정도 꼽기도 쉽지 않은 일이다. 그러나 행복은 다른 차원의 일일 것이다. 정치를 하는 사람도, 수혜자인 국민도 행복과 동떨어진 건 정치가 최선이 아닌 차악의 영역이기 때문일까.

◇아버지 살아 계셨다면…
인터뷰 끄트머리, 자신이 아버지가 되고 나서야 새삼 느끼게 된 부친의 성품을 말하다 그의 눈시울이 붉어지고 말았다. 뒤편에서 반짝이는 ‘상식ㆍ순리’는 그가 의정생활을 시작하며 지향점으로 언론에 밝힌 말이다. 알고 보니 생전 부친이 좋아하는 말이었다고 한다. 오대근 기자
-지금까지 살면서 지키려고 해온 삶의 도를 꼽는다면요.

“과유불급(過猶不及)이에요. 의정 활동을 하다 보니 좌우명이 뭐냐는 질문을 많이 받아서 처음에는 없다고 했는데, 지나고 보니 그 정도면 좌우명으로 삼을 만 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욕심이 지나치면 화가 되니까요. 또 재작년 이순신 장군을 공부할 때 마음에 새긴 게 있어요. 이순신 연구가인 김종대 전 헌법재판관이 ‘이순신 평전’에서 이순신의 정신을 사랑, 정성, 정의, 자립의 네 가지로 정리했는데, 그중에서 일에 임하는 자세가 특별히 마음에 와 닿았어요. ‘일을 준비함에 있어서는 철저히 하고, 행함에 있어서는 사력을 다하며, 마친 후에는 뒤를 돌아보지 않는다’는 거예요.”

그의 불출마 선언은 이 같은 삶도의 집약체였던 셈이다. 이쯤에서 한 가지 더 궁금한 게 생겼다.

-불출마를 고민할 때 부친이 살아계셨다면 상의를 했을 텐데, 뭐라고 하셨을까요.

“아버지께 불출마 의견을 말씀드렸을 때 저는 서른두 살이었죠. 인식이나 사고의 수준이 너무 철없고 부족한 상태였어요. 그런 제가 툭 내뱉듯이 한 얘기였는데, 아버지는 그걸 그렇게 크게 받아들이셨다는 걸 뒤늦게 알고 나서…”

그가 말을 쉽게 잇지 못할 정도로 울컥했다.

“그걸 알고 나서 땅을 치고 싶은 심정이었어요. (불출마의) 배경은 다르지만, 불출마를 결정하면서 많은 생각이 들었죠. 지금 제가 아이들 하는 걸 보면 되게 간섭하고 싶고 가르치고 싶거든요. 그런데 아버지는 저한테 한 번도 이거 해라, 저거 해라 하신 적이 없어요. 제가 먼저 ‘어떻게 해야 되겠습니까’ 여쭤도 ‘니는 어떻게 하고 싶노’ 물으셨죠. ‘이렇게 해야 될 것 같은데요’하면 ‘그렇게 해라’ 하셨죠. 그런데 아버님은 제가 한 말 때문에 불출마를 하셨구나…. 제가 아버지 입장이 돼보니까 어떻게 그렇게 하실 수 있었나 싶어요. 그렇게 저를 믿어주셨어요. 그때(아들일 때)는 몰랐죠. 저도 아이들한테 아버지처럼 하려고 노력을 하는데 잘 안되더라고요.”

그의 눈에서 눈물이 계속 흘렀다. 그가 앉은 자리 뒤편의 책상 위에는 ‘상식’, ‘순리’가 적힌 장식판이 놓여 있었다. 꼬마 전구가 달려 스위치를 켜면 글자 주변으로 반짝반짝 불이 빛났다. 그 단어들을 보는 순간 반가워 물었다. 의정 활동을 시작할 때 그가 “상식과 순리의 정치를 하겠다”고 말했던 게 생각나서다. 그가 놀라면서 “아버지가 좋아하시던 말”이라며 “아버지의 보좌관을 하던 분이 만들어 선물해준 것”이라고 말했다.

배지를 달 때 자신과 한 약속을 기억하고 지켰던 의원 한 명이 국회를 떠난다. 본회의장에서 표결 버튼을 누르고 나서 자신이 무슨 법안에 찬성했는지, 반대했는지조차 잊어버리는 의원들도 있는 국회에서 말이다. “완벽하게 지키지는 못하더라도 10년 뒤에 하는 말과 어긋나지 않도록 말을 가려서 제대로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는 그에게 ‘말을 왜 그렇게 중요하게 여기느냐’고 물었다. 황당함과 당황스러움이 섞인 표정으로 그가 되물었다. “어, 아니, 그건 당연하지 않나요?”

당연한 상식이 순리가 되는 정당이 아니라면, 그의 말대로 한 번에 불태우는 게 나을는지 모른다. 재활용조차 하지 못한다면 답은 소각이다. 그의 불출마 선언문을 비난하고 비아냥거렸던 의원들 중에 진지하게 반성하고 자성을 한 의원이 몇이나 됐을까. 한번 꼽으려 해보니 아득하다.

김 의원은 20대 국회의원을 마친 뒤의 일은 생각하지도 않고 생각해서도 안 된다고 말했다. 어느 자리에서든 그는 ‘건전한 시민’으로서 역할과 책임을 다할 것 같다. 사진은 김 의원과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로텐더홀 벽에 새겨진 헌법 전문을 다중노출 촬영한 것이다. 오대근기자
◇[인터뷰 영상] “의원 되니 가장 낯선 문화는 이것”

김지은 논설위원 luna@hankookilb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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